오르한 파묵

저자
이난아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4-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국내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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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광의 중심에 있었으나 점차 그 옛 명성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락해 간 침잠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세상의 변방에서 살아가는 분노와 우울을 딛고 마침내 문학의 힘으로 그의 도시를 세상의 중심으로 옮겨놓은

터키 문학의 거장 오르한 파묵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한 책'.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전담 번역해 온 터키 문학 전문가 이난아의 시선으로,

그의 팬이자 전담 번역가이자 연구가이자 사적인 친구로서 지켜본 오르한 파묵의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 그의 각 작품들에 대한 탐구, 창작에 임하는 자세와 철학, 번역가 이난아와의 인터뷰와 또다른 사적인 면모 등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한 번에 답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이 어느 정도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명의 작가에 대해 그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모두 정리한 책 자체도 사실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그 점에서 이 책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은 오르한 파묵의 생애에 대한 개관부터 시작하여

그의 데뷔작(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부터 최신작(순수 박물관)까지 7편의 소설과 1편의 에세이(이스탄불)를 각 챕터별로 상세히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최신작 <순수 박물관>의 집필 과정과 실제로 이스탄불에 세워진 박물관의 개관 준비 과정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파묵과 그의 고향 이스탄불의 관계에 대하여 정리하는 글과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인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늘로 우물 파듯', 매일 아침부터 매일 저녁까지 한 자리에 앉아 마치 부지런한 직장인처럼 늘 부지런히 글을 쓰는 그는,

'글을 쓰는 그 자체가 행복이자 위안이어서, 그리고 글쓰기가 곧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쓴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생 수도승처럼 하루종일 방 한 구석에서 글만 쓰면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

문학에 대한 파묵의 철학을 알고 싶다면 책의 중반부 '검은 책'에 대한 인터뷰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좋을 것 같다.

 

"문학이 화염 속 세계를 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는 문학 속에서 심오한 어떤 것과 휴머니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휴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문학이지요. 하지만 나는 문학이 세계를 구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실효성에서 보았을때, 사실 다소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중략) 문학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략)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이 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깊이에 빠지고 싶고, 그 세계에 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그저 문학을 통해, 또 내가 쓰는 소설을 통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싶을 뿐이지요."(p.97-98)

 

<안나 카레니나> 등 19세기 소설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 가족소설에서 출발한 파묵의 작품 세계는,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성향을 받아들여 다양한 장르(세밀화, 신문칼럼, 시, 연극 등)와의 콜라보레이션과

기존 소설 구성의 해체(챕터마다 제각각의 화자가 제각각 말을 하는 <고요한 집>, <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등),

이슬람 고전문학과의 퓨전(<검은 책>에서 현대 문학의 포맷 안에 이슬람 고전문학을 각색하여 접목한 것) 등

파격적인 형식적 실험들을 도입한 작품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실험의 틀 속에 담겨 있는 파묵의 이야기는 그가 살아온 이스탄불의 역사와 현대 사회상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고요한 집>과 <새로운 인생>, <눈> 등의 작품에서 격동과 혼란의 터키 역사와 사회상의 변화를 캐치해 녹여넣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 시대에 대한 담담한 관찰 외에 그 시대에 대한 연민과 비판의식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파묵의 소설 대부분은 '환상적이고 유희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고 역사적이다'(p.114).

 

"소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낙관적인 형태로 열려 있고, 세상을 질책하기보다는 인정하며,

의심하기보다는 삶의 경이로움에 동참하라고 호소합니다." (p.132)'

 

책의 뒷표지에는 이 책의 본문 일부가 프린트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변방에 살면서 느끼는 고독과 과거에 대한 굴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주변에 대한 분노가 가끔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때 주변의 폐허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존재하고 있을 한 권의 책을 가능케 한 것은, 책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책 속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야기를 지은 존재는 행복했으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영광 속에서 기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스스로를 변방보다 더한 집필실의 고독과 영감으로 유폐시킨 작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고향의 역사와 오늘을 문학의 힘을 빌어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이세상에 남기고 싶어한 작가 파묵의 내면을 잘 표현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by 해피의서재 2013. 7. 15. 17:09

검은 책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


이 책은 난해하다. 독자에게 불친절하다. 사실 이 책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작가 자신을 위해 쓴 것 같다. 소설 속에 기억의 정원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책은 작가 오르한 파묵 자신의 기억의 정원을 재현하는 데 충실했다. 그의 기억 속 어린 시절 경험과 그 때 보았던 풍광들, 읽고 접하고 상상했던 것들을 허구의 세계에 고스란히 재구성하여 되살려 놓은 파묵의 기억 속 박물관. 그래서인지 소설 속 배경이나 등장하는 설정들 중 상당수가 작가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어떤 때는 자서전 <이스탄불>의 허구 버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80년대 터키의 대중문화와 이스탄불의 겨울 거리 풍경도 생생히 그려져 있어 정말 기억의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의 구성도 독특하다. 1권이 19, 2권이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홀수 장은 소설 속 사건의 진행 상황을 보여준다면 짝수 장은 오롯이 제각각 독립된 한 편의 글들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홀수 장은 주인공 갈립이 사라진 아내 뤼야와 그의 배다른 오라비이자 자신의 사촌형인 제랄을 찾아 나서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메인 이야기이고, 짝수 장은 갈립이 찾아다니는 제랄이 신문 <밀리예트>에 연재하는 칼럼들이다. 갈립이 제랄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로 여기는 것이 이 칼럼들이며 칼럼 속의 내용은 소설 곳곳에서 출몰하며 메인 이야기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 이 칼럼 속에, 또 홀수 장의 메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다양한 비유는 옛 이슬람 문학에서 따온 것이 많아 이쪽에 사전 지식이 별로 없으면 책을 가까이 대하기가 더욱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나 또한 그쪽 지식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다만 역자 주와 책의 맨 뒷부분에 나오는 역자 후기에 기대어 그럭저럭 넘기듯이 이해하며 읽었다.

어쨌든 난해한 책인 건 맞는 것 같다. 쉽게 읽히고 이해가 잘 되는 책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 책은 묘한 마력이 있다. 안 읽힐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계속 빠져 읽게 하는 매력이 있다. 몽환적인 매력마저 느껴지는 소설 속 제랄의 칼럼(‘보스포루스의 물이 빠져나갈 때왕자 이야기는 정말 백미다)과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 묘사, 사라진 아내와 사촌 형(때로 우상처럼 여기던)을 찾아 헤매는 갈립의 꿈꾸는 듯한 여정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함께 사라진 아내와 사촌 형을 찾아나선 한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다지 화목하다고 할 수 없는, 어딘지 뭔가 결핍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의 대가족 틈에서 자란 변호사 갈립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형 제랄과, 제랄의 아버지이자 갈립의 큰아버지가 나중에 재혼해서 얻은 딸인 사촌누이 뤼야가 있다. 터키는 사촌간의 결혼이 자연스러운 모양인지, 세월이 흘러 갈립과 뤼야는 부부가 되어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제랄은 재혼한 아버지와 가정 주변을 겉돌다가 신문사 칼럼니스트가 된 후 어느 순간 완전히 독립을 한 듯 하고, 소설의 주 배경이 된 시점에서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모처에 숨어 살다시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팬을 보유하고, 사회적으로도 꽤 영향력 있는 인기 칼럼니스트인 제랄은 갈립에게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느 날 뤼야가 한 장의 쪽지만을 남긴 채 집을 나간다. 어디로 갔는지도, 왜 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즈음 사촌 형 제랄도 며칠째 신문사에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갈립은 곧 알게 된다. 평소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듯했던 두 사람이 동시에 행방이 묘연해지자 갈립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자신의 글 속에 자신만의 코드를 은근슬쩍 숨겨 놓는 특징이 있는 제랄의 칼럼 속에서 두 사람이 가 있을 곳에 대한 힌트가 있을지 모른다고 추리한 갈립은 이제 제랄의 칼럼 속에 숨은 코드들을 따라 온 이스탄불을 헤매고, 제랄이 읽었을 신문과 잡지, 스크랩을 모조리 뒤지며 제랄의 인생을, 제랄의 머릿속 기억의 정원을 파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제랄이 썼던 칼럼, 그 칼럼의 소재가 되었던 사람들과 사건들, 칼럼에 인용했던 다른 사람의 문구들, 칼럼 속에 은밀히 담겨 있었던 정치적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 제랄의 집에서 발견된 스크랩 속 제랄의 관심사들, 이런 여러 텍스트를 따라 갈립이 도달한 제랄의 실체는 갈립이 기억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실하고 처량하다. 갈립이나 또다른 제랄의 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제랄은 그리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남의 이야기 하듯 냉소적으로 칼럼에 쓰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글을 자기 것처럼 제 칼럼의 일부에 태연하게 따서 썼으며, 자신이 탐닉하던 세계에 대한 환상을 은밀히 담은 글로 사람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던 칼럼니스트 제랄의 인생. 결국 제랄도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현학적인 텍스트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혹은 매몰되어 버린 불쌍한 인생일 뿐이었던 셈이다. 갈립이 제랄의 글과 스크랩을 보고 눈물짓다가 분노의 감정을 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라고 되뇌는 제랄과 갈립, 후에 우리들 누구도 우리 자신이 아니다라고 분노어린 말을 내뱉는 갈립의 모습에서 느낀 바가 그랬다.

그러고 보니 《검은 책》 속 에피소드들은 모두 이야기라는 화두로 결부되는 듯하다. 제랄의 칼럼, 당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터키와 할리우드의 영화들, 제랄이 탐닉했던 후루피주의(문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단) .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보고 영향을 받는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왕자 이야기>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모든 책과 사물을 없애 버리는 왕자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도 어쨌든 아주 사소한 것에서조차 자아에 영향을 받는다.

글을 읽는 것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서서히 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 <검은 책> 제2권, p. 127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음에도
,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끊임없이 쓰고 읽으며, 또 그러기를 원한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도피하거나, 혹은 이야기로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안달하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속박하는 몸과 영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속임수였다.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또다른 이야기를 얻는 방법이었다.
                                                                                                             - <검은 책> 제2권, p. 45


심하면 이야기 속 세계를 진실로 믿게 되어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 그 환상이 깨어지면서 깊은 절망에 잠긴 나머지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야기에 집착하고 탐닉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더하다. 때로는 속칭 어그로를 끌려고, 때로는 남들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때로는 외롭지 않으려고, 때로는 자신의 신세를 이해받으려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난해하고 새로이 매력적인 이 책에 대해 밤낮으로 계속 생각하다 보니 이 책은 결국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문장이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닐까.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다. 오직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이건 글쓰기가 인생보다 더 경이롭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제랄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과 정체성을 은연중에 감추어 암호처럼 포장한 글을 주고받으며 세상과 벌이는 두뇌게임. 파묵에게 글쓰기란 끝없는 자기고백이고, 혹은 세상과의 밀당게임이며, 혹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말하고 싶은 사람의 하나뿐인 해방구일지도 모르겠다.

by 해피의서재 2012. 3. 1. 10:00

하얀 성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2011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무력하고 슬퍼 보이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에 수치스럽고 화가 나고 죄책감이 들고 슬퍼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슬퍼하며 죽어가는 동물을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나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데에 익숙해진 것처럼,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생각을 깨닫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과 못생긴 입과 연필을 쥐고 있는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p.195)


터키 함대에 사로잡혀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스탄불로 끌려와 한 학자의 노예로 살게 된 한 베네치아 인이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되뇌는 독백 중의 일부이다
. 여기서의 는 세간인들에게 호자(Hoca)’라고 불리던, 베네치아 인의 옛 주인을 말한다.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세상을 객관적인 과학에 입각해 바라보고 싶어했으며, 어린 파디샤의 마음을 사로잡아 권력을 쥐고 자신의 과학관과 신념을 당대의 오스만 제국에 이식하고 싶어했으나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절망하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베네치아 인 노예가 가진 서양 과학 지식에 더욱 집착했고, 그래서 더욱 자신이 처한 당대의 이스탄불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래서 당대 사람들에 대한 조소와 연민 사이에서 갈등했던 사람.
 

졸지에 낯선 땅의 노예로 끌려온 베네치아 인은 자신의 주인이 된 이 호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관찰한다.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그 외모가 마치 거울처럼 서로 똑 닮았다고 한다. 마치 또다른 자신과 함께 사는 듯한 기분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 파디샤의 명을 수행하며, 때로 서로를 질시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다가 서서히 서로에게 녹아들어간다. 책상에 마주앉아 각자의 옛 과오에 대한 고백을 서로 채근하며 써내려가던 시절부터 이미 두 사람은 서로의 운명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탄불에서 함께 잔치용 폭죽을 만들고
, 어린 파디샤를 알현하고, 흑사병을 퇴치할 방도를 찾고, 능력을 인정받은 호자가 황실 점성술사에 오르는 동안에,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점차 서로를 닮아가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가고 있었다. 짧은 소설임에도 근 수십 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긴 세월 속에서 호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든다는 명분 하에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점점 서양 과학 속으로(혹은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고, 베네치아 인은 갈수록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호자를 대신해 파디샤의 궁을 드나들며 오스만의 고관대작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린다. 호자가 그토록 무시하고 비웃고 조소하던 사람들이지만 베네치아 인에게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수준의 인사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호자가 만든 무기가 실제 전장에서 아무 효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 베네치아 인이 그 책임을 둘러쓰고 살해당할 처지에 이르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완전하게 서로의 운명을 바꾼다. 호자는 베네치아 인의 차림으로 유럽으로 떠나고, 베네치아 인은 호자가 되어 오스만 제국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든 베네치아 인은 자신과 호자의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긴다
. 어린 시절 살던 베네치아의 옛 집 정원을 그대로 재현한 정원이 딸린 오스만 제국의 자기 집에서.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과 호자의 삶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오르한 파묵은 어린 시절
,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그와 삶을 서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외모가 똑같으니 누가 누구인지, 서로 바뀌었는지 어땠는지 주위 사람들은 전혀 인식할 수 없을 테니까.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을 그런 상상을 그는 기어이 소설의 힘을 빌려 구현해 냈다.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책 속에서나마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들만의 특권일까. 그래서 <검은 책>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글쓰기라는 말이 나오나 보다. (정확한 문장은 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가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 지금 내가 사는 삶보다 더 나은 모습일까. 그런데 그 삶은 어차피 내가 사는 삶이 아닌데, 더 낫든 더 낫지 않든 더 이상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일까. 반대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면 나는 그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삶은 내 것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인 건 맞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 왔던 내가, 사실은 원래의 내가 아닌지도 모른다. 남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 이미지가 사실은 내 본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괜히 오싹해진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니, 어느 시공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든 나는 끝내 본연의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검은 책>의 이야기 속 왕자처럼 모든 것을 배척하며 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답은 내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운명까지도 모두 내 것으로 묵묵히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파묵도 어쩌면 그런 뜻으로 이 글을 쓴 것일 게다.

분량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주는 책이다.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즈가 작가를 극찬할 만하다.


by 해피의서재 2012. 1. 30. 11:58

문학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한 작가의 저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록 허구의 이야기라지만 결국 작가가 실제로 보고 겪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재구성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만 해도 작가 자신의 젊은 시절 정서적 방황과 연금술에 심취했던 과거와 맞닿아 있고, 오르한 파묵의 책들은 작가 자신의 가족사와 그의 고향 이스탄불에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다. 파묵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내가 한창 빠져 있는 ‘이스탄불 작가오르한 파묵에 대한 내 단상을 이 글에 어설프게나마 적어 보려고 한다

 자서전 <이스탄불>에서 그가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어린 시절 이스탄불 어딘가에 또다른 오르한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상을 쭈욱 해 왔는데 이것이 그의 여러 저작에서 핵심 키워드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하얀 성>만 해도 서로 외양이 똑 닮은 오스만 제국의 호자와 베네치아 인 노예의 정서적 교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고 있고, <검은 책>에 등장하는 가족과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 주변의 풍경은 실제 파묵이 살았던 이스탄불의 니샨타쉬 일대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것은 <순수 박물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오스만 시대를 소재로 한 <내 이름은 빨강>에는 그의 어머니와 형,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여주인공 셰큐레의 이름이 바로 실제 오르한 파묵의 어머니 성함이고, 그녀의 큰아들 셰브케트 역시 실제 파묵의 형인 셰브케트 파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막내아들 오르한은 더 볼 것도 없이 실제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가 무언가를 그토록 쓰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라도 좋아. 내 이야기를 들어줘.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좀 들어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 스스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못하든, 결국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살아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그들의 글 속에 녹아들고, 그래서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자신이란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현재와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싶은 욕구를 글로 해소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오르한 파묵은 항상 또다른 자신새로운 인생이라는 키워드를 화두로 안고 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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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의서재 2012. 1. 30. 11:45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 오르한 파묵 저,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

최근 터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덩달아 이끌리게 된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오르한 파묵이었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터키 최초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가 《내 이름은 빨강》의 작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터키 여행 중에 가이드가 해 주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그가 터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시간 날 때마다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고
인터넷서점에 올라와 있는 네티즌들의 독후감을 열심히 찾아보면서 이 작가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저작 한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여러 작품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눈에 띈 책이 바로 이 《이스탄불》이다. 
파묵은 '이스탄불 작가'라고도 불린다 한다. 이스탄불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고향이자, 평생에 걸친 그의 화두이다.
8편의 장편소설 중 이스탄불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도시 카르스를 배경으로 한 《눈》뿐이다.
최신작인 《순수 박물관》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탄불이 배경이다.
(심지어 이 소설의 소재인 '순수 박물관'은 아예 이스탄불에 그 실물이 들어섰다.)


파묵의 소설을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먼저 이스탄불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가 왜 그토록 이스탄불에 천착하는지, 이스탄불은 대체 어떤 도시인지,
그 도시에서 파묵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왔는지
미리 알고서 다른 저작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게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이스탄불》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아주 어린 아기 때부터 23세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까지,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이 보고 겪은 개인사와 단상,
그리고 언제나 그 배경이자 무대였던 '영원한 고향'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쉼표를 사용한 단어의 열거가 많고, 만연체이다 보니 쉽고 편하게 읽힌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게다가 교정 과정이 꼼꼼하지 못했는지 중간중간에 한두 글자를 빼먹은 듯한 오타가 눈에 띈다.
물론 많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한 개씩 나오는 정도이긴 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사람이나 꼼꼼한 사람이라면
좀 거슬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용도 다소 어렵다. 난해하다기보다는 평소에 접해 보지 않아 생소한 얘기가 좀 많다.
레샤트 에크렘 코추라든지 탄프나르라든지 하는 터키의 작가들 이름이 나오는데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들이라서.
그 외에도 여러 생소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나오는데(플로베르 같은 익숙한 서유럽 작가의 이름도 나오지만),
그들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아무래도 19세기 말~1970년대 초까지의 터키와 서유럽의 문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많아 
읽기에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 두꺼운 책에서 참 감명을 많이 받았고 동질감도 많이 느꼈다.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 그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명멸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그 시절의 나와 참 많이 비슷하단 동질감이 느껴져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람도 나처럼 마음 속에 공상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 또다른 판타지를 안고 살았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위 사람들과 완전히 섞이거나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처럼 주위를 빙빙 맴돌며 자괴감도 느끼고,
되레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낯선 거리를 홀로 정처없이 헤매는 것을 좋아하는 면에서 묘한 동지애를 느낀 때문일까.


요리사와 가정부가 있고, 고모댁, 삼촌댁 등 친척들과 함께 한 아파트를 다 차지하고 사는 부유한 집안.
(집안 어른들이 재산으로 아파트를 직접 짓고 그 현관에 자랑스럽게 '파묵 아파트'라고 명패를 써붙였다 한다)
그러나 집안은 그리 화목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계속 재산을 날렸고 집안은 점차 가난해져 갔다.
부모간의 불화도 잦아졌고, 급기야 부모가 어린 아들들을 친척집과 외가에 맡기고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사태도 벌어진다.
파묵 아파트와 지한기르의 외가,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보스포러스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아이의 머릿속에는
'이스탄불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를 자신의 도플갱어와, 집밖 보스포러스 해안에서 잊을 만하면 터지는 화재 사고와 폭발 사고, 그리고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기묘한 살인사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상상' 등으로 구성된 '두번째 세계'가 끊임없이 명멸한다. 음울한 상상과 책읽기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 소년의 눈에 비친 '시티 오브 이스탄불'은...


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잃고 흐르는 시간 속에 서서히 빛 바래고 무너지고 사라져 가는
쓸쓸하고 서글프기 짝이 없는 애잔한 풍경이었다.


풍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완전한 이슬람 영역권도 아닌
이 '어중띤' 도시에 대해 쓰여진 여러 작가들의 글들 역시 이 이스탄불의 어린 소년에게 심란함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서양의 작가들은 그야말로 여행자의 시각에서 이스탄불의 신비스런 느낌을 강조한 글을 써내려갔고,
터키 현지 작가들은 서유럽에 대한 동경과, 그런 동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스탄불의 현실과,
뒷골목 사람들의 전통적인 터키식 라이프에 대한 찬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묵이 훗날 이스탄불에 대해 썼던 4명의 작가를 일컬어 '나의 슬픈 작가들'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정처없이 방황하는 도시와, 그 도시를 닮아 덩달아 갈팡질팡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고요하다 못해 침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 일상이 빚어내는 퇴락한 길거리와 바닷가의 풍경들까지.

회색빛의 이스탄불은 그렇게 어둡고 서글픈 도시였다.

그러고보니, 한 달 전 딱 하루밖에 머무르지 못하긴 했으나 이스탄불에서 활기찬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그러나 왠지 밝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도시.
그땐 단순히 날이 흐려서려니 했는데, 파묵이 말한 '비애에 침잠한 도시'가 바로 그것이었을까.


젊은 오르한 파묵 역시 이 우울한 도시의 공기 속에서 더불어 우울하게 성장해 간다.
그 시절의 청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학교생활에 영 재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선생들에게서도 전혀 존경심을 느낄 수 없어 결석이나 일삼고 부르주아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나 하는 고등학생 파묵. 언제부턴가 정해진 길인 '이스탄불 공대 건축학과'로 순순히 걸어들어가긴 하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한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길이었던 그림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그의 첫사랑이 떠나가 버린 후로는 그림마저도 그를 달래 주지 못한다.
('딸이 술주정뱅이 화가의 누드모델 아내가 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스위스로 보내 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쓰라린 가슴을 안고 이스탄불의 퇴락한 뒷골목을 헤매고, 배를 탄 채 할리치 만을 떠돌며 마음을 달래는 동안에 
그는 자기 안에 맺힌 슬픔을, 그리고 그에게 슬픔과 영감을 동시에 준 이 도시의 영혼을 글로 토해내야겠다는 생각을
서서히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가난과 퇴락과 침울 속에 잠겨 예술 따위 크게 쳐주지도 않는 이스탄불에서
어찌 화가가 되어 가난한 삶을 자초하려 드냐는 어머니의 충고(...)에,

"다시는 건축대학에 가지 않겠어요.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
라고 외치는 파묵의 말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스탄불의 과거와, 그 정체성과, 그 도시를 그려온 화가와 작가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 성장한 한 청년의 내면풍경이 모두 담긴, 
이 두서없는 듯 기묘하고 몽환적인 고백록은 책 속에 실린 흑백 사진들과 함께 묘한 중독성마저 선사한다.
이 책을 읽은 한 네티즌은 '이스탄불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같다'고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안 읽어봐서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 말에 수긍하고 싶어진다. 그냥 왠지 서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 것 같아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후에 보이는 것은 예전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언젠가 다시 이스탄불을 찾을 것이다. 그땐 이번처럼 허겁지겁 겉만 핥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홀로 여유로이 걸으며 다시 본 이스탄불은 처음 찾았을 때 아무 생각없이 보았던 그 풍경과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비애의 안개가 보스포러스의 물결 위를 유령처럼 유영하는 이스탄불에서,
오르한 파묵이 말했던 슬픈 도시의 영혼이 그땐 내 눈앞에 선연히 보일 것만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1. 7. 3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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