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터키문학에 해당되는 글 5건
- 2013.07.15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오르한 파묵의 모든 것
- 2012.03.01 텍스트로 지은 기억의 정원 :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 1
- 2012.01.30 난 어쩌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1
- 2012.01.30 작가의 내면을 생각하다 :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읽다가
- 2011.07.31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한때 영광의 중심에 있었으나 점차 그 옛 명성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락해 간 침잠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세상의 변방에서 살아가는 분노와 우울을 딛고 마침내 문학의 힘으로 그의 도시를 세상의 중심으로 옮겨놓은
터키 문학의 거장 오르한 파묵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한 책'.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전담 번역해 온 터키 문학 전문가 이난아의 시선으로,
그의 팬이자 전담 번역가이자 연구가이자 사적인 친구로서 지켜본 오르한 파묵의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 그의 각 작품들에 대한 탐구, 창작에 임하는 자세와 철학, 번역가 이난아와의 인터뷰와 또다른 사적인 면모 등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한 번에 답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이 어느 정도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명의 작가에 대해 그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모두 정리한 책 자체도 사실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그 점에서 이 책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은 오르한 파묵의 생애에 대한 개관부터 시작하여
그의 데뷔작(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부터 최신작(순수 박물관)까지 7편의 소설과 1편의 에세이(이스탄불)를 각 챕터별로 상세히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최신작 <순수 박물관>의 집필 과정과 실제로 이스탄불에 세워진 박물관의 개관 준비 과정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파묵과 그의 고향 이스탄불의 관계에 대하여 정리하는 글과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인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늘로 우물 파듯', 매일 아침부터 매일 저녁까지 한 자리에 앉아 마치 부지런한 직장인처럼 늘 부지런히 글을 쓰는 그는,
'글을 쓰는 그 자체가 행복이자 위안이어서, 그리고 글쓰기가 곧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쓴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생 수도승처럼 하루종일 방 한 구석에서 글만 쓰면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
문학에 대한 파묵의 철학을 알고 싶다면 책의 중반부 '검은 책'에 대한 인터뷰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안나 카레니나> 등 19세기 소설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 가족소설에서 출발한 파묵의 작품 세계는,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성향을 받아들여 다양한 장르(세밀화, 신문칼럼, 시, 연극 등)와의 콜라보레이션과
기존 소설 구성의 해체(챕터마다 제각각의 화자가 제각각 말을 하는 <고요한 집>, <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등),
이슬람 고전문학과의 퓨전(<검은 책>에서 현대 문학의 포맷 안에 이슬람 고전문학을 각색하여 접목한 것) 등
파격적인 형식적 실험들을 도입한 작품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실험의 틀 속에 담겨 있는 파묵의 이야기는 그가 살아온 이스탄불의 역사와 현대 사회상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고요한 집>과 <새로운 인생>, <눈> 등의 작품에서 격동과 혼란의 터키 역사와 사회상의 변화를 캐치해 녹여넣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 시대에 대한 담담한 관찰 외에 그 시대에 대한 연민과 비판의식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파묵의 소설 대부분은 '환상적이고 유희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고 역사적이다'(p.114).
의심하기보다는 삶의 경이로움에 동참하라고 호소합니다." (p.132)'
책의 뒷표지에는 이 책의 본문 일부가 프린트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고향의 역사와 오늘을 문학의 힘을 빌어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이세상에 남기고 싶어한 작가 파묵의 내면을 잘 표현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4만 피트 상공에서 만난 아름다운 이야기 (0) | 2013.09.21 |
---|---|
잊혀진 제국, 동로마의 역사를 터키에서 만나다 (0) | 2013.09.21 |
고대 중국판 100분 토론, 염철론 (1) | 2013.07.15 |
인문 내공, 당신의 힘으로 세상을 읽고 해석하라 (0) | 2013.05.28 |
2013년의 대한민국을 예측하다 : 트렌드 코리아 2013 (0) | 2013.03.01 |
우리가 철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 강신주의『철학이 필요한 시간』 (0) | 2013.01.01 |
검은 책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
이 책은 난해하다. 독자에게 불친절하다. 사실 이 책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작가 자신을 위해 쓴 것 같다. 소설 속에 ‘기억의 정원’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책은 작가 오르한 파묵 자신의 ‘기억의 정원’을 재현하는 데 충실했다. 그의 기억 속 어린 시절 경험과 그 때 보았던 풍광들, 읽고 접하고 상상했던 것들을 허구의 세계에 고스란히 재구성하여 되살려 놓은 파묵의 기억 속 박물관. 그래서인지 소설 속 배경이나 등장하는 설정들 중 상당수가 작가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어떤 때는 자서전 <이스탄불>의 허구 버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80년대 터키의 대중문화와 이스탄불의 겨울 거리 풍경도 생생히 그려져 있어 정말 기억의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의 구성도 독특하다. 1권이 19장, 2권이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홀수 장은 소설 속 사건의 진행 상황을 보여준다면 짝수 장은 오롯이 제각각 독립된 한 편의 글들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홀수 장은 주인공 갈립이 사라진 아내 뤼야와 그의 배다른 오라비이자 자신의 사촌형인 제랄을 찾아 나서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메인 이야기이고, 짝수 장은 갈립이 찾아다니는 제랄이 신문 <밀리예트>에 연재하는 칼럼들이다. 갈립이 제랄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로 여기는 것이 이 칼럼들이며 칼럼 속의 내용은 소설 곳곳에서 출몰하며 메인 이야기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 이 칼럼 속에, 또 홀수 장의 메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다양한 비유는 옛 이슬람 문학에서 따온 것이 많아 이쪽에 사전 지식이 별로 없으면 책을 가까이 대하기가 더욱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나 또한 그쪽 지식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다만 역자 주와 책의 맨 뒷부분에 나오는 역자 후기에 기대어 그럭저럭 넘기듯이 이해하며 읽었다.
어쨌든 난해한 책인 건 맞는 것 같다. 쉽게 읽히고 이해가 잘 되는 책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 책은 묘한 마력이 있다. 안 읽힐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계속 빠져 읽게 하는 매력이 있다. 몽환적인 매력마저 느껴지는 소설 속 제랄의 칼럼(‘보스포루스의 물이 빠져나갈 때’와 ‘왕자 이야기’는 정말 백미다)과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 묘사, 사라진 아내와 사촌 형(때로 우상처럼 여기던)을 찾아 헤매는 갈립의 꿈꾸는 듯한 여정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함께 사라진 아내와 사촌 형을 찾아나선 한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다지 화목하다고 할 수 없는, 어딘지 뭔가 결핍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의 대가족 틈에서 자란 변호사 갈립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형 제랄과, 제랄의 아버지이자 갈립의 큰아버지가 나중에 재혼해서 얻은 딸인 사촌누이 뤼야가 있다. 터키는 사촌간의 결혼이 자연스러운 모양인지, 세월이 흘러 갈립과 뤼야는 부부가 되어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제랄은 재혼한 아버지와 가정 주변을 겉돌다가 신문사 칼럼니스트가 된 후 어느 순간 완전히 독립을 한 듯 하고, 소설의 주 배경이 된 시점에서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모처에 숨어 살다시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팬을 보유하고, 사회적으로도 꽤 영향력 있는 인기 칼럼니스트인 제랄은 갈립에게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느 날 뤼야가 한 장의 쪽지만을 남긴 채 집을 나간다. 어디로 갔는지도, 왜 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즈음 사촌 형 제랄도 며칠째 신문사에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갈립은 곧 알게 된다. 평소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듯했던 두 사람이 동시에 행방이 묘연해지자 갈립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자신의 글 속에 자신만의 코드를 은근슬쩍 숨겨 놓는 특징이 있는 제랄의 칼럼 속에서 두 사람이 가 있을 곳에 대한 힌트가 있을지 모른다고 추리한 갈립은 이제 제랄의 칼럼 속에 숨은 코드들을 따라 온 이스탄불을 헤매고, 제랄이 읽었을 신문과 잡지, 스크랩을 모조리 뒤지며 제랄의 인생을, 제랄의 머릿속 ‘기억의 정원’을 파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제랄이 썼던 칼럼, 그 칼럼의 소재가 되었던 사람들과 사건들, 칼럼에 인용했던 다른 사람의 문구들, 칼럼 속에 은밀히 담겨 있었던 정치적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 제랄의 집에서 발견된 스크랩 속 제랄의 관심사들, 이런 여러 ‘텍스트’를 따라 갈립이 도달한 제랄의 실체는 갈립이 기억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실하고 처량하다. 갈립이나 또다른 제랄의 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제랄은 그리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남의 이야기 하듯 냉소적으로 칼럼에 쓰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글을 자기 것처럼 제 칼럼의 일부에 태연하게 따서 썼으며, 자신이 탐닉하던 세계에 대한 환상을 은밀히 담은 글로 사람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던 칼럼니스트 제랄의 인생. 결국 제랄도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현학적인 텍스트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혹은 매몰되어 버린 불쌍한 인생일 뿐이었던 셈이다. 갈립이 제랄의 글과 스크랩을 보고 눈물짓다가 분노의 감정을 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라고 되뇌는 제랄과 갈립, 후에 ‘우리들 누구도 우리 자신이 아니다’라고 분노어린 말을 내뱉는 갈립의 모습에서 느낀 바가 그랬다.
그러고 보니 《검은 책》 속 에피소드들은 모두 ‘이야기’라는 화두로 결부되는 듯하다. 제랄의 칼럼, 당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터키와 할리우드의 영화들, 제랄이 탐닉했던 후루피주의(문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단) 등.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보고 영향을 받는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왕자 이야기>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모든 책과 사물을 없애 버리는 왕자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도 어쨌든 아주 사소한 것에서조차 자아에 영향을 받는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끊임없이 쓰고 읽으며, 또 그러기를 원한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도피하거나, 혹은 이야기로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심하면 이야기 속 세계를 진실로 믿게 되어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그 환상이 깨어지면서 깊은 절망에 잠긴 나머지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야기에 집착하고 탐닉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더하다. 때로는 속칭 ‘어그로’를 끌려고, 때로는 남들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때로는 외롭지 않으려고, 때로는 자신의 신세를 이해받으려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난해하고 새로이 매력적인 이 책에 대해 밤낮으로 계속 생각하다 보니 이 책은 결국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문장이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닐까.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다. 오직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이건 글쓰기가 인생보다 더 경이롭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제랄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과 정체성을 은연중에 감추어 암호처럼 포장한 글을 주고받으며 세상과 벌이는 두뇌게임. 파묵에게 글쓰기란 끝없는 자기고백이고, 혹은 세상과의 ‘밀당게임’이며, 혹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말하고 싶은 사람의 하나뿐인 해방구일지도 모르겠다.
김화영의『어린 왕자를 찾아서』에서 만난 생택쥐베리 (0) | 2012.05.19 |
---|---|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0) | 2012.05.09 |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해도》 (0) | 2012.04.12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0) | 2012.02.19 |
불안에 종속된 사회, 탈출구를 열어라 : 《불안증폭사회》 (0) | 2012.02.13 |
난 어쩌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1) | 2012.01.30 |
하얀 성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2011
터키 함대에 사로잡혀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스탄불로 끌려와 한 학자의 노예로 살게 된 한 베네치아 인이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되뇌는 독백 중의 일부이다. 여기서의 ‘그’는 세간인들에게 ‘호자(Hoca)’라고 불리던, 베네치아 인의 옛 주인을 말한다.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세상을 객관적인 과학에 입각해 바라보고 싶어했으며, 어린 파디샤의 마음을 사로잡아 권력을 쥐고 자신의 과학관과 신념을 당대의 오스만 제국에 이식하고 싶어했으나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절망하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베네치아 인 노예가 가진 서양 과학 지식에 더욱 집착했고, 그래서 더욱 자신이 처한 당대의 이스탄불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래서 당대 사람들에 대한 조소와 연민 사이에서 갈등했던 사람.
졸지에 낯선 땅의 노예로 끌려온 베네치아 인은 자신의 주인이 된 이 호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관찰한다.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그 외모가 마치 거울처럼 서로 똑 닮았다고 한다. 마치 또다른 자신과 함께 사는 듯한 기분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 파디샤의 명을 수행하며, 때로 서로를 질시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다가 서서히 서로에게 녹아들어간다. 책상에 마주앉아 각자의 옛 과오에 대한 고백을 서로 채근하며 써내려가던 시절부터 이미 두 사람은 서로의 운명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탄불에서 함께 잔치용 폭죽을 만들고, 어린 파디샤를 알현하고, 흑사병을 퇴치할 방도를 찾고, 능력을 인정받은 호자가 황실 점성술사에 오르는 동안에,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점차 서로를 닮아가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가고 있었다. 짧은 소설임에도 근 수십 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긴 세월 속에서 호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든다는 명분 하에’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점점 서양 과학 속으로(혹은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고, 베네치아 인은 갈수록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호자를 대신해 파디샤의 궁을 드나들며 오스만의 고관대작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린다. 호자가 그토록 무시하고 비웃고 조소하던 사람들이지만 베네치아 인에게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수준의 인사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호자가 만든 무기가 실제 전장에서 아무 효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베네치아 인이 그 책임을 둘러쓰고 살해당할 처지에 이르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완전하게 서로의 운명을 바꾼다. 호자는 베네치아 인의 차림으로 유럽으로 떠나고, 베네치아 인은 호자가 되어 오스만 제국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든 베네치아 인은 자신과 호자의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긴다. 어린 시절 살던 베네치아의 옛 집 정원을 그대로 재현한 정원이 딸린 오스만 제국의 자기 집에서.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과 호자의 삶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오르한 파묵은 어린 시절,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그와 삶을 서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외모가 똑같으니 누가 누구인지, 서로 바뀌었는지 어땠는지 주위 사람들은 전혀 인식할 수 없을 테니까.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을 그런 상상을 그는 기어이 소설의 힘을 빌려 구현해 냈다.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책 속에서나마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들만의 특권일까. 그래서 <검은 책>에 ‘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글쓰기’라는 말이 나오나 보다. (정확한 문장은 ‘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가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내가 사는 삶보다 더 나은 모습일까. 그런데 그 삶은 어차피 내가 사는 삶이 아닌데, 더 낫든 더 낫지 않든 더 이상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일까. 반대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면 나는 그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삶은 내 것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인 건 맞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 왔던 내가, 사실은 원래의 내가 아닌지도 모른다. 남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 이미지가 사실은 내 본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괜히 오싹해진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니, 어느 시공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든 나는 끝내 본연의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검은 책>의 이야기 속 왕자처럼 모든 것을 배척하며 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답은 내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운명까지도 모두 내 것으로 묵묵히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파묵도 어쩌면 그런 뜻으로 이 글을 쓴 것일 게다.
분량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주는 책이다.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즈가 작가를 극찬할 만하다.
텍스트로 지은 기억의 정원 :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 (1) | 2012.03.01 |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0) | 2012.02.19 |
불안에 종속된 사회, 탈출구를 열어라 : 《불안증폭사회》 (0) | 2012.02.13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 2012.01.09 |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1) | 2011.12.26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0) | 2011.10.23 |
문학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한 작가의 저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록 허구의 이야기라지만 결국 작가가 실제로 보고 겪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재구성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만 해도 작가 자신의 젊은 시절 정서적 방황과 연금술에 심취했던 과거와 맞닿아 있고, 오르한 파묵의 책들은 작가 자신의 가족사와 그의 고향 이스탄불에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다. 파묵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내가 한창 빠져 있는 ‘이스탄불 작가’ 오르한 파묵에 대한 내 단상을 이 글에 어설프게나마 적어 보려고 한다.
자서전 <이스탄불>에서 그가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어린 시절 ‘이스탄불 어딘가에 또다른 오르한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상을 쭈욱 해 왔는데 이것이 그의 여러 저작에서 핵심 키워드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하얀 성>만 해도 서로 외양이 똑 닮은 오스만 제국의 호자와 베네치아 인 노예의 정서적 교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고 있고, <검은 책>에 등장하는 가족과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 주변의 풍경은 실제 파묵이 살았던 이스탄불의 니샨타쉬 일대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것은 <순수 박물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오스만 시대를 소재로 한 <내 이름은 빨강>에는 그의 어머니와 형,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여주인공 셰큐레의 이름이 바로 실제 오르한 파묵의 어머니 성함이고, 그녀의 큰아들 셰브케트 역시 실제 파묵의 형인 셰브케트 파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막내아들 오르한은 더 볼 것도 없이 실제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가 무언가를 그토록 쓰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라도 좋아. 내 이야기를 들어줘.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좀 들어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 스스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못하든, 결국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살아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그들의 글 속에 녹아들고, 그래서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자신이란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현재와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싶은 욕구를 글로 해소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오르한 파묵은 항상 ‘또다른 자신’과 ‘새로운 인생’이라는 키워드를 화두로 안고 사나 보다.
성탄절을 지운 중국에게 (0) | 2018.12.25 |
---|---|
유럽의 아름다운 서점들 (0) | 2013.01.01 |
올 연휴에 읽은 책 2題 (0) | 2012.10.03 |
책쾌 조생 이야기 (0) | 2012.03.18 |
세상에서 가장 속깊은 친구 (0) | 2012.02.19 |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 (0) | 2011.10.23 |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 오르한 파묵 저,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0) | 2012.02.19 |
---|---|
불안에 종속된 사회, 탈출구를 열어라 : 《불안증폭사회》 (0) | 2012.02.13 |
난 어쩌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1) | 2012.01.30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 2012.01.09 |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1) | 2011.12.26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0) | 2011.10.23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