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2005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시기의 나는 내 마음의 갈피를 도통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한마디로 삶과 열정을 쏟을 무언가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항상 어딘가 공허했고 알 수 없는 갈증이 났다. 대체 내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뭔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사실 문제는 나 자신의 삶의 태도에도 상당 부분 있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무한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무력하게 지워갔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나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종일 도서관에 앉아 되는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들어 되는대로 뒤지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돌아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용기도, 자신감도, 도전정신도, 진득한 끈기도, 열정도 갖고 있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도서관 서가 한켠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노트에 감명깊은 구절들을 베껴적었다. 그 후 생각날 때면 책을, 또는 노트에 적어둔 구절들을 다시 펴서 보곤 했다. 

누군가 네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 이 책을 꼽겠다. 내가 갖고 있던, 그리고 지금도 해소하지 못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요동치게 해 준, 그리고 지금도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가.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내.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불화하고,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을 견뎌야 했던 인생. 800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 유화 한 장 정도. 불행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축복이라면 유일하게 그를 알아 주었던 동생 테오의 존재와 만년에 그의 그림을 인정해 준 평론가 몇 명이 전부일 것이다.


참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도리어 그의 삶이 참 행복해 보였다. 이게 웬 미친 소리냐고?


자신을 오롯이 던질 곳이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잊고 오직 한 곳에 자신의 열정을 바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을 곳이 있었으니까.


그는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다.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사색과 고민을, 그리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그가 남긴 편지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특히 테오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흐의 자부심과 열정이 녹아 있다.


그는 화가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다. 정신병 발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지키는 데 충실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신념을 절대 꺾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건 어떻게 여기건, 자신이 스스로 접하고 느껴서 가치있다 판단하면 거침없이 그 판단에 따랐다. 그는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경외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동네 일가족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비록 그 그림들이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꿋꿋이 자신만의 화법으로 자신이 사랑한 자연과 사람들을 치열하게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의 치열함이 새겨진 그림들은 불멸이 되었다.


그는 적어도 밍숭맹숭하게 살지 않았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고 있던 그 시기의 내게 고흐가 남긴 영혼의 편지들은 내 태만한 영혼을 깨우는 죽비소리가 되었다. 그 책을 처음 손에 든 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책은 내게 그런 존재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아직도,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고흐가 남긴 편지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내가 남기는 글 속에서 훗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나를 보게 될까. 열정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지켜냈던 사람의 초상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살다간 허망한 그림자의 흔적일까.


by 해피의서재 2012. 1. 9. 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