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해도 / 량얼핑 / 명진 / 2011




일전에 올린 지도에 관한 책 리스트(http://readinghappy.tistory.com/19) 중에 있던 책 중의 한 권을 최근에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3월에 감명깊게 보았던 KBS 다큐 <지도, 문명의 기억>과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읽기에 더욱 흥미로웠던 책이기도 하다.

책을 모두 읽고 느낀 점이라면, 해도가 세계사의 운명을 바꾸었다기보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사의 운명을 바꾸어 가는 과정을 해도가 증언한다고 보는 게 더 이치에 맞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새로운 지리 정보를 담은 해도가 계속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더 먼 바다로, 그 바다 건너의 새로운 대륙으로 나아갈 발판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주체는 다름아닌 인간이었으며, 해도를 비롯한 모든 지도는 인간이 나아가고 세상을 인식한 딱 그 만큼씩 그려져 왔으므로. 희망봉을 발견하기 이전 제작된 지도에 아프리카 남부가 다른 대륙과 서로 붙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책의 목차는 크게 1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은 전반적으로 '지구'에 대한 인간의 인지가 점차 확대되어가는 과정 순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1장 '고리 모양 물길에 둘러싸인 대륙'에는 바빌로니아 점토판 지도와 TO 지도 등 고대와 중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도들이 모여 있다. 바빌로니아 지도에서는 바빌론이 세상의 중심이고, TO 지도 속 세계에선 동쪽에 아시아, 북서쪽에 유럽, 남서쪽에 아프리카 대륙이 자리한 가운데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아직 관념적인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대인들의 지리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고대에 이미 상당한 지리학 지식과 현대에 가까운 구대륙(유럽+아프리카 및 아시아 일부) 지도를 남긴 프톨레마이오스와 그리스의 지리학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2장 '얽히고설킨 세계와 나침반'부터 본격적인 해도와 항해, 그리고 탐험 이야기가 등장한다. TV에서 본 덕에 눈에 익숙한 폴리네시아의 막대 지도와 프라마우도 세계 지도 등을 다시 지면에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3장부터 7장까지는 각각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항로의 발견과 개척, 신대륙 아메리카의 발견, 세계 일주 항해와 경도의 발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발견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유럽 각국의 해상 진출 배경과 그 성과, 그리고 탐험에 나선 인물들과 국가의 이후 행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중세 시기 동안 묻혀 있던 고대의 자연과학이 주목을 받고,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유럽의 과학 지식이 유입되고, 나침반이 도입되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항해술이 발전하는 등, 세상을 객관적-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보다 멀리 항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배경이 갖추어지면서 유럽은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마냥 재미있게만 읽어나가기엔 왠지 입맛이 썼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그리고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탐험가를 후원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며 열심히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의도가 씁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게다. 물론 그 시대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고, 그 시대에 유럽 각국이 식민지를 설립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이유도 없었으며, 탐험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이 TO 지도 같은 막연한 관념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세계와 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당대 유럽의 '항로 개척'이 더 많은 자원과 부를 얻기 위한 '욕망의 여정'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유럽의 입장에서 이것은 '개척과 정복'이었지만 그들의 함대를 맞이하는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엄연히 '침략과 착취'였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럽인들이 상세하게 그린 아프리카 서부 해안선 지도의 이면에 이 해안선을 따라 오가는 노예무역선에 실려갔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핏빛 역사도 배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세계사에 남은 유명한 해전과 해협들, 그리고 극지방의 발견에 관한 이야기가 관련 지도들과 함께 언급된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의 국제 정세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캐리커처 지도'도 따로 한 챕터에 모여 있다. 마치 신문 만평을 보는 듯했다. 아울러 지도 속에 이렇게 세상의 이야기가 다 들어 있구나. 하고 새삼 와닿았다. 따지고 보면 지도는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에 대한 설명을 나타낸 삽화들이 곁들여져 있던 고지도들이 함께 뇌리에 떠오르면서 든 생각이다.

이제 요즘 사람들은 구글이나 포털사이트의 지도 섹션을 통해 지리 정보를 접한다. 5대양 6대주가 모두 표시된 완성된 지구본이 학교마다 비치되어 있고 비행기와 배는 GPS와 위성 신호의 안내를 받아 가며 전세계를 누빈다. 종이 위에 그려지는 지도이든 컴퓨터를 통해 작성되고 열람되는 전자 지도이든, 현대의 지도와 지리 정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상생을 위해 기능하기를 기원해 본다. 대항해 시대 유럽이 행했던 침략과 착취의 행보를 넘어선, 진정한 상생의 여정을 여는 도구가 되어 주기를.

by 해피의서재 2012. 4. 12. 0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