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교수의 민주주의 특강 / 손석춘 / 철수와영희 / 2024


정치, 역사, 철학을 넘나들고 관통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통찰을 돕는 종합 에센스 같은 책이 올해 초에 출간되었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그때그때 선거권을 행사하는 대의정치 제도 정도로 이해하고 있어서는 절대로 자신의 삶과 국가의 주인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보장할 수 없으며, 늘 깨어서 세상에 대한 성찰과 공동체에 대한 의견 개진, 실질적인 행동을 쉬지 않는 것이 민주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메시지를 이 책은 일관되게 전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정치라는 단어의 올바른 의미부터 다시 상기시키고, 삶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이해관계와 권력관계가 곧 정치의 산물이자 대상이라는 것을 늘 인식할 것을 촉구한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을 시민이 스스로 행사한다’는 민주주의의 태동과 발전 과정이 산업혁명과 대항해시대,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 초기자본주의 체제의 빈부격차 등 경제-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있음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한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니체 등 유명 학자들의 주요 사상들이 적극 인용되어 책의 근거를 이룬다.

책은 생각하고 일하고 성찰하며 공동체와 사회의 본모습을 직시하는 시민들이 다수가 되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 건강하고 자유로운 인간 문명사회가 지속되는 조건임을 역설한다. 자신들의 권익 독점을 위해 이를 방해하는 대자본가 계층과 언론의 부역이 이 민주주의의 위기와 자본독재, 더 나아가 전쟁과 기후위기와 인간소외를 부추기고 있음을 호소하고, 이들에게 휘둘리느라 인간답게 살 권리를 망각하고 상실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위기를 성숙의 기회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자주 회자되는 이 시기에 일독을 권할 만한 책으로 보인다.

6쪽
14쪽
22쪽
30쪽
41쪽
42쪽
52쪽
59쪽
62쪽
63쪽
66쪽
69쪽
127쪽
128쪽
146쪽
163쪽
164쪽
171쪽
178쪽
182쪽
197쪽
211쪽
246쪽
253쪽
255쪽
by 해피의서재 2024. 11. 21. 11:52

제목으로 쓰인 문구는 튀르키예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 <검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회자되는 이야기들. 소설책으로, 영화로, 드라마로, 실제 현실에 없지만 오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현실의 대중들과 공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의 상당수는 범죄와 사건, 추리와 추적으로 구성되곤 한다. 고전적인 추리소설부터 첩보물, 오컬트, 형사법정물 상업영화와 게임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SF나 역사물에도 미스터리 장르는 잘 어우러든다. 온세상이 미스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르주아 계층의 지적 유희와 오락으로 출발한 미스터리 문학은 왜 두고두고 이야기 콘텐츠들의 주요 작법으로 애용되는 것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탐닉할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

그것은 미스터리 문학이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속성 때문이 아닐까. 개인과 도시, 사회와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직시하고 사건의 근원을 향해 파고드는 그 속성이, 이해할 수 없는 심연같은 이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스터리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활용되는 파르마콘이 될 수 있다. 위험성을 알면서도 복용해야 하는 독이자 약, 바꾸어 말하자면 예방적 차원의 사회적 백신이다. 이러한 파르마콘의 역할은 장르문학이나 문화 콘텐츠를 포함하는 이야기 장르가 우리에게 무해하고 선한 것이기만을 기대하는 최근의 분위기를 배반한다. 오히려 만인이 만인에게 무해하고 갈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무균실의 상상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미스터리는 기꺼이 우리를 죽이지는 않는 가상적 병균이 되기를 자처해야 한다.” (본문 168쪽)
현대의 명탐정은 추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의 힘에서 비롯되는 추리의 위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스터리가 다루어야 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병리적 증상, 폭력적 일상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우선은 수많은 사연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미스터리는 아름답고 현란한 글래스 어니언이다. 하지만 그것이 눈속임에 그쳐서는 안 된다. 미스터리 장르는 바로 그러한 추리의 세계에 어울리는 내부의 진실까지도 예비하고 배치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 한국적 미스터리가 지향해야하는 그무엇이다. (본문 250쪽)


세상의 어둠을 직시하고 파헤치는 문학장르. 대중적 인기만큼 주어진 책임도 막중한 스토리텔러. 그에 대한 라이트한 안내서이자 비평서 한 권이 올 8월 시중에 나왔다. 문학과 영화/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다양한 픽션물 속에 반영된 현실 세계의 문제점들(가치관 혼란, 도처에 만연한 폭력, 공권력-사법불신, 가족주의, 확증편향, 사이코패스 범죄 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라 개인적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 : 미스터리는 어떻게 힙한 장르가 되었나 / 박인성 지음 / 나비클럽 / 2024

by 해피의서재 2024. 9. 16. 11:49

삶을 견디는 기쁨 / 헤르만 헤세 / 문예춘추사 / 2024


김훈의 <칼의 노래>는 ‘절망으로 절망을 돌파하는’ 한 인간의 고뇌에 찬 내면을 그려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은 여러 모로 그 책을 닮았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것이 피폐해진 20세기 한복판을 살아낸 헤세는 삶과 죽음, 행복과 우울, 희망과 절망, 그리고 인간문명의 존재가치에 대한 온갖 복잡한 상념들을 가감없이 이 책에 적어 내려갔다. 산문과 시, 기행문과 투병일기, 우화같은 짧은 이야기(한 도시의 흥망성쇠, 불꽃놀이 이야기 등), 형식과 소재를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펜 가는 대로 써내려간 글들의 모음.

자신의 우울을 토로하고, 죽음을 태연하게 입에 올리고, 자살이 왜 무조건 나쁘단 거냐는 발칙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돈과 쇠와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현대 문명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투의 냉소적인 일갈도 있다. 그러나 결국 헤세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 실존에 대한 긍정이다. 개인의 요동치는 내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 그것이 어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일지언정 무작정 피하지 말고 직시하자는 것, 돈도 안되고 아무 실질적 가치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예술과 자연은 존재 그 자체로 가치가 넘치며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귀한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닫자는 것. ‘절망은 진정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고 추구한 결과’라는 헤세의 정의에 설득력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손 안에 들어오는 사이즈에 미니멀한 북디자인, 책 곳곳에 들어 있는 헤세의 그림들 등 얼핏 ‘힙스터픽’스런 느낌을 주는 책이지만, 글의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다. 삶과 죽음, 세상의 모순과 그에서 오는 절망에 대해 깊은 고뇌를 느껴본 이들에게 더 와닿을 책으로 보인다. 절망의 언어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에게 더 울림이 클 책.

67쪽
81쪽
101쪽
104쪽
165쪽
167쪽
232쪽
236쪽
266쪽
292쪽
299쪽
by 해피의서재 2024. 9. 15. 07:55

다시, 역사의 쓸모 /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


<역사의 쓸모>(2019)의 후속작이 5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한국사를 넘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프랑스 혁명과 <레 미제라블>, 유럽의 대항해시대 등 세계사 이야기까지 다루는 한층 더 커진 스케일로 독자들 곁에 돌아왔다.

조근조근 말을 거는 듯한 대화체의 글은 쉽게 읽혔고 완독까지 채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책에 대한 인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요즘같이 모든 가치가 퇴색하고 선악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듯한 혼란의 시대에, 더욱 필히 곁에 두어야 할 책이라 하면 될 듯하다.

흔들리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바른 길, 옳은 길, 선한 길, 이타적인 길을 가야 하는 이유를 새삼 발견하며 마음을 다잡게 하는 책이다.

시종일관 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묻어나는 이 책이 추구하는 가치는 사랑, 선(善), 시대에 안주하지 않는 상상력이다. 당장은 이 가치들이 무력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사회를 이끌고 역사를 써나가고 세상을 바꾸어 내는 가장 큰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이 책은 곳곳에서 역설하고 있다.

세상은 매 순간 묵묵히 자기 앞의 삶을 감당하며 시대를 넘어선 상상력과 일상 속 작은 행동들로 양심과 인간애를 지킨 수많은 이들의 움직임으로 굴러왔으며, 그렇기에 언젠가 모든 것은 반드시 바른 길, 진보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따뜻한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가 역사라는 증거를 앞세워 독자의 눈앞에 선연히 다가온다.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꾸는 이가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천천히, 묵묵히, 그러나 반드시.

30쪽
100쪽
109쪽
119쪽
174쪽
176쪽
179쪽
194쪽
205쪽
217쪽
219쪽
228쪽
252쪽
253쪽


by 해피의서재 2024. 9. 14. 14:17

책을 불태우다 / 리처드 오벤든 / 책과함께 / 2022



“지식은 아직도 공격을 받고 있다. 체계화된 지식의 집적체는 과거 역사 속에서 공격을 받아 왔던 것처럼 지금도 공격을 받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는 지식 보존을 도서관과 기록관에 맡겼다. 그러나 오늘날 이 기관들은 여러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들은 진실을 부정하고 과거를 말살하고자 하는 개인과 집단, 심지어는 국가들의 목표가 되고 있다.” - 본문 10쪽


영국 보들리 도서관의 제25대 관장인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와 같은 우려를 토로했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들과 그들이 깨우친 것들을 그 다음 대 사람들이 이어받아 배우고 발전시키고 확장시키면서 인간 문명의 역사가 발전해 왔음을 우리 모두가 안다. 그 흔적과 깨우침들이 사라지지 않고 후대에 계속 전해질 수 있도록 인간은 문자를 만들고 점토판과 파피루스와 종이에 이들을 정리하고 작성했다. 우리는 그것을 기록이라 부르고, 그 기록들을 엮은 집합체를 책이라 부르며, 그 책들이 집적된 곳을 도서관 또는 기록관이라 부른다. 도서관과 기록관이 문명, 즉 지식과 문화의 저장소이자 보루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이치로, 한 지역의 도서관에는 당연히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여기서 그 지역 사람들의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이 형성되기 마련이며 그 정체성은 그 지역민, 혹은 민족이 자신들의 역사를 지키고 미래를 향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긴 세월 동안 세계 도처에서는 책과 도서관을 파괴함으로써 특정 민족, 특정 지역민의 지성과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해 왔다. 엄연한 정신적 학살 행위다. 물론 당연히 그에 맞서 싸우는 고귀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서와 기록관리사들은 지식인이라기보다 차라리 전사(戰士)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은 아주 최근까지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책은 흔히 누군가의 방화로 한순간에 불탄 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전부터 이미 당대 사람들의 안일한 관리와 대처 속에서 방치된 채 서서히 녹슬어 사그라져 갔던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이야기와, 영국 왕실을 둘러싼 종교 내전 속에서 벌어졌던 고문서들의 수난과 실종 그리고 그 혼란 한가운데에서 큰 위기의식을 느낀 한 지식인(토머스 보들리)의 분투에 의해 설립된 보들리 도서관의 건립사를 언급하며 운을 뗀다. 먼 고대와 중세를 거쳐 19세기 영국의 미국 의회도서관 파괴 사건, 1,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홀로코스트, 보스니아 내전, 21세기 초입에 벌어진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 중에 작정하고 벌어지는 침략자들의 ‘정신 학살’, 그리고 여기에 맞서 목숨을 걸고 고서와 공문서들을 피신시킨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의 상당 부분을 채우고 있다.

“이 책은 과거에 이 기관들(도서관과 기록관들)이 파괴됐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서와 기록 관리자들이 저항한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상찬하기 위해 쓰였다. 지식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되고, 사람들과 사회가 그 지식으로부터 영감을 개발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보존된 것은 그들의 노력을 통해서였다.” - 본문 27쪽
“수백 년에 걸쳐 약화한 감독, 지도, 투자의 부족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파괴의 궁극적 원인이었던 듯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야만적 무지가 문명화한 진실에 승리했다는 파멸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식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기관을 금전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후순위로 돌리며 전반적으로 경시하는 데 따른 점진적인 몰락의 위험성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 본문 62쪽
“1814년 영국에 의한 (미국 의회)도서관 파괴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한 행위였다. 그것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설계된 계획적인 정치 행위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고대 세계의 몇몇 지식에 대한 공격과 닮았다.” - 본문 145쪽
“도서관과 기록물을 파괴하는 동기는 사례마다 각기 다르지만, 특정 문화를 말소한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 본문 246쪽
“한 사회에서 지식을 빼돌리는 것은 (그 지식이 파괴되지 않을지라도)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 사회가 자기네 스스로의 역사에 접근하지 못하면 과거에 대한 서술이 통제되고 조작되며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 - 본문 284쪽
“기록관원과 도서관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지식을 보호하는 전략과 기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기록물 파괴를 막기 위해 때로 놀라운 수준의 헌신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1940년대 빌나(현재의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종이부대’ 남녀들이 그랬고. 1992년 사라예보에서 죽은 아이다 부투로비치가 그랬고, 2000년대 바그다드의 이라크기억재단의 카난 마이캬와 그 동료들이 그랬다.” - 본문 341쪽


종이책과 기록의 파괴와 보존을 둘러싼 오랜 전쟁을 상세히 서술하던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대두 속에 거대 IT 업체로 대표되는 ‘민간 열강’의 사유재가 되어 가는 디지털 기록자료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아울러 거세지는 온라인 상업주의와 스낵컬처의 물결 속에서 물리적, 금전적 지원 문제에 맞닥뜨린 ‘공공 지식 보급의 보루’ 공공도서관의 위기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주의 환기를 호소한다.

“오늘날 미래는 언제나 과거에 대한 지식에 접하는 데 의존하고 있고, 디지털 기술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변화시킴에 따라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디지털 생활에 의해 만들어진 지식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여러 조직들에 의해 정치적, 상업적 이득을 얻는 데 어떻게 이용되느냐에도 달렸을 것이다.” - 본문 328쪽
“사회의 지식이 개인 영역에서 상업 영역으로 옮겨진 것은 사회가 응답해야 할 커다란 문제를 동반했다.” - 본문 336쪽
“현대의 삶은 갈수록 단기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즉각적인 수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고, 거래는 증권거래소에서 매 시간 수십억 회의 매매가 체결될 정도로 자동화됐다. 이렇게 단기적인 것에 고착됐음은 삶의 여러 측면에서 분명하다. 장기적인 사고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됐다. (...) 지식을 평가하고 정리하고 보존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보다 파괴하는 것이 더 값싸고 더 편리하고 더 쉽고 더 빠르겠지만, 단기적인 편의 때문에 지식을 버리는 것은 사회의 진실 파악 능력을 약화시키는 확실한 길이다. 지식과 진실이 줄곧 공격의 목표가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계속 우리의 기록관과 도서관을 신뢰해야 한다. 보존은 사회에 대한 서비스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온전성(장소에 대한 인식)을 뒷받침하며 사상, 의견, 기억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도서관과 기록관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금 지원은 줄고 있다. 이런 일이 디지털 형태를 띤 지식 보존이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중요한 요구인 시대에 일어나고 있다.” - 본문 348쪽


가짜뉴스와 근거 없는 선동성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SNS를 휩쓸고 사람들이 그때그때 순간적이고 말초적인 이슈에 부초(浮草)처럼 몰려다니며 오락처럼 소비되는 맥락 없는 혐오가 대세가 되어 버린 시대에, 정제된 책과 문서를 조금이라도 깊게 살피며 좀 더 길게 생각하고 사유하는 일이야말로 여러 모로 위기에 처한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깨어서 생각하고 현명하게 처신하는 시민들만이 무너지는 공동체를 일으켜세울 수 있다고, 그리고 공공도서관이야말로 시민들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무기고이자 보루라고 믿고 있다. 책의 저자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듯하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프나의 공공도서관이, 그곳 공동체의 교육 기회를 손상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공격에서 의도적인 목표물이 됐다는 것을 읽을 때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주변 모든 곳에서 공공도서관은 문을 닫고, 그 자금 지원은 삭감되고 있다.” - 본문 353쪽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우리의 민주적 과정에 비판 정신을 새로이 불어넣기 위한 사상의 자유로운 유포에 의존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출판의 자유를 의미하지만, 시민들은 온갖 색깔의 의견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도서관은 온갖 종류의 콘텐츠를 취득하며, 이런 자원이 우리의 견해가 도전받을 수 있게 하고 시민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한다.” - 본문 354쪽
“우리는 모두 책에 대한 공격을, 인간에 대한 공격이 곧 다가오리라는 ‘조기 경보’ 신호로 보아야 한다.” - 본문 362쪽
by 해피의서재 2024. 3. 24. 11:33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대니얼 지블랫 외 지음 / 어크로스 / 2018


오늘날 형식적 민주주의는 전세계에 걸쳐 많이 보편화되었지만, 정작 민주주의 본연의 취지와 정신을 잃고 사실상 전제주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 세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 책은 2016년 미국 대선 전후의 정계와 여론 동향을 중심으로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1930년대의 독일과 스페인, 1960~70년대의 칠레와 1990년대의 베네수엘라, 2010년대의 터키 등의 사례도 주요 반면교사로서 비중있게 언급된다.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소득과 지위, 심지어 태생에 따라 사회가 양극화되고 이로 인한 대중의 불만이 가중되는 가운데 권력을 잡기 위해 정당과 정치인들조차 상호 관용과 존중보다 혐오와 폭력을 더 선호하게 되고 이를 양분삼아 독재적 성향의 포퓰리스트가 독버섯처럼 자라 사회를 장악하는 일련의 프로세스가 이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에서 꾸준히 강조하고 있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우리 정치 지형과 여론 행방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부터 돌아보는 일이 먼저 시급할 것 같다. 비난과 복수와 일명 '사이다'라 불리는 날선 워딩에 열광하는 와중에 우리 사회는 이미 저 규범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버린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스럽다. 민주주의 본연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서 부식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정계를 비롯하여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

극단적 정치 분열은 민주주의 규범에 위협이 된다. 정치판이 세계관의 차이를 넘어 사회적, 인종적, 종교적 갈등으로 배타적인 진영으로 분열될 때 그 사회는 관용의 규범을 유지하기 힘들다. (...) 정치 집단이 서로 간 공존이 불가능한 이념으로 분열될 때, 특히 구성원끼리 교류가 부족하고 고립이 심해질 때 정상적인 정당 경쟁이 사라지고 적대적인 투쟁이 시작된다. 상호 관용이 사라지면서 정치인들은 자제의 규범까지 저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반체제 집단이 등장한다. 상황이 이러한 국면으로 접어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 148쪽
by 해피의서재 2024. 3. 23. 21:52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 / 김기태 / 새라의숲 / 2022


시, 소설, 수필, 서간…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글이 있고 지금도 도처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글이 탄생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직접 겪으며 통과해 온 시대를 자기 각자의 지식과 감성으로 해석한 글을 남겨 왔다.
이렇게 태어난 글들은 출판사의 편집자와 장정가를 만나 정갈하게 교정된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서점을 거쳐 세상에 나오고, 독자 대중을 만나 서로 교감하는 가운데 점점 더 강한 생명력을 얻어 마침내 수십 수백 년을 살며 다음 세대에 계속해서 지난 세대를 증언하게 된다.

이 책은 한국의 20세기, 즉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사이에 쓰여지고 출판된 문학책 15권을 가려 뽑아 이들의 초판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작품의 집필과 초간 출판 과정,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풍경을 고풍스런 어투로 전하고 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한국 고유의 정서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했던 시인 소월과 영랑의 마음을,
도시화와 산업화가 정신없이 몰아치던 격동의 시대를 혼란하고도 고독하게, 또 처절하게 살았던 개인들의 내면을 감각적인 소설로 기록한 젊은 작가들의 마음을,
숨막히는 독재정권 치하의 모순 가득한 사회를 바라보며 ‘사람은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한 당시 시대의 어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품은 열다섯 책들의 초판본 이야기가 여기 있다.

표지, 목차, 간기면까지 사진으로 훑어보며 이들의 출판과정과 시대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는 이 책을 어느 분야로 분류할지 묻는다면 대중이 읽기 쉽게 쓴 서지학 또는 출판학 도서로 분류하면 될 듯하다.

by 해피의서재 2024. 2. 13. 18:36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 김현철 / 김영사 / 2023


경제학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확장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어느 순간 돈 불리기 그 자체만이 목적인 학문처럼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지만.

한때 의사였던 저자는 재산도 환경도 받쳐 주지 못해서 제 몸 건강 하나 챙길 상황이 못 돼 유기되고 방치되어 있는 시골 저소득층 사람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과감히 삶의 진로를 경제학자로 틀었다. 책의 서두에 언급된 대로, 전적으로 각자 능력에 따라 개인의 삶의 질이 좌우된다는 능력주의는 사실 허상이며 각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큰 조건은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가정적-사회적 환경이라고 저자는 자각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그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제도가 국민의 실제 삶에 피부로 와닿는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세수 부담에 발목 잡히지 않고 그 제도가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설계하여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게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주된 생각이다.

저자는 그동안 경제학자로서 세계 여러 국가를 대상으로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사회 지표 조사 분석과 자체 사회실험을 진행하며 얻어낸 데이터들을 토대로 저출생, 여성 경력단절, 노인부양, 실직과 소득보장 등 현재 한국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풀어놓는다. 선의만으로는 현실적으로 제 기능을 해내는 복지사회를 만들 수 없고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나는 사례도 많기에 성급한 정책 추진보다는 신중한 접근과 철저한 사전 연구를 선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일견 타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데이터 만능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적 시선도 갖게 되지만, ’데이터로 사회를 분석하고 경제학적 접근으로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체제를 정립하여 개개인의 삶의 질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에만큼은 전적으로 찬성하는 바다.


by 해피의서재 2023. 12. 18. 21:14

풍요중독사회 / 김태형 / 한겨레출판 / 2020


202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저자는 10여 년 전 저술한 <불안증폭사회>를 비롯해 <자살 공화국>, <트라우마 한국사회>, <싸우는 심리학> 등의 저서를 통해 한국사회에 적체된 각종 병리가 어떻게 한국인의 삶을 황폐화시키는지 고찰하고 분석해 왔다.

극도로 세분화되고 하층으로 쉽게 추락하기 쉬운 위계 질서에 갇혀, 개개인이 모두 파편화된 채 남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돈과 지위에 집착하고 정신적 여유와 기본적 사회성까지 상실하고 있는 현 시대의 한국인들.

저자는 현재 한국인들의 내면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20세기 말 이후 몰아닥친,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강자독식형 정글자본주의의 정신적 인질이 되어 능력주의로 포장된 자기착취 가스라이팅과 자기혐오, 약자혐오에 갇혀 있는 사람들.
‘사회적 생존을 위해 영원히 지속해야 하는 불안한 고지전’을 치르며 자신의 우위를 끊임없이 확인받고자 하는 정신병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

그나마 1980년대 이전까진 적어도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끼리는 서로 돕고 다독이고 소통하며 지냈으니, 정 힘들어지면 도와 주는 이들이 있을 거란 최소한의 심리적 안정감이라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마저도 없이 모두가 적이자 경쟁자일 뿐인 세상이 도래했다. 소득수준과 보유 자산에 따라 세밀하게 위계가 쪼개지고 그 위계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대우의 차이가 너무나 커져 버렸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계발이란 이름의 자기학대와 남보다 뒤처져선 안되고 반드시 우위에 서야 한단 강박에서 유래된 나르시시즘 및 자기과시, 갑질이 횡행하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불리는 데 집착하며 SNS에 명품 구입 인증 사진 등 과시성 포스팅을 올리는 세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악용하여 범죄를 자행하는 사람들의 끝없는 출몰,
사는 집의 규모에 따라 어린이들이 서로 멸칭을 부르며 따돌리는 작태,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받는 데 집착하는 자들의 터무니없는 갑질에 홀로 고통받다가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속출.
그 근본적 원인은 모두 한 곳으로 향한다.

저자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 중 하나로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과 정착을 제시한다.
기본소득 지급을 통해 개인의 생존불안을 획기적으로 경감시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소모적인 생존경쟁에서 벗어나 좀더 각자의 적성에 맞는 자유롭고 생산적인 활동에 나서도록 유도할 수 있고, 이웃간의 동질감을 회복시켜 사회공동체의 복원도 가능할 것이며, 덩달아 사회 신뢰도도 올라가니 저신뢰 사회에서 사기 등을 피하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온갖 시간과 금전적 비용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이자, 한 국가의 지속가능성과도 연관되는 사안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고 물어뜯고 최후의 1인만 남을 때까지 사생결단을 내도록 강요하는 정글사회는 종국엔 지력을 다한 농경지처럼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로 남을 것이 자명하다.
한국전쟁이 남긴 오랜 트라우마 때문에 쉽진 않겠지만, 이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상상하고 실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링크] 저자 인터뷰 - 오마이뉴스, 2020.11.23.

by 해피의서재 2023. 10. 9. 11:23

에린 왕자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 심재홍 번역 / 이팝 / 2021


짐성, 여:수, 점빵, 목새, 뚤팡, 배암, 다무락…
평소 일상에서 거의 듣지 못했던 생소하면서도 왠지 정겨운 전라북도 방언이 생텍쥐페리의 명작 <어린 왕자> 위에 얹히자 익숙하던 문장들이 색다른 매력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어린 왕자>가, 그리고 전북 방언이 이렇게도 맛깔나는 글과 말이었다니.
전주 태생 언어학자가 자신의 인생 경험과 학문적 지식을 함께 녹여내어 언제든 북장단을 곁들여 낭독하고 싶은 ‘맛있는 글’을 요리해 냈다. “:”부호로 소리의 장단을 표시한 아이디어 역시 훌륭하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1 우수 오디오북 콘텐츠 제작지원사업에 선정돼 오디오북으로도 출간되어 실제 소리꾼의 목소리로 낭독을 감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경북 포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아이디어를 앞세운 지역 출판의 작은 승리로도 볼 수 있겠다.

역자 서문.
판권지
뒷표지
by 해피의서재 2023. 6. 1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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