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광주의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한길아트, 2001)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중세~근대 시대의 출판과 독서 문화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엮은 책인데 제법 흥미롭다.
종교에 경도되어 있던 중세 유럽인의 정신 세계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호화 시도서'에 대한 귀족들의 탐닉, 유럽의 도서관과 고서점,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 발명, 17~18세기 귀부인들의 독서 편력, 유명 작가와 출판인들의 일화 등 책과 유럽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재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 중에서도 내게 와닿은 문장이 하나 있어 여기 소개한다.
《에세》의 저자인 미셸 드 몽테뉴가 한 말이다.

"나 자신의 것이 분명한 책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친구나 숙녀와의 정분과는 달리 언제나 내 곁에 있으며 원할 때에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 준다. 귀찮은 근심에서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나는 오직 책으로 향한 것만으로 족하다. (중략) 도처에서 나는 평안을 찾았으나 어디에서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책이 있는 한쪽 구석을 제외하고는."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 p. 132)

최근 인간 관계에서의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에 이 문장을 접한 탓인지 더욱 공감이 갔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때로는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때로는 마음 통하는 사람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행복을 맛보는 시간은 항상 그리 길지 않았다. 말 좀 통한다 싶은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든 내 곁을 떠났고(그것이 자의이든 타의이든) 내가 다시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나지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나도 모르는 새에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말 몇 마디로 상처를 주고받고 그러다가 허무하게 인연이 끊어져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 끊어진 끈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내 수준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도 없었고 실행할 수도 없었다.

인간관계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서라도, 사실 도처에 책 외에도 즐길거리는 많다. 술, 음식, TV, 스포츠 등. 그러나 그것 역시 지속적으로 내 마음을 달래주진 못했다. 찰나의 즐거움만 남기고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 그 스쳐간 자리에는 항상 공허감만이 남았다. 내가 지금껏 뭘했나 하는 그런 기분.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 속에서 때로는 나의 무능과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글을, 때로는 나의 약해진 마음을 따스히 보듬어주는 글을, 때로는 내가 부여잡고 고민하던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만나고는 했다. 책은 내가 버리지 않는 한 항상 책장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내가 찾으면 언제든 그 자리에 있고, 내게 와서 내가 만나길 원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런 책들을 잔뜩 품은 책장을 멍하니 마주하고 있다 보면 마치 그 책장이 과묵하고 속깊은, 내가 기대기 좋은 듬직한 사람처럼 느껴지곤 한다.

책은 내게 그런 존재다. 세상에서 가장 속깊고 지혜로운 친구.

먼 길을 돌고 돌아 나는 결국 다시 내 방 한켠에 마련된 책들의 마을에 안착했다.
by 해피의서재 2012. 2. 19. 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