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 오르한 파묵 저,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

최근 터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덩달아 이끌리게 된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오르한 파묵이었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터키 최초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가 《내 이름은 빨강》의 작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터키 여행 중에 가이드가 해 주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그가 터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시간 날 때마다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고
인터넷서점에 올라와 있는 네티즌들의 독후감을 열심히 찾아보면서 이 작가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저작 한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여러 작품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눈에 띈 책이 바로 이 《이스탄불》이다. 
파묵은 '이스탄불 작가'라고도 불린다 한다. 이스탄불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고향이자, 평생에 걸친 그의 화두이다.
8편의 장편소설 중 이스탄불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도시 카르스를 배경으로 한 《눈》뿐이다.
최신작인 《순수 박물관》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탄불이 배경이다.
(심지어 이 소설의 소재인 '순수 박물관'은 아예 이스탄불에 그 실물이 들어섰다.)


파묵의 소설을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먼저 이스탄불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가 왜 그토록 이스탄불에 천착하는지, 이스탄불은 대체 어떤 도시인지,
그 도시에서 파묵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왔는지
미리 알고서 다른 저작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게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이스탄불》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아주 어린 아기 때부터 23세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까지,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이 보고 겪은 개인사와 단상,
그리고 언제나 그 배경이자 무대였던 '영원한 고향'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쉼표를 사용한 단어의 열거가 많고, 만연체이다 보니 쉽고 편하게 읽힌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게다가 교정 과정이 꼼꼼하지 못했는지 중간중간에 한두 글자를 빼먹은 듯한 오타가 눈에 띈다.
물론 많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한 개씩 나오는 정도이긴 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사람이나 꼼꼼한 사람이라면
좀 거슬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용도 다소 어렵다. 난해하다기보다는 평소에 접해 보지 않아 생소한 얘기가 좀 많다.
레샤트 에크렘 코추라든지 탄프나르라든지 하는 터키의 작가들 이름이 나오는데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들이라서.
그 외에도 여러 생소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나오는데(플로베르 같은 익숙한 서유럽 작가의 이름도 나오지만),
그들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아무래도 19세기 말~1970년대 초까지의 터키와 서유럽의 문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많아 
읽기에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 두꺼운 책에서 참 감명을 많이 받았고 동질감도 많이 느꼈다.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 그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명멸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그 시절의 나와 참 많이 비슷하단 동질감이 느껴져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람도 나처럼 마음 속에 공상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 또다른 판타지를 안고 살았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위 사람들과 완전히 섞이거나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처럼 주위를 빙빙 맴돌며 자괴감도 느끼고,
되레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낯선 거리를 홀로 정처없이 헤매는 것을 좋아하는 면에서 묘한 동지애를 느낀 때문일까.


요리사와 가정부가 있고, 고모댁, 삼촌댁 등 친척들과 함께 한 아파트를 다 차지하고 사는 부유한 집안.
(집안 어른들이 재산으로 아파트를 직접 짓고 그 현관에 자랑스럽게 '파묵 아파트'라고 명패를 써붙였다 한다)
그러나 집안은 그리 화목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계속 재산을 날렸고 집안은 점차 가난해져 갔다.
부모간의 불화도 잦아졌고, 급기야 부모가 어린 아들들을 친척집과 외가에 맡기고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사태도 벌어진다.
파묵 아파트와 지한기르의 외가,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보스포러스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아이의 머릿속에는
'이스탄불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를 자신의 도플갱어와, 집밖 보스포러스 해안에서 잊을 만하면 터지는 화재 사고와 폭발 사고, 그리고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기묘한 살인사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상상' 등으로 구성된 '두번째 세계'가 끊임없이 명멸한다. 음울한 상상과 책읽기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 소년의 눈에 비친 '시티 오브 이스탄불'은...


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잃고 흐르는 시간 속에 서서히 빛 바래고 무너지고 사라져 가는
쓸쓸하고 서글프기 짝이 없는 애잔한 풍경이었다.


풍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완전한 이슬람 영역권도 아닌
이 '어중띤' 도시에 대해 쓰여진 여러 작가들의 글들 역시 이 이스탄불의 어린 소년에게 심란함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서양의 작가들은 그야말로 여행자의 시각에서 이스탄불의 신비스런 느낌을 강조한 글을 써내려갔고,
터키 현지 작가들은 서유럽에 대한 동경과, 그런 동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스탄불의 현실과,
뒷골목 사람들의 전통적인 터키식 라이프에 대한 찬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묵이 훗날 이스탄불에 대해 썼던 4명의 작가를 일컬어 '나의 슬픈 작가들'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정처없이 방황하는 도시와, 그 도시를 닮아 덩달아 갈팡질팡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고요하다 못해 침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 일상이 빚어내는 퇴락한 길거리와 바닷가의 풍경들까지.

회색빛의 이스탄불은 그렇게 어둡고 서글픈 도시였다.

그러고보니, 한 달 전 딱 하루밖에 머무르지 못하긴 했으나 이스탄불에서 활기찬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그러나 왠지 밝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도시.
그땐 단순히 날이 흐려서려니 했는데, 파묵이 말한 '비애에 침잠한 도시'가 바로 그것이었을까.


젊은 오르한 파묵 역시 이 우울한 도시의 공기 속에서 더불어 우울하게 성장해 간다.
그 시절의 청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학교생활에 영 재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선생들에게서도 전혀 존경심을 느낄 수 없어 결석이나 일삼고 부르주아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나 하는 고등학생 파묵. 언제부턴가 정해진 길인 '이스탄불 공대 건축학과'로 순순히 걸어들어가긴 하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한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길이었던 그림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그의 첫사랑이 떠나가 버린 후로는 그림마저도 그를 달래 주지 못한다.
('딸이 술주정뱅이 화가의 누드모델 아내가 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스위스로 보내 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쓰라린 가슴을 안고 이스탄불의 퇴락한 뒷골목을 헤매고, 배를 탄 채 할리치 만을 떠돌며 마음을 달래는 동안에 
그는 자기 안에 맺힌 슬픔을, 그리고 그에게 슬픔과 영감을 동시에 준 이 도시의 영혼을 글로 토해내야겠다는 생각을
서서히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가난과 퇴락과 침울 속에 잠겨 예술 따위 크게 쳐주지도 않는 이스탄불에서
어찌 화가가 되어 가난한 삶을 자초하려 드냐는 어머니의 충고(...)에,

"다시는 건축대학에 가지 않겠어요.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
라고 외치는 파묵의 말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스탄불의 과거와, 그 정체성과, 그 도시를 그려온 화가와 작가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 성장한 한 청년의 내면풍경이 모두 담긴, 
이 두서없는 듯 기묘하고 몽환적인 고백록은 책 속에 실린 흑백 사진들과 함께 묘한 중독성마저 선사한다.
이 책을 읽은 한 네티즌은 '이스탄불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같다'고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안 읽어봐서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 말에 수긍하고 싶어진다. 그냥 왠지 서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 것 같아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후에 보이는 것은 예전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언젠가 다시 이스탄불을 찾을 것이다. 그땐 이번처럼 허겁지겁 겉만 핥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홀로 여유로이 걸으며 다시 본 이스탄불은 처음 찾았을 때 아무 생각없이 보았던 그 풍경과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비애의 안개가 보스포러스의 물결 위를 유령처럼 유영하는 이스탄불에서,
오르한 파묵이 말했던 슬픈 도시의 영혼이 그땐 내 눈앞에 선연히 보일 것만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1. 7. 31.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