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의 포착이다.”
“경험과 기억의 덩어리가 삶인 것이다.”

최근(9.20~10.3) 총 4부에 걸쳐 KBS1에서 방영된 실크로드 문화기행 다큐 <매혹의 실크로드>에서 가장 인상깊게 기억된 문장들이다.

길 위의 몸짓(춤), 소리(음악), 재주(기예) 이렇게 세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실크로드 문화를 다룬 이번 다큐에서 춤 테마는 무용가 차진엽이, 음악 테마는 작곡가 원일이, 기예 테마는 밥 장이 맡아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옛 신라 수도 경주에서 중국 북서부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북인도를 거쳐 중동 한복판에 자리한 옛 페르시아, 즉 현재의 이란에 이르는 여정을 거치면서 세 예술가는 ‘길’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와 융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행을 마친 후 여기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다큐의 마지막 장면, 경주 황룡사지 유적 위에서 펼쳐진 원일의 음악 <바람의 길>과 차진엽의 춤은 4부작짜리 다큐의 대미를 장식하는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단상으로 남았다.

일러스트레이터 밥 장은 비록 무거운 곤봉을 직접 휘두르거나, 서커스를 하거나, 말을 타고 격구나 마상무예를 직접 할 수는 없지만 대신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섬세한 선과 강렬한 색으로 화폭에 구현해 냈다. 이 기록을 엮어 출간된 책이 바로

여행, 작품이 되다 / 밥 장 / 시루 / 2019.09.16




세월은 흐르고 옛 영화는 스러졌으며 번화했던 도시는 사막같은 폐허로 변했지만 한때 그 영광스런 시간 속에서 함께 반짝이던 ‘가장 찬란하던 한순간의 포착’, 예술만큼은 시공을 넘어 공기 속에 스며든 채 오늘까지 그 빛을 내고 있다. 이 책과 다큐가 바로 그에 대한 기록이자 증거가 아닐까 한다.

원일의 <바람의 길>을 들으며 이 책을 읽으면 다큐를 보면서 느꼈던 그 감동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곡은 음원이 나올지 안 나올지 감이 안 온다...


by 해피의서재 2019. 10. 19. 21:31

https://readinghappy.tistory.com/m/64

올 1월에 주요 출판사들의 출간 예정작 목록을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8개월이 지난 현재, 이 중 어떤 책들이 어떤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는지 한 번 살펴보았다. 목록을 서로 대조해 보면, 가제와 실제 출간된 제목이 서로 다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책의 제목을 짓는 일이 출판사에게 매우 어렵고도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출간완료도서> (출판사 / ​서명 / 저자 / 출간일)

​1. 개마고원 / ​금융과 회사의 본질 :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 / 김종철 / 2019.3.4

​2. 김영사 / ​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 재레드 다이아몬드 / 2019.6.10

​3. 남해의봄날 /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권정자 외 / 2019.2.1

​4. 돌베개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 권보드래 / 2019.3.1

​5. 동아시아 / ​아름다움의 진화 : 연애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 갈등의 자연사 / 리처드 프럼 / 2019.4.17

​6. 마음산책 / ​프리모 레비의 말 : 아우슈비츠 생존 화학자의 마지막 인터뷰 / 프리모 레비, 조반니 테시오/ 2019.4.25

​7. 알마 / ​모든 것은 그 자리에 : 첫사랑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 / 올리버 색스 / 2019.4.23

​8. 반비 / ​생각을 빼앗긴 세계 : 거대 테크 기업들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가 / 프랭클린 포어 / 2019.7.15

9. 사회평론 /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2 : 베토벤, 불멸의 환희 / 민은기 / 2019.3.8

​10. 세종서적 / ​인간화된 신 / 레자 아슬란 / 2019.2.25

11. 어크로스 / ​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 은유 / 2019.3.7

12. 을유문화사 /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 김태형 / 2019.1.20

​13. 창비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2 / 유홍준 / 2019.4.25

​14. 청림출판 / ​도요타 이야기 : This is Toyota / 노지 츠네요시 / 2019.3.15

​15. 푸른역사 / ​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 전우용 / 2019.1.19

​16. 휴머니스트 / ​3.1운동 100년. 1-5 /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 2019.3.1

​17. 흐름출판 / ​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 커크 월리스 존슨 / 2019.5.3

by 해피의서재 2019. 9. 7. 12:07

역사의 쓸모 / 최태성 / 다산초당 / 2019

스타 역사 강사 최태성이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의 일생과 선택을 들여다보며 깨달은, 진정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침과 교훈들을 22개의 이야기 속에 녹여 엮은 책이다.

각자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한국사 속의 여러 결정적인 장면들이 읽는 이에게 깊은 통찰과 울림을 준다.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을 전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삶 속을 흐르고 있는 현재라고. 현재 처한 세상의 부조리에 지레 포기하지도, 눈앞의 이익에 쉽게 자신을 팔지도 말라고. 자신의 존엄함을 지키며 자신과 세상을 진정으로 가치있게 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그런 삶이 비록 당사자에겐 지난하고 보는 이에겐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르나 역사는 결국 그런 이들의 편이었고 끝내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해 갔노라고. ​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요, 그 갈망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한 시대의 꿈이 이루어져서 다음 시대가 와요. 이걸 알게 되면 굉장히 설렙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꿈은 뭘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언제 오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역사학자 E.H.카의 유명한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미리 벽을 세워버려요. 역사 속 인물은 과거의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름을 외우고 업적을 외우는 게 끝이죠.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과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32~33쪽

역사 속에서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정상에서 배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줄 알고, 잘 내려온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내려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나의 존재, 나의 격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59쪽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광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저는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창조인가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한 창조만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꿔나갈 테니까요. -116~117쪽

저는 사람들이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 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자신만의 자리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그 힘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든요. -214쪽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젊음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역사라는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저는 늘 사람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만큼 뒤이어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 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훗날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일생으로 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26쪽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낸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세부적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그 궤적은 같아요.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나갔던 사람들이거든요. (...)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어요. 아무리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이 부족하고 그 사람만의 무언가가 없으면 진정한 ‘인싸’가 되지 못합니다. 손에 쥔 것이 없어지면 전부 사라질 인기이고 인연인 것이죠. -240쪽

시민의식이 다른 게 아닙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정신, 법과 도덕을 준수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이릅니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한다면, 권리만 찾고 의무는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정치에 참여히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시민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시민사회가 탄생한 지 100년, 이제 시민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282쪽

by 해피의서재 2019. 8. 30. 16:13

요즘들어 ‘이성적, 과학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온갖 과잉정보와 가짜뉴스와 루머로 가득찬 세상에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이야말로 절대적인 생필품이 아닐까 해서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키우는 데는 수학만한 게 없다고들 하는데, 도대체 알아볼 수조차 없는 별의별 수식과 도형으로 점철된 옛 수학 교과서와 문제집, 참고서 등을 떠올리면 역시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되고 만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이런 수포자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교양 수학 서적이 많이 발간되었다. 일상 생활과 정보산업 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제시한 책이 다수이다.

나름대로 추려본 목록을 여기 제시해 본다.

1. 수학으로 세상을 바꾸다 : 삶의 지혜와 변화를 주는 수학 / 양영오 / 청문각 / 2019
2. AI, 빅데이터에 숨어 있는 수학의 아름다움 / 우쥔 / 세종서적 / 2019
3. 수학이 필요한 순간 / 김민형 / 인플루엔셜 / 2018
4. 수학의 감각 : 지극히 인문학적인 수학 이야기 / 박병하 / 행성B / 2018
5. 수학에 관한 어마어마한 이야기 / 미카엘 로네 / 클 / 2018
6. 내가 사랑한 수학 이야기 / 야나기야 아키라 / 청어람e / 2018
7. 세상을 바꾼 위대한 오답 : 수학짜 수냐의 오답으로 읽는 거꾸로 수학사 / 김용관 / 궁리 / 2017
8. 박경미의 수학N / 박경미 / 동아시아 / 2016
9. 수학에서 꺼낸 여행 : 프랑스, 영국, 미국으로 떠나는 수학문화 기행 / 안소정 / 휴머니스트 / 2016
10.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개념 100 / 라파엘 로젠 / 반니 / 2016

by 해피의서재 2019. 8. 27. 12:23

사라진 여성 과학자들 / 펜드리드 노이스 / 다른 / 2019



인류 과학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여성 과학자 16명의 일생과 그들의 업적을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의 형태로 정리하여 엮은 책.

책은 중세 프랑스 궁정에서 일하며 임상 산부인과 의학을 발전시킨 루이제 부아지에 이야기로 시작된다.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어거스타 에이다 바이런 러브레이스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라듐을 발견한 최초의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리 퀴리의 신산했던 삶, ‘등불을 든 천사’ 이미지에 가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공중보건학자이자 의료행정가로서의 진면목이 이어서 펼쳐지고, 근세의 천문학자 마리아 쿠니츠, 대다수의 여성이 과학과 학문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근세 시대에 직접 ‘여성을 위한 쉬운 화학책’을 쓴 마리 뫼르드라크, 미국 해군 소속 장교로서 컴퓨터 언어 번역 프로그램인 컴파일러의 고안과 발달을 이끈 그레이스 머레이 호퍼, 2차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원자핵의 베타붕괴 반응을 실험으로 입증한 우젠슝, 수많은 항암제와 백혈병 치료제를 개발해 내며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린 거트루드 벨 엘리언에 이르기까지 아직 대중들에게 낯선 여러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들이 세심한 설명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청소년 교양도서에 적합한 성격의 책으로, 여성 지성사와 더불어 물리학/수학/화학/의학의 발전사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 중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도 있고, 다소 낯선 이름도 있다. 비록 책의 제목대로 ‘사라진’ 혹은 흔적도 없이 ‘지워진’ 적은 없지만. ‘잊혀진’ 혹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이름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적극적으로 발굴되고 기억되며 널리 회자되게 하는 것이,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정진하여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그녀들에 대한 합당한 대우일 것이다.

PS.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lara1020&logNo=130169405047
마리아 쿠니츠의 일대기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주소. 추가 참고자료로 올려 본다.

by 해피의서재 2019. 8. 19. 20:19


이웃집의 백호 / 백호 누나, 백호 / 위즈덤하우스 , 2019

(아래의 글은 2019년에 쓴 것이다. 당시엔 해당 책의 저자의 선의를 진심으로 믿었었다. 4년이 흐른 지금, 이 글은 저자 관련 이슈로 완전히 빛이 바랬다. 2023년 현재의 시점에 대해선 이 링크 참조.)

반려동물 천만 마리 시대. 아울러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가 공중파 방송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SNS에 자신의 반려동물을 소개하는 계정이 많아지고, 그 중 몇몇 계정은 여간한 연예인이나 유명인 못지 않은 뜨거운 관심을 몰고 다니기도 한다. 심지어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가 종이책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올해 다섯 살 난 웰시코기 백호. 견주의 성인 강씨를 앞에 붙이면 자연스럽게 ‘강백호’가 된다. 인기 만화 <슬램덩크> 주인공의 이름과 똑같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 만화 주인공처럼 이 강아지도 넷상에서, 아니 넷을 넘어 현실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5년 전, ‘이웃집의 백호’라는 이름의 트위터 계정에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주 조그마한 웰시코기 강아지의 사진을 올릴 때만 해도 ‘백호 누나’는 이 정도의 인기와 영향력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표정과 어딜 가나 씩씩하고 싹싹한 백호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백호에 열광하는 ‘랜선 누나’와 ‘랜선 형’이 늘어났고, 이제 백호는 SNS 팔로워 수 70만 명을 거느린 ‘스타견’이 되었다.

너무 작고 약해서 다른 형제들이 다 입양을 가는 동안 입양처를 찾지 못했다는 강아지 백호. 만약 끝까지 입양처를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냥 대충 개를 키우다 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가벼운 생각을 가진 견주에게 갔다면 지금의 ‘이웃집의 백호’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오랫동안 시추를 반려견으로 키우다 보낸 백호의 누나는 이미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백호만큼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 놓인 다른 개들을 위한 자선 활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SNS 인기견으로서 얻은 백호의 인지도를 활용한, 그야말로 ‘선한 영향력’의 행사를 시작한 것이다.

백호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산책회’를 열 때마다 백호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몇백 명의 인파가 몰려오고, 백호를 모티프로 한 일러스트와 디자인이 반영된 ‘굿즈’(기념품)는 공지가 뜨기 무섭게 예약이 밀려든다. 이렇게 들어온 수익은 모두 유기동물 보호소에 기부할 사료와 기타 물품 비용으로 지출된다. 기부처와 기부 내역도 모두 SNS에 공개된다.

백호는 언제나 해맑다. 유난히 낯가림이 없고, 누굴 만나든 사람처럼 웃으면서 반긴다. 당당하게 마트 한복판을 누비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심지어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렇게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동물병원에서 주사를 맞는 와중에도 수의사의 얼굴을 혀로 싹싹 핥아 주며 열광적으로 반가워한다.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만큼 사랑을 표현할 줄 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백호 누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헌신적인 돌봄과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늘 환하게 웃는 백호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한 생명과 함께하는 것은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날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강아지의 평균적인 수명은 15년. 내 인생의 15년을 함께할 생명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가벼워서는 안된다.” - 249쪽

개의 하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소파와 침대를 높이 15cm 이하로 모두 맞춰 제작하고,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매일 털빗질과 집안 청소와 바깥 산책과 삼시세끼 생식 급여를 빼놓지 않으며, 수시로 동물병원에서 건강 체크를 해주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동물 전용 구급 키트를 살피고 챙기는 삶. 2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이 작은 털동물에게 자기 삶의 일부를 온전히 내어 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 동물 반려를 쉽게 결정하지 말라고 이 책은 엄중히 경고한다.

백호의 누나는 자신보다 강아지가 먼저 세상을 등질 것임을 알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강아지와 더 재밌게 살고 훗날 ‘우리 재밌었지? 좋은 파트너였지?’ 하고 헤어질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더불어 이세상의 다른 모든 개들에게도 지금의 백호처럼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지금도 버림받고 외로운 개들을 위한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사람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개와, 그 개의 사랑을 원동력으로 성장하는 사람.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by 해피의서재 2019. 7. 8. 22:03


드미트리 오를로프가 쓴 ​<붕괴의 다섯 단계>​(궁리, 2018)의 뒷표지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요약해 보여 주고 있다.

시스템 자체의 붕괴도 문제지만 이 책이 가장 경계하는 붕괴는 바로 ‘신뢰의 붕괴’가 아닐까 한다.

기업을 믿을 수 없고, 정부를 믿을 수 없고, 이웃을 믿을 수 없고, 급기야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싸우고 빼앗고 죽여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의 세계만도 못한 세상으로 알게모르게 우리 모두 끌려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를, 인류 모두를 이런 아비지옥으로 끌고 가는 원흉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도 그리 넉넉하게 남겨진 것 같지가 않다.

by 해피의서재 2019. 6. 21. 18:25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또 면상을 갈겨 주겠다고 한 번 마음먹으면 다른 해명을 찾으려 하지 않는 탓에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재발을 방지하는 능력도 줄어든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지극히 단순한 해법에 갇히면 좀 더 복잡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고, 우리 힘을 적절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295쪽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이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315쪽

...... 이 글귀들은 모두 한 권의 책에서 나온 말들이다. 올해 3월에 김영사에서 출간된 올라 로슬링의 ​<팩트풀니스(Factfulness)>가 그 책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고 언론에서 말하는 만큼 극적이지 않으며 세상의 부조리를 바꾸는 것은 평범한 대중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올곧게 행동하고 성실하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삶들의 결집이라는 저자의 메시지는 요즘같은 시기에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덕목인 것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9. 6. 7. 22:05

​90년생이 온다 / 임홍택 / 웨일북스 / 2019

​서기 105년에 발명된 종이는 지금까지 2000년 가까이 인류와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일부 지식층과 권력층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책을 일반인들에게 감추려 노력해 왔다. 쓰고 읽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독점되는 시대에는 진실이 숨겨지고 거짓된 이야기와 근거 없는 신화가 판을 쳤다. (...)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류는 점차 책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대중화된
​깊이 읽기의 관행은 점차 사라지고, ​소수의 엘리트만의 영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사적인 표준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 그룹은 2005년 <Annual Review of Sociology>에서 우리의 독서 습관에 있어 최근의 ​​변화들은 ​‘대중적인 독서의 시대’가 우리 지적 역사에 있어 짧은 ‘예외’였음을 암시한다고 썼다.​ 대중적인 ​독서는 예전의 사회적 기반, 즉 독서 계층이라 부를 수 있는 소수의 것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가 2017년 국회에서 발표한 <독서와 시민의 품격>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람의 뇌는 본래 독서에 적합하게 진화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독서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92-96쪽)

종이책 한 권을 통독하는 것보다 모바일 화면으로 짧은 웹문서나 SNS 포스팅, 동영상을 검색해서 빠르게 보는 것이 익숙하다는 90년대생들. 일단 위에 언급한 책에서는 이러한 취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어제 맞던 정보가 오늘은 틀린 사실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진 현대 세계에서 한 권의 종이책을 진득하게 완독한다는 게 어쩌면 참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빠르게 최신 정보를 찾아내고 곳곳에 퍼진 조각난 정보들을 모아 재구성하는 게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능력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의 주제에 관한 정보를 유기적으로 정리하고 그 체계와 논리를 완성도 있게 구성한 책을 집중해서 완독하는 경험 또한 충분히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긴 글을 집중해서 읽고 쓰며 논리의 유기성을 살피고 따져보는 경험이 충분치 않다면 짧게 조각난 정보 한두 가지만 보고 쉽게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실수가 증가할 가능성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불어 대다수의 대중들의 ‘깊이 읽는 능력’이 저하되는 가운데 소수의 엘리트들에 한해 이런 능력이 이어지며 이게 또다른 지식 권력으로 사용되는 상황으로 흘러간다면 그것 역시 미래 사회에 또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되지 않을까.

​‘문서에 대한 유연하고 빠른 이동에는 익숙해졌지만 문서에 대한 집중력은 약해졌다. 특히 검색엔진은 종종 우리가 찾는 내용과 연관이 있는 문서의 일부분이나 키워드를 보여주며 우리의 관심을 끌지만, 저작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만한 근거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웹에서 검색을 하면 숲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나무조차도 보지 못한다. 잔가지와 나뭇잎만 볼 뿐이다.’ (89쪽)


by 해피의서재 2019. 3. 24. 20:34

역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요즘 ​<우주를 계산하다>(이언 스튜어트/ 흐름출판/ 2019)라는 두꺼운 천체물리학 책을 읽고 있다. 이언 스튜어트의 간결하고도 매끄러운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이전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온갖 수학/물리학 용어와 맞닥뜨리니 좀체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책머리에 실려 있던 <수학이 필요한 순간>의 김민형 저자가 한 말처럼 어디 이과학 관련 독서모임이라도 찾아 들어가서 매주 한 챕터씩 함께 읽고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의 강독회라도 제안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언뜻 <수학용어사전>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런 사전이라도 하나 옆에 끼고 읽어야 할지.

하지만 확실히 보람은 있다. 예전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지적 세계에 과감히 한 걸음 내밀었다는 근거없는 뿌듯함과 더불어, 두껍고 어려운 책이라도 계속 집중해서 읽어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읽어야 할 부분이 읽어온 부분보다 줄어 있다는 데서 오는 모종의 성취감,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이 과학 분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지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허망한 시간 낭비가 아니다.

모든 과학은 수학을 기반으로 발전한다는 말을 이 <우주를 계산한다>를 읽으며 실감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찰과 사색과 연구를 거쳐 발견하고 고안해 낸 수학 수식과 법칙들을 활용해 각종 천체들의 궤도를 알아내고 이전엔 알지 못했던 우주의 온갖 물질, 성분, 발달과정까지도 밝혀내는 과정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미신이나 환상이 아닌 검증된 사실과 수학 이론을 정밀하게 살피고 활용해 이렇게 물질과 우주의 원리를 찾아내고 또 그걸 가지고 까마득한 우주 공간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과연 이 책의 에필로그에도 내 생각과 상통하는 문장이 있었다.

“수학은 천문학을 비롯해 핵물리학, 천체물리학, 양자론, 상대성 이론, 끈 이론 같은 관련 분야들과 함께 나란히 발전해 왔다. 과학은 질문을 던지고, 수학은 그 답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하며, 수학적 발견은 새로운 현상을 예측한다.” - 477쪽

“과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개선하고 있고, 새로운 발견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 이것은 진짜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이다. 세 걸음 전진했다가 두 걸음 후퇴하는 식이다. ... 과학은 항상 잠정적이고, 현재의 증거가 뒷받침하는 만큼만 옳다. 그런 증거에 대해 과학자들은 ‘마음을 바꿀’ 권리를 유보한다.” - 480쪽

by 해피의서재 2019. 3. 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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