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여성 과학자들 / 펜드리드 노이스 / 다른 / 2019



인류 과학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여성 과학자 16명의 일생과 그들의 업적을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의 형태로 정리하여 엮은 책.

책은 중세 프랑스 궁정에서 일하며 임상 산부인과 의학을 발전시킨 루이제 부아지에 이야기로 시작된다.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어거스타 에이다 바이런 러브레이스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라듐을 발견한 최초의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리 퀴리의 신산했던 삶, ‘등불을 든 천사’ 이미지에 가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공중보건학자이자 의료행정가로서의 진면목이 이어서 펼쳐지고, 근세의 천문학자 마리아 쿠니츠, 대다수의 여성이 과학과 학문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근세 시대에 직접 ‘여성을 위한 쉬운 화학책’을 쓴 마리 뫼르드라크, 미국 해군 소속 장교로서 컴퓨터 언어 번역 프로그램인 컴파일러의 고안과 발달을 이끈 그레이스 머레이 호퍼, 2차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원자핵의 베타붕괴 반응을 실험으로 입증한 우젠슝, 수많은 항암제와 백혈병 치료제를 개발해 내며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린 거트루드 벨 엘리언에 이르기까지 아직 대중들에게 낯선 여러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들이 세심한 설명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청소년 교양도서에 적합한 성격의 책으로, 여성 지성사와 더불어 물리학/수학/화학/의학의 발전사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 중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도 있고, 다소 낯선 이름도 있다. 비록 책의 제목대로 ‘사라진’ 혹은 흔적도 없이 ‘지워진’ 적은 없지만. ‘잊혀진’ 혹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이름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적극적으로 발굴되고 기억되며 널리 회자되게 하는 것이,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정진하여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그녀들에 대한 합당한 대우일 것이다.

PS.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lara1020&logNo=130169405047
마리아 쿠니츠의 일대기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주소. 추가 참고자료로 올려 본다.

by 해피의서재 2019. 8. 19. 20:19


이웃집의 백호 / 백호 누나, 백호 / 위즈덤하우스 , 2019

(아래의 글은 2019년에 쓴 것이다. 당시엔 해당 책의 저자의 선의를 진심으로 믿었었다. 4년이 흐른 지금, 이 글은 저자 관련 이슈로 완전히 빛이 바랬다. 2023년 현재의 시점에 대해선 이 링크 참조.)

반려동물 천만 마리 시대. 아울러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가 공중파 방송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SNS에 자신의 반려동물을 소개하는 계정이 많아지고, 그 중 몇몇 계정은 여간한 연예인이나 유명인 못지 않은 뜨거운 관심을 몰고 다니기도 한다. 심지어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가 종이책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올해 다섯 살 난 웰시코기 백호. 견주의 성인 강씨를 앞에 붙이면 자연스럽게 ‘강백호’가 된다. 인기 만화 <슬램덩크> 주인공의 이름과 똑같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 만화 주인공처럼 이 강아지도 넷상에서, 아니 넷을 넘어 현실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5년 전, ‘이웃집의 백호’라는 이름의 트위터 계정에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주 조그마한 웰시코기 강아지의 사진을 올릴 때만 해도 ‘백호 누나’는 이 정도의 인기와 영향력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표정과 어딜 가나 씩씩하고 싹싹한 백호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백호에 열광하는 ‘랜선 누나’와 ‘랜선 형’이 늘어났고, 이제 백호는 SNS 팔로워 수 70만 명을 거느린 ‘스타견’이 되었다.

너무 작고 약해서 다른 형제들이 다 입양을 가는 동안 입양처를 찾지 못했다는 강아지 백호. 만약 끝까지 입양처를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냥 대충 개를 키우다 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가벼운 생각을 가진 견주에게 갔다면 지금의 ‘이웃집의 백호’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오랫동안 시추를 반려견으로 키우다 보낸 백호의 누나는 이미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백호만큼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 놓인 다른 개들을 위한 자선 활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SNS 인기견으로서 얻은 백호의 인지도를 활용한, 그야말로 ‘선한 영향력’의 행사를 시작한 것이다.

백호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산책회’를 열 때마다 백호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몇백 명의 인파가 몰려오고, 백호를 모티프로 한 일러스트와 디자인이 반영된 ‘굿즈’(기념품)는 공지가 뜨기 무섭게 예약이 밀려든다. 이렇게 들어온 수익은 모두 유기동물 보호소에 기부할 사료와 기타 물품 비용으로 지출된다. 기부처와 기부 내역도 모두 SNS에 공개된다.

백호는 언제나 해맑다. 유난히 낯가림이 없고, 누굴 만나든 사람처럼 웃으면서 반긴다. 당당하게 마트 한복판을 누비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심지어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렇게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동물병원에서 주사를 맞는 와중에도 수의사의 얼굴을 혀로 싹싹 핥아 주며 열광적으로 반가워한다.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만큼 사랑을 표현할 줄 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백호 누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헌신적인 돌봄과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늘 환하게 웃는 백호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한 생명과 함께하는 것은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날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강아지의 평균적인 수명은 15년. 내 인생의 15년을 함께할 생명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가벼워서는 안된다.” - 249쪽

개의 하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소파와 침대를 높이 15cm 이하로 모두 맞춰 제작하고,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매일 털빗질과 집안 청소와 바깥 산책과 삼시세끼 생식 급여를 빼놓지 않으며, 수시로 동물병원에서 건강 체크를 해주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동물 전용 구급 키트를 살피고 챙기는 삶. 2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이 작은 털동물에게 자기 삶의 일부를 온전히 내어 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 동물 반려를 쉽게 결정하지 말라고 이 책은 엄중히 경고한다.

백호의 누나는 자신보다 강아지가 먼저 세상을 등질 것임을 알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강아지와 더 재밌게 살고 훗날 ‘우리 재밌었지? 좋은 파트너였지?’ 하고 헤어질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더불어 이세상의 다른 모든 개들에게도 지금의 백호처럼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지금도 버림받고 외로운 개들을 위한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사람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개와, 그 개의 사랑을 원동력으로 성장하는 사람.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by 해피의서재 2019. 7. 8. 22:03


드미트리 오를로프가 쓴 ​<붕괴의 다섯 단계>​(궁리, 2018)의 뒷표지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요약해 보여 주고 있다.

시스템 자체의 붕괴도 문제지만 이 책이 가장 경계하는 붕괴는 바로 ‘신뢰의 붕괴’가 아닐까 한다.

기업을 믿을 수 없고, 정부를 믿을 수 없고, 이웃을 믿을 수 없고, 급기야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싸우고 빼앗고 죽여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의 세계만도 못한 세상으로 알게모르게 우리 모두 끌려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를, 인류 모두를 이런 아비지옥으로 끌고 가는 원흉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도 그리 넉넉하게 남겨진 것 같지가 않다.

by 해피의서재 2019. 6. 21. 18:25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또 면상을 갈겨 주겠다고 한 번 마음먹으면 다른 해명을 찾으려 하지 않는 탓에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재발을 방지하는 능력도 줄어든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지극히 단순한 해법에 갇히면 좀 더 복잡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고, 우리 힘을 적절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295쪽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이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315쪽

...... 이 글귀들은 모두 한 권의 책에서 나온 말들이다. 올해 3월에 김영사에서 출간된 올라 로슬링의 ​<팩트풀니스(Factfulness)>가 그 책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고 언론에서 말하는 만큼 극적이지 않으며 세상의 부조리를 바꾸는 것은 평범한 대중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올곧게 행동하고 성실하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삶들의 결집이라는 저자의 메시지는 요즘같은 시기에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덕목인 것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9. 6. 7. 22:05

​90년생이 온다 / 임홍택 / 웨일북스 / 2019

​서기 105년에 발명된 종이는 지금까지 2000년 가까이 인류와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일부 지식층과 권력층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책을 일반인들에게 감추려 노력해 왔다. 쓰고 읽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독점되는 시대에는 진실이 숨겨지고 거짓된 이야기와 근거 없는 신화가 판을 쳤다. (...)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류는 점차 책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대중화된
​깊이 읽기의 관행은 점차 사라지고, ​소수의 엘리트만의 영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사적인 표준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 그룹은 2005년 <Annual Review of Sociology>에서 우리의 독서 습관에 있어 최근의 ​​변화들은 ​‘대중적인 독서의 시대’가 우리 지적 역사에 있어 짧은 ‘예외’였음을 암시한다고 썼다.​ 대중적인 ​독서는 예전의 사회적 기반, 즉 독서 계층이라 부를 수 있는 소수의 것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가 2017년 국회에서 발표한 <독서와 시민의 품격>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람의 뇌는 본래 독서에 적합하게 진화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독서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92-96쪽)

종이책 한 권을 통독하는 것보다 모바일 화면으로 짧은 웹문서나 SNS 포스팅, 동영상을 검색해서 빠르게 보는 것이 익숙하다는 90년대생들. 일단 위에 언급한 책에서는 이러한 취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어제 맞던 정보가 오늘은 틀린 사실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진 현대 세계에서 한 권의 종이책을 진득하게 완독한다는 게 어쩌면 참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빠르게 최신 정보를 찾아내고 곳곳에 퍼진 조각난 정보들을 모아 재구성하는 게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능력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의 주제에 관한 정보를 유기적으로 정리하고 그 체계와 논리를 완성도 있게 구성한 책을 집중해서 완독하는 경험 또한 충분히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긴 글을 집중해서 읽고 쓰며 논리의 유기성을 살피고 따져보는 경험이 충분치 않다면 짧게 조각난 정보 한두 가지만 보고 쉽게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실수가 증가할 가능성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불어 대다수의 대중들의 ‘깊이 읽는 능력’이 저하되는 가운데 소수의 엘리트들에 한해 이런 능력이 이어지며 이게 또다른 지식 권력으로 사용되는 상황으로 흘러간다면 그것 역시 미래 사회에 또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되지 않을까.

​‘문서에 대한 유연하고 빠른 이동에는 익숙해졌지만 문서에 대한 집중력은 약해졌다. 특히 검색엔진은 종종 우리가 찾는 내용과 연관이 있는 문서의 일부분이나 키워드를 보여주며 우리의 관심을 끌지만, 저작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만한 근거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웹에서 검색을 하면 숲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나무조차도 보지 못한다. 잔가지와 나뭇잎만 볼 뿐이다.’ (89쪽)


by 해피의서재 2019. 3. 24. 20:34

역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요즘 ​<우주를 계산하다>(이언 스튜어트/ 흐름출판/ 2019)라는 두꺼운 천체물리학 책을 읽고 있다. 이언 스튜어트의 간결하고도 매끄러운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이전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온갖 수학/물리학 용어와 맞닥뜨리니 좀체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책머리에 실려 있던 <수학이 필요한 순간>의 김민형 저자가 한 말처럼 어디 이과학 관련 독서모임이라도 찾아 들어가서 매주 한 챕터씩 함께 읽고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의 강독회라도 제안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언뜻 <수학용어사전>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런 사전이라도 하나 옆에 끼고 읽어야 할지.

하지만 확실히 보람은 있다. 예전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지적 세계에 과감히 한 걸음 내밀었다는 근거없는 뿌듯함과 더불어, 두껍고 어려운 책이라도 계속 집중해서 읽어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읽어야 할 부분이 읽어온 부분보다 줄어 있다는 데서 오는 모종의 성취감,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이 과학 분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지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허망한 시간 낭비가 아니다.

모든 과학은 수학을 기반으로 발전한다는 말을 이 <우주를 계산한다>를 읽으며 실감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찰과 사색과 연구를 거쳐 발견하고 고안해 낸 수학 수식과 법칙들을 활용해 각종 천체들의 궤도를 알아내고 이전엔 알지 못했던 우주의 온갖 물질, 성분, 발달과정까지도 밝혀내는 과정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미신이나 환상이 아닌 검증된 사실과 수학 이론을 정밀하게 살피고 활용해 이렇게 물질과 우주의 원리를 찾아내고 또 그걸 가지고 까마득한 우주 공간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과연 이 책의 에필로그에도 내 생각과 상통하는 문장이 있었다.

“수학은 천문학을 비롯해 핵물리학, 천체물리학, 양자론, 상대성 이론, 끈 이론 같은 관련 분야들과 함께 나란히 발전해 왔다. 과학은 질문을 던지고, 수학은 그 답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하며, 수학적 발견은 새로운 현상을 예측한다.” - 477쪽

“과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개선하고 있고, 새로운 발견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 이것은 진짜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이다. 세 걸음 전진했다가 두 걸음 후퇴하는 식이다. ... 과학은 항상 잠정적이고, 현재의 증거가 뒷받침하는 만큼만 옳다. 그런 증거에 대해 과학자들은 ‘마음을 바꿀’ 권리를 유보한다.” - 480쪽

by 해피의서재 2019. 3. 9. 13:55

​수학의 감각 / 박병하 / 행성B / 2018

이 책의 저자 박병하는 처음부터 수학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대학원에 다니던 중 수학의 매력에 이끌려 ‘수학의 세계로 이민’을 했다고 한다. 현재의 전공은 수리논리학인데, 사회과학과 수학을 모두 경험해 보았기에 이렇게 문과와 이과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2009년에 출간된 <수학 읽는 CEO>의 개정판 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인문학적 메시지가 다분한 글 위주로 다시 모아 엮은 책이라고 저자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다. 무한과 0의 개념, 숫자의 표기, 계산의 발달 과정, 유클리드 기하학 및 절대기하학, 함수, 좌표, 그래프, 오일러 산책, 리만 가설, 페르마의 정리 등 수학 분야의 대표적인 개념들이 인생과 직결된 철학적인 교훈들과 자연스럽게 엮여 제시된다.

최대한 쉽게 풀어 쓴 책임에도 역시 위에 나온 여러 수학 개념에 완전히 문외한인 사람이 읽기엔 다소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나 생각 다이어트, 관계성의 인식 등 작금의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지적-정신적 덕목을 일깨우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책이다.

​<책 속 주요 문장>

수 없이 셈 없고, 셈 없이 수 없다.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다. 상호 관계 속에 있다. ... 내가 있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고, 너는 내가 있기 때문에 있다. 좋건 싫건 그 관계망 속에 내가 있다. 나는 관계 자체이며 관계의 ‘사이’에 있기도 하다. 점과 직선, 수와 셈은 악기와 손의 관계처럼 따로 있어서는 소리를 못 낸다. -41~42쪽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묻고 그렇게 했을 때 가장 좋다면 고정관념을 과감히 버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순응하는 것이다. ...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 아름답다. 내 안에서 지금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채우라. 바로 지금 형식적으로 결핍된 곳을 채우는 것은 선호와 익숙함에 우선한다. -62쪽

유클리드 시스템은 좁고 평평한 공간에 더 맞고, 로바쳅스키 시스템은 광활하고 휘어 있는 공간에 더 맞다. 모든 공간을 설명할 절대적인 기하학이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따라 기하학들이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88쪽

아무리 해도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시스템 자체의 결함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껴안아야 한다. 시스템을 새로 정립하는 방법은 개인이나 기업처럼 단위의 크기, 그리고 문제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93쪽

수학은 0과 무한의 학문이다. 궁극의 없음인 0과 있음의 궁극적 확장인 무한 위에 서 있다. 수학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수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때문이다. -171쪽

계산은 필요 이상의 노력을 덜어 내도록 도와 준다. 그리고 남은 힘을 필요한 곳에 집중하게 한다. ... 계산은 가장 비창조적인 행위로 취급된다. 스위스 시계처럼 그 맞물림은 엄정하고 차갑다. 맞물림에 이상이 생겨 어딘가에서 삐긋하면 결과는 무용지물이 된다. ... 그러나 세상의 모든 계산은 한때 치열한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계산이 스스로를 혁신해 가는 과정을 보면 한 편의 대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230~231쪽

계산이 제자리를 잡고 계산이 제 기능을 할 때 상상의 공간은 넓어지고 창조의 향기는 오래 퍼질 것이다. -239쪽

실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삶의 본원적인 것이기도 하다. 실수 없이 사는 건 실은 사는 게 아닌 것이다. 실수 없이는 삶의 진화도 없기 때문이다. 실수는 삶의 주춧돌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실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데 있다. 실수는 배우고 발전할 좋은 기회다. 실수는 발전의 디딤돌이다. 맹수 같은 기상으로 배우라. 틀려도 좋다. 아니, 잘 틀리면 더 좋다. -259쪽

직관은 ‘당연하다, 그냥 받아들이라’고 속삭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직관이 시키는 대로, 그래 당연해, 하다 보면 현실은 고착된다. 딱딱한 땅에 상상력은 뿌리내릴 수 없다. 동양 수학이 고대와 중세의 높은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변방의 변방으로 퇴보한 원인도 여기에 있다. 의심을 허락하지 않고 실용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만 수학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열쇠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정말?’과 ‘왜?’에 붙어 있는 물음표, 그것이 창조의 광맥을 찾는 열쇠다. -277~278쪽

by 해피의서재 2019. 2. 11. 20:00

https://news.v.daum.net/v/20181229040201307

올해 출간 예정인 책들 중 각 출판사에서 가장 자신있게 내세우는 책들의 목록이 위 기사를 통해 공개됐다.


올해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어서인지, 역사 또는 근대 문화 관련 책들이 여럿 눈에 띈다. 현재 사회 현상을 진단하는 성격의 책도 몇 권 보인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가 당대에 가장 많이 읽힌 책들의 목록이라는데 저 목록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책들이 독자 다수의 선택을 받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by 해피의서재 2019. 1. 17. 09:42

​천문학 콘서트 / 이광식 / 더숲 / 2018(개정증보판)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빛의 속도로 무한 팽창을 계속해 가고 있다. 수많은 별들이 탄생과 죽음의 윤회를 거듭하고, 수천억 은하들이 광막한 우주공간을 비산한다. 그 무수한 은하들 중 한 조약돌인 우리은하 속에서 태양계는 초속 220km로 그 변두리를 순행하며, 지구라는 행성은 또다시 초속 30km로 태양 주위를 순행하고 있다. 원자 알갱이 하나도 제자리에 머무는 놈 없는, 그야말로 일체무상의 대우주다.”(394쪽)

지구의 모양과 크기를 재고, 지구로부터 태양-달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며, 항해와 역법 계산을 위해 별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 천문학은 점차 수학과 물리학, 관측술의 발달에 힘입어 점차 태양계와 그 너머의 천체, 그리고 우주 전체의 구조와 성질 그리고 기원에 대한 규명을 시도하는 학문으로 나아갔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을 거쳐 아인슈타인과 허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이 일생을 바쳐 이뤄나간 천문학 이론의 발달 연대기가 책 속에서 그들의 인생 이야기와 함께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제 현대에 이르러 우주는 태초의 대폭발과 계속되는 팽창 속에서 수소와 헬륨 등 화학 원소들의 결합과 핵융합으로 생성되고 타오르며 거대한 허공 속을 날아가는 별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윤회로 가득한 공간으로 기술되고 있다.

내용의 이해를 돕는 여러 컬러 사진과 과학 전문 저술가의 유려한 필체로 완성도를 더욱 높인 이 아름다운 천문학 대중서는, 영겁의 시간 너머 쓸쓸하고도 장엄한 마지막을 향해 도도히 날아가는 광막한 우주와, 그 우주의 은총으로 태어나 찰나를 살아가는 하찮고도 아름다운 지구와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해 준다.

​“​적색거성이나 초신성이 최후를 장식하면서 우주공간으로 뿜어낸 별의 잔해들은 성간물질이 되어 떠돌다가 다시 같은 경로를 밟아 별로 환생하기를 거듭한다. 말하자면 별의 윤회다. 은하 탄생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없이 많은 초신성 폭발의 찌꺼기들이 태양과 행성 그리고 우리 지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 곧, 피 속의 철, 이빨 속의 칼슘, DNA의 질소, 갑상선의 요오드 등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는 모두 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실화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어버이 별에게서 몸을 받아 태어난 별의 자녀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메이드 인 스타(Made in star)인 셈이다. 이처럼 우주가 태어난 이래 오랜 여정을 거쳐 당신은, 우리 인류는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주의 오랜 시간과 사랑이 우리를 키워온 셈이다. 물질에서 태어난 인간이 자의식을 가지고 대폭발의 순간까지 거슬러올라가 자신의 기원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것은 진정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새들이 우짖는다. 별들이 빛나는 전 생애를 걸쳐 원소를 만들고, 그것들을 자신의 죽음과 함께 우주로 아낌없이 뿌리지 않았다면 나도, 저 새도 없었을 것이다.” (270~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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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의서재 2019. 1. 7. 16:57

헤밍웨이 : 20세기 최초의 코즈모폴리턴 작가 / 백민석 / 북21아르테 / 2018

‘하드보일드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의 인생과 문학 세계를 돌아본 문학여행 에세이.

그가 여행하고 머물렀던 명소들을 찍은 컬러 사진과 매끄럽게 잘 읽히는 문장이 원활한 독서를 돕는다.

평생에 걸쳐 영광과 고통이 끊임없이 교차했던,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 강렬한 마초 문학가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의 의미를 저자의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분석한 책이다.

일찍이 자살한 아버지를 미워했고, 엄격하고 냉정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자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여겨 역시나 증오했으며, 평생 ‘남자답고 대단한 자신’을 과시하려 과격한 언사를 일삼은 탓에 주위와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만년에는 알콜 중독과 우울증을 끼고 살며 정신병원을 드나들다 끝내 아버지와 같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내.

‘어쩌면 그는 끊임없이 죽음을 갈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은, 평생 전쟁터나 사냥터 등 죽음이 언제든 덮쳐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들만 골라서 찾아다녔던 헤밍웨이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참 유효한 말인 것 같다.

헤밍웨이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 문학도 어쩌면 이런 그의 삶과 내면 풍경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의 단어와 문장으로, 별다른 부연설명도 없이, 거창한 듯 허망한 세상사와 그 속에서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별다른 이해를 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뱉어내는 글들.

문학사에 길이 남을 획을 그었으나 인격적인 면에서는 도저히 가까이 하기 힘든 면을 가졌던 마초 글쟁이. 종국에는 몸도 마음도 황폐해진 채로 쓸쓸하게 생을 마쳤으나 그의 문학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 영원히 남았다.

저자는 이 사내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3년간 헤밍웨이를 쫓아다니고 읽고 쓰면서,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게 되었다”​​(17쪽)라고.

by 해피의서재 2019. 1. 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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