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인문학 / 홍익희 / 가나 / 2020

올해 하반기 들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것이 바로 금융 담론인 것 같다. 서점이고 웹방송이고 SNS고 온통 돈, 금융, 재테크에 관한 이야기가 넘친다. 길어지는 수명,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른 기술적 실업의 도래 가능성, 코로나19 이후 각종 상업 시장의 위축과 붕괴. 더 이상 노동소득만으로는 삶을 감당하기 불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이 사람들을 금융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듯하다. 이른바 ‘동학개미운동’으로 대표되는 개인 투자자의 증가가 그 반증이 아닐까. 실제로 수익을 얻은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하고.

하지만 투자도 돈의 흐름을 알고서야 성공할 수 있는 법.
주식, 채권, 환율, 금리.
금융 시스템의 주요 개념이자 구성 요소들인 이들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적재적소에 투자를 하고 수익을 올리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금융 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작동하여 경제의 흐름을 만들어 가는지는 근세 유럽(네덜란드와 영국) 이래 이어져 온 경제사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파고들다 보면 이 모든 것이 당대 정치사회적 지형, 특히 국제 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주요 금융기업/기관들의 태동과 행보, 국가 간의 알력과 함께 전개된 환율전쟁, 그에 따라 변화한 각국의 흥망성쇠와 세계 경제 지형의 현주소를 이어 미래의 금융 환경에 대한 예상으로 이어진다.

동어반복이 자주 보이는 감이 없진 않지만, 그만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돈이 돈을 불리는 자본소득이 실물 생산과 유통에 기반을 둔 노동소득보다 3배 이상 부풀어 가는 현재 상황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는 고뇌와 문제의식이 책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아울러 소수의 ‘있는 사람들’에게로, 소위 선진국에게로만 부의 쏠림이 지속되는 현상이 장차 자본주의의 영속성에도 치명적일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단순한 재테크 공부를 넘어 돈과 금융 그리고 그에 의한 사회 변화 양상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고 싶은 이들, 혹은 새로운 시선(통화정책)으로 국제사의 흐름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책 속 주요 문장>
유엔이 예측하는 향후 최장수국가가 우리나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최장수 예측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것은 우리나라 노인의 삶의 질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로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노인 인구 절반이 인간의 마지막 인격조차 보호하기 힘든 극빈층에 속해 있다.
우리나라는 과거 여성인력을 산업화하여 경제부흥을 이루었듯이 앞으로는 노인 인구를 산업화하여야 이 절박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이렇게 구조적 장기불황이 저출산, 고령화와 겹치면서 우리나라는 이제까지 인류가 겪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어려움과 혼란에 직면할 것이다.
당장 많은 학교와 학원들이 사라질 것이고, 종국에는 인구절벽이 부동산시장을 붕괴시킬 것이다.
노동 가능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생산이 줄어들고 세수 또한 감소하여 국가의 재정지출조차 어려워지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또한 청장년층이 줄어들면서 나라의 활력이 떨어지고 내수시장의 수축 또한 불가피하다.
이렇게 국력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전반적 분야에서 엄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 12쪽

일본은 엄청난 무역수지 흑자, 엔화의 평가절상, 금리 인하로 대규모 유동성이 발생했다.
이 돈들이 주식과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 거품을 키웠다.
게다가 엔화 강세가 장기추세로 접어들 모양새를 보이자 대량의 핫머니가 일본으로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일본은 자만에 빠졌다.
- 71~72쪽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환율 조정으로도 미국의 무역적자는 회복되지 않았다.
미국은 작전을 바꾸었다. 제조업 수출이 아닌 달러 수출 곧 '금융'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미국은 다시 한 번 선진 7개국과 모임을 갖는다. 이른바 1995년의 '역플라자 합의'다.
그리고 플라자 합의와는 정반대로 달러 강세를 만드는 데 합의했다.
플라자 합의 때는 약 달러를 통한 무역적자 축소를 목표로 했지만, 역플라자 합의에서는 강달러를 통한 기축통화 지배력 증대를 목표로 했다.
'강한 달러화 → 미국으로 자본 유입 → 주가 상승, 금리 하락 → 소비 증가, 투자 증가 → 수입 증대 → 경상수지 적자 확대 → 전 세계 동반성장'
이라는 금융 중심의 글로벌 성장 패러다임을 미국이 선진국들의 협조를 얻어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 86쪽

일본은 경제가 활황을 맞자 자이테크라는 돈놀이에 빠졌으며 여기에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심하게 환율 공격을 당해 빈사 상태에 놓였다.
게다가 내수경기를 부양한답시고 부동산담보 대출비율을 120%까지 높이며 부동산 경기를 부추겼다.
이렇게 내부적으로는 '자이테크'라 불린 돈놀이와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환율공격 그리고 바젤 회의와 파생상품의 공습이 오늘날 일본 경제를 망가뜨린 주범이다.
- 88쪽

'워싱턴 컨센서스'는 1990년 전후로 등장한 미국의 경제체제 확산전략이다.
한마디로 외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 빗장을 강제로라도 열어 미국 자본의 활동무대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외환위기 같은 위기발생을 제3국의 구조조정 기회로 삼아 미국식 시장경제체제인 신자유주의를 심겠다는 미 행정부와 IMF, 세계은행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거시경제안정화, 경제자유화, 사유화, 민영화'가 그 뼈대이다.
개발도상국들의 시행해야 할 구조조정 내용은 '정부예산 삭감,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인하,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기업 합병-매수 허용, 정부규제 축소, 재산권 보호' 등이다.
그런데 이런 권고를 수용하지 않을 때는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이를 방치함으로써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관철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3세계의 외환위기를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아 신자유주의를 확산시킨다는 전략이다.
조지 소로스조차 이를 '시장근본주의'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그때부터 유럽과 동남아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각개격파에 들어갔다.
월스트리트는 미국의 해외시장 개척의 선발대가 되었으며 특히 헤지펀드가 그 선봉장 노릇을 했다.
소로스 등 헤지펀드가 중남미를 시발로 1992~1993년 유럽통화 위기 때 핫머니로 유럽 중앙은행들을 유린하고,
1997년 7월 아시아 외환위기 때 먼저 태국을 초토화시켰다.
- 96쪽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유대인의 압박에 못 이겨 FRB(연방준비위원회제도) 법에 서명한 후 이렇게 토로했다 한다.
"위대하고 근면한 미국은 금융시스템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금융시스템은 사적 목적에 집중돼 있다.
결국 이 나라의 시장과 국민의 경제활동은 우리의 경제적 자유를 억압하고 감시하고 파괴하는 소수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는 문명세계에서 가장 조종당하고 지배당하는 잘못된 정부를 갖게 되었다.
자유의사도 없고, 다수결의 원칙도 없다.
소수 지배자의 의견과 강요에 의한 정부만이 있을 뿐이다."
- 139쪽

미국 정부는 국채를 발행했으면 당연히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미국 연간 예산 중 이자 지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13% 정도 된다.
... 미국 정부는 연준이 보유하는 국채에도 이자를 지급할까? 정답은 '지급한다'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연준은 미국정부가 지급하는 이자를 받아 주주들 곧 연준 설립시 자본금을 댄 민간은행들에게 6%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연준이 쓸 경비를 뺀 다음 나머지는 다시 미국 정부에 돌려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미국 정부가 재정 적자 곧 국채 발행을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 145쪽

케인즈는 당시 영국 경제가 '빈둥빈둥 놀면서 재테크를 일삼는 자산가계급'인 '지대추구 자산가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즉 인도와 이집트 등 영국 식민지 민족들을 영국계 상업회사와 금융사들이 약탈하면서 생산적 기여를 하지 않는 자산가계급이 경제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지대추구 자산가들이 바로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을 일으킨 금융 자본주의의 주역이라고 지적하며,
이들을 엄격히 규제해 자본주의를 다시 생산적 자본, 곧 산업자본으로 환골탈태시키지 않는 한 자본주의 경제에 희망이 없다고 봤다.
- 147쪽

1차 대전 직후인 1918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물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치인들이 이기적인 자국 정치 논리를 앞세워 경제를 무시하는 무지한 행태에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그는 독일에 물린 혹독한 배상금으로 전무후무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며, 이는 독일 국민들을 빈곤으로 내몰아 '극단적인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히틀러 시대와 새로운 전쟁을 예감했다.
... 케인즈의 예견은 그의 표현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결국 독일에 대한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화폐 발행량 증가 → 초인플레이션 → 히틀러 등장'으로 연결되어 2차 대전을 불러왔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인플레이션이었다. 2차 대전이라는 참화는 케인즈의 선견지명이 거부된 결과였다.
- 148~149쪽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정부의 화폐 발행량 증가와 은행들의 과도한 신용창출의 결과물이었다. 독일 정부는 과도한 전쟁배상금 지급과 경기 진작을 위해 수출을 늘려야 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마르크화 평가절하로 수출 상품 가격겨쟁력을 높이는 게 유리해 결국 화폐 발행량 증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 초인플레이션의 진정한 막후 조종자는 사실 거대한 신용창출을 일으킨 금융자본세력들과 그들에 의해 움직여진 민간 중앙은행이었다.
... 이러한 행태에 분노한 독일 국민들은 파렴치한 투기꾼들과 이를 조장한 유대인 금융가들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품게 되었다.
... 시민들은 두 눈 멀쩡히 뜨고 화폐 발행량을 터무니없이 늘린 정부와 금융세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탈당한 것이다.
특히 부동산 없이 현금만 보유했던 빈곤계층 서민들이 발가벗겨졌다. 부자들은 부동산, 토지, 주식, 귀금속 등으로 자신의 재산을 포트폴리오 해 놓아 어느 정도 피해 갈 수 있었지만 저소득층은 아니었다. 금융투기세력이 화폐가치 폭락 과정에서 벌어들인 거대한 이익은 바로 국민들이 몇십 년 동안 힘들게 저축해 얻은 부였다.
케인즈의 예견대로, 이 틈을 파고들어 대중을 선동해 집권한 사람이 히틀러다.
... 그는 무려 88.1%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어 홀로코스트와 2차 대전이라는 세계 최대의 비극이 일어난다.
정치를 앞세우고 경제와 금융을 무시한 결과였다.
- 150~151쪽

케인즈가 세계화폐를 주장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통상 분쟁과 환율 문제로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케인즈의 생각은 세계화폐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특정국가의 위기가 다른 국가로 전이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달러가 기축통화일 경우 미국 내에서 유동성 위기가 일어나면, 경제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전이되지만
세계화폐를 활용할 경우, 경제위기의 전이는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게 케인즈의 생각이었다.
- 155~156쪽

미국의 천재 외교관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놀라운 외교성과를 연속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는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하고, 죽의 장막 중국의 문을 열고,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1975년에는 OPEC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파이살 왕과 비밀협상에 성공했다.
곧 미국이 사우디 왕권을 보호해 주는 대신 세계 최대 유통 상품인 석유의 거래를 달러로만 하도록 하는 묘수를 찾아낸 것이다.
그 뒤 석유의 달러 거래로 달러에 대한 수요가 커진 덕분에 달러가 계속 기축통화 노릇을 할 수 있었다.
- 163~164쪽

근대 이후 여태까지의 주요 공황들은 모두 통화 교란으로 발생했다.
그 출발은 유동성 공급과잉이었다.
유동성이 버블을 키우고 그 버블이 터짐으로써 경제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주식 등 자산 가격의 증가는 기업의 내재가치 증가에 비례해 커지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 시중의 유동성 확대로 주가가 내재 가치에 비해 턱없이 높아지면 그것이 바로 버블이요, 버블이 터지는 게 공황이다.
위기를 유동성으로 막는 것은 부실을 파헤쳐 시장에서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유동성으로 부실을 덮어주어 부실을 키우는 것과 같다.
각국의 유동성 확대 곧 환율전쟁이 세계 경제의 암적인 존재이자 위험한 이유이다.
- 181쪽

1920년대 후반 들어 늘어나는 생산과는 반대로 사회 전체적으로 소비가 줄어들었다. 심각한 소득불평등이 원인이었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시대가 전개되었다.
개인 소비에는 한계가 있기에 극소수 부호들에게 부가 집중되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소비가 급감한다.
생산성이 높아져 상품은 넘쳐나는데 소비가 급감할 때 발생하는 게 바로 공황이다.
호황을 누리던 경제는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비가 급감하고 금리인상으로 유동성이 급격히 축소되자 불경기에 접어들어 주가가 내려앉으면서 신용경색이 왔다.
소비가 줄어들고 돈이 돌지 않자 1929년 8월을 정점으로 산업생산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1929년 9월 3일, 이날 다우존스 지수는 이 해의 최고점 381.17을 기록했다. 그리고 1929년 10월 24일, 기어이 거품이 터지고 말았다.
증시가 붕괴되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미국 증권시장에서 철도와 산업주가들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1주일만에 지수가 무려 37%나 급감했다.
- 200쪽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취임하자마자 통화개혁과 금융개혁을 단행했다.
대통령은 1933년 3월 4일 취임연설에서 경제위기가 자본주의적 이윤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금융업자들 때문에 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자리 회복을 위한 일들이 성공하려면 구질서의 병폐가 되풀이되지 못하도록 하는 두 가지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모든 금융과 신용거래, 투자활동을 엄격하게 감독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돈을 이용하는 투기가 근절되어야 합니다.
적정량의 통화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싸워야 할 전선입니다."
- 205쪽

부실 규모를 파악한 루즈벨트 행정부는 은행으로부터 악성부채 30억 달러 규모의 부실 모기지를 구입했다. 최초의 공적 자금 투입이었다. 그는 맥을 잡아 집중과 선택을 택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훗날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주택소유자들의 주택 차압을 막기 위해 주택자금 대출회사를 설립했다. 부실을 재빨리 도려내고 부실이 예상되는 곳에 화력을 집중한 것이다.
이런 과단성 있는 정책들의 결과로 신용위기는 1933년 3월말에 일단 마무리됐다.
2008년 신용위기와 대조되는 국면이다.
- 206~207쪽

1980년대 시작된 신자유주의와 부자감세 정책이 금융시장의 급팽창과 어우러져 '소득불평등과 부의 편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융자본주의 경제를 만들었다.
원래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를 위해 교환의 매개체로 등장한 게 돈인데 돈 스스로가 자가증식을 한다.
심지어 그 성장속도는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 즉 세계 GDP 성장속도보다 몇 배 이상 빠르다.
불로소득(금융자산) 증가속도가 땀 흘려 일해 버는 근로소득 증가속도보다 훨씬 빠르며, 이것은 현대금융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다.
- 211쪽

지난 400여 년간의 역사를 분석해 보면 경기침체는 매 4.75년마다 한 번씩 오고, 대공황은 67년마다 한 번씩 온다고 한다.
자유시장경제의 자유는 풍요를 안겨 주기도 하지만 위기의 원인이기도 한다.
지나친 경제적 자유는 탐욕을 낳고, 탐욕은 버블을 낳고, 버블에는 대가가 따른다.
점점 빨라지는 호황과 불황의 경기순환은 혼돈을 조장하고 소득불평등과 부의 편중은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위기와 기회의 반복 사이클, 곧 금융자본주의의 팽창과 수축 과정에서 생기는 버블과 공황은 불행히도 계속되어 왔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222쪽

"이번 신용 위기의 교훈은 시장엔 자율조정기능이 없다는 것이다. 적절한 규제를 하지 않으면 늘 선을 넘어서기 일쑤다.
2009년만 해도 우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왜 종종 보이지 않는 건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 손이 거기에 없고 금융세력의 탐욕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금융가들의 사리사욕 추구는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금융기관 주주들에게조차 도움이 안 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냈던 컬럼비아대 교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말이다.
- 238쪽

우리는 모든 권력의 최정점에 정치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상에 대통령이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현대 세계에서, 아니 최소한 현대의 미국에서는 정치권력을 움직이는 큰손들이 있다.
돈줄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정치권을 움직이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 전개 과정에서 자본의 탐욕으로 태어난 파생상품의 남발과 범람을 제어하지 못한 잘못도 크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금융위기가 터진 후 월스트리트 금융계의 대처 방식이었다.
미국 정부는 2008년 늦가을 신용위기가 발새하자 부실을 따로 모아 '배드뱅크'를 만들어 여기에 공적자금을 집중 투입해 부실을 처리하려 했다.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썼던 특효 처방이다.
그러한 목적으로 의회를 설득해 긴급자금도 마련했다. 그렇게 했으면 조기에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의 큰손들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월스트리트는 정부의 위기 수습을 위한 은행 주식담보 대출 지원, 보유 채권의 시가 평가제 등 제2, 제3의 현실적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금융위기가 조기에 수습되지 못하고 전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양적완화 정책까지 시행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부실에 집중적으로 공적자금을 투입해 처리하지 못하고 돈을 헬리콥터에서 무차별 살포하듯 전방위로 뿌려 불을 끄려 했다.
- 238~240쪽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선진국은 천문학적인 규모로 통화량을 증가시켜 왔다. 또한 각국 금리도 사상 최저수준이었다.
그렇게 많은 돈이 풀렸음에도 물가가 안정되어 있었고, 일본과 유럽은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걱정했다.
양적 완화, 곧 금융권을 통한 돈 풀기는 담보력이 있는 상위계층에게 흘러들어가 자산 가격을 올린 반면 가계부채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는 흘러가지 않아 소비자 물가는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지금은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한 돈이 중앙은행 금고나 은행에서 자고 있다. 하지만 경기가 본격적으로 좋아지면 문제는 달라진다.
잠자고 있는 돈들이 투자처를 찾아 쏟아져 나오면서 통화량의 유통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면 시중 유동성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여기에 놀라 중앙은행이 급격한 계단식 금리인상을 서두르면 탈이 날 수 있다.
그때는 기업부채 등의 부도사태가 터지면서 시장이 망가지거나 아니면 인플레이션의 쓰나미가 밀려올 가능성이 있다.
- 241~242쪽

미국의 금융, 외환시장 공격은 삼각편대 공습으로 유명하다. 미국 정부가 깃발을 들면 앞장서는 행동대 역할은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들이다.
그리고 미국 연방준비이사회는 통화정책으로 그 뒷배를 봐준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공격 패턴이 그랬다.
미중 무역전쟁의 궁극적 목표는 궁극적으로 중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의 개방이다.
미국은 제조업 수출로 돈을 버는 나라가 아니다. 환율이 제조업 수출 증가에 미치는 역할은 미미하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중국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의 완벽한 개방이다.
미국은 해외에 투자한 금융자본으로 돈을 버는 나라다. 곧 '금융국가'인 것이다.
그들의 주특기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대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 개방이 선결 조건이다.
- 261쪽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었다. 경제를 시장의 효율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 이후 소득불평등이 급증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인들은 그것을 개인의 능력 탓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돈이 돈을 불리는 '금융자본주의'의 속성이었다.
곧 땀흘려 일해야 버는 근로소득(세계총생산) 대비 돈이 돈을 불려주는 불로소득(금융자산소득)이 서너 배 더 빨리 성장한 것이다.
세계총생산액(GDP) 대비 세계 금융자산의 비중 곧 자본집적도가 1980년에 109%였던 것이 1990년에 263%로 늘어났다.
실물경제에 비해 금융자산의 증가속도가 날이 갈수록 더 가팔라진 것이다.
- 276쪽

일본과 독일이 상품 수출로 부의 획득을 도모했다면 미국은 세계 각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에 자본(달러)을 투자하여 그 금융수익으로 부를 긁어모았다.
... 세계에 금융자본이 넘치다 보니 자본집적도는 2000년 310%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상품과 서비스의 증가량에 비해 유동성이 급격히 증가하다 보니 시중금리는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세계 금리는 자본조달 창구인 미국의 시중금리와 직접 연계되어 함께 낮아졌다.
- 277쪽

금융자산이 이렇게 많이 늘어난 것은 화폐의 본원적 기능인 거래적 동기에 의한 화폐 수요 증가보다는 투기적 수요가 많이 증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신자유주의 이후 등장한 주주이익을 극대화하는 주주자본주의는 부의 분배가 노동자에게서 주주 등 금융자본가에게로 쏠리게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득불평등 심화가 단순한 최상위 집단으로의 소득집중뿐 아니라 중산층의 몰락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 문제는 이로 인해 사회의 소비수요가 팍 줄어든다는 것이다. 중산층과 서민들은 사실 버는대로 소비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러나 소득과 부가 상위 극소수계층으로 몰리면 그들은 소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소비가 크게 줄어드는 것이다.
- 278~279쪽

역사를 살펴보면, 과도한 통화팽창은 제국을 절단 내기도 했다.
곧 강대국이 망하는 데 패턴이 있었다.
멸망의 근본원인은 대부분 재정 적자로 인한 과도한 부채 증가와 통화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통화붕괴였다. 이는 시장붕괴로 이어져 거대한 제국을 쓰러뜨렸다.
강대국이 쇠퇴의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었다.
- 280쪽

경제가 안정되려면 상품과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수요보다 공급이 약간 부족한 상태이다.
공급이 약간 부족하면 팔 사람보다 사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가격은 조금씩 오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약간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게 이상적인 경제상황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상품, 노동, 자본 등 모든 게 공급이 수요를 상회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물가는 내리고 디플레이션 위험이 상존해 있다.
공급과잉이나 디플레이션 경제하에서는 현금이 빛을 보게 된다. 공급과잉 상태에서 기업들은 투자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이 쌓이는 이유이다.
- 283~284쪽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자본집적도 비중의 증가 곧 금융자산의 팽창과 부자감세로 인해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도로 심화되고 있다.
있는 자들이 더 많은 부를 움켜쥐어 중산층이 붕괴되고, 빈곤층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추세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면 과연 사회가 버텨낼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상위 1%의 독식 체제로는 자본주의가 버텨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국민의 90%가 하류화 물결 속에 익사당하는 사회는 더더욱 자본주의가 버텨낼 수 없다.
선거가 금권에 휘둘리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영속 가능하지 못하다.
불로소득 증가속도가 근로소득 증가속도보다 몇 배나 빠른 사회는 영속 가능하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지금과 같은 금융자본주의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 289쪽

양적완화로 인한 유동성 장세는 결과적으로 투기자본을 키워준다. 그들은 거의 제로금리로 돈을 융통하여 헤지펀드를 활용하거나 부동산 투자 등으로 재산을 증식시킨다.
유동성 장세는 실물경제와 상관없이 돈의 힘으로 주식과 부동산 가격을 상승시키기 때문에 그들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금융장세는 있는 자들의 재산을 더 증식시켜 주고, 있는 자들의 금융자산 증식이 일반인들의 근로소득을 훨씬 앞서게 된다.
불행하게도 불로소득이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고 자본의 세습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켜 소득불평등의 골을 깊게 만든다.
이렇게 미국은 부실정리 대신 무제한 유동성 공급을 취했다. 월가의 모럴해저드를 연방정부의 돈으로 덮어 줬다.
결국 이러한 유동성 조치는 또다른 형태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극소수 금융계 부호들에게만 득이 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다시 말해 이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었다.
- 292쪽

결론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부실은 파헤쳐지지 않고 유동성의 힘으로 봉합되었다.
파생상품 남발로 금융위기를 일으킨 월가는 혹독한 자기반성도 없었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게다가 부실도 처리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건전성 확보를 위해 특단의 개혁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 293쪽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등 자산가격의 거품이 언제 어떻게 꺼질지 모른다.
또 무역전쟁이 환율전쟁으로 치달아 각국이 평가절하에 열을 올리게 되면 현재의 외환시장이 요동치면서 금융시장 역시 무사하기 힘들다.
- 294쪽

발터 샤이델의 책 <불평등의 역사>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를 해소한 사례를 보면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을 수반하는 전쟁, 혁명, 국가붕괴, 전염병 창궐 등이었다.
이번에도 코로나19가 금융자본주의의 판을 '포용 자본주의'로 바꾸고 있다.
소득 양극화를 해소할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이 포용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득권의 진입장벽을 허무는 기회의 불공정 해소, 독점적 자본과 권력을 결탁을 끊어내는 부조리 근절이 필요하다.
- 332쪽

현대통화이론은 돈을 푸는 방식이 다른데, 기존 양적완화는 통화정책 수단으로 시중 은행들의 자금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반해, 현대통화이론에서는 정부가 직접 돈을 적재적소에 쓴다.
정부가 서민복지와 공공사업에 돈을 쏟아붓고 노동자를 대거 고용한다는 것이다.
곧 중앙은행이 시중 은행의 마지막 대부자인 것처럼 정부는 일자리의 최종 공급자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340쪽

미국이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달러에 대한 도전이고 또다른 하나는 전략자산인 석유에 대한 도전이다.
기실 이라크의 후세인이 죽은 것도 달러와 석유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다. 그가 석유를 달러 대신 유로화로 팔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라크 남부 유전개발을 중국에 넘기겠다고 한 것이다.
- 354쪽

경기침체시 중앙은행의 무리한 금리인하와 양적완화는 경기의 단기적 회복을 위해 자산가격을 부풀리고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감수하는 꼴이다.
더 나아가 민간중앙은행을 갖고 있는 미국의 통화정책이 금융세력들의 이익에 따라 휘둘리고, 이들의 이득을 위해 유동성을 무책임하게 늘림으로써 세계 경제를 잠재적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이로 인해 각 나라마다 피곤한 환율전쟁을 치르고 있다.
- 395쪽

중국은 디지털화폐를 추진하면서 지하 자금 양성화와 지하경제 근절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대한민국의 원화도 디지털화폐가 사용되면 그 기회에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통용되는 구권을 디지털화폐 신권으로 교체할 때 1000 대 1로 교환을 단행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의 시행이 예측된다.
- 407쪽

칼 포퍼는 '영원히 올바른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기존관념을 거부했다. 그에게 진리란 이성에 의해 비판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모든 사상은 불확실하고 인간은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열린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다'로 요약된다.
포퍼에 따르면 열린사회와 반대편 대극 관계에 있는 것이 전체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다.
또 포퍼는 '모든 삶은 근본적으로 문제해결이다'라고 인간의 삶을 정의했다.
- 417쪽

칼 포퍼 교수는 '열린사회를 거부하는 전제적인 이데올로기는 궁극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논리적인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다'면서 '인류사회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만 진보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시장이 균형을 이룬다는 기존의 정설을 거부한 그(조지 소로스)의 투자 철학은 포퍼 교수의 이같은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 418쪽

그(조지 소로스)는 훗날 가격을
'수요와 공급이 주어졌다는 가정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이다. 시장 참여자들의 생각과 시장의 움직임은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적인, 곧 재귀적인 관계를 갖는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기대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설명한다.
- 419쪽

by 해피의서재 2020. 11. 23. 22:58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김성우, 엄기호 / 따비 / 2020

사회학자 엄기호(대표작: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등)와 언어학자 김성우(대표작: <단단한 영어 공부>, <어머니와 나> 등)가 우리 사회의 문화 리터러시에 대해 나눈 대화를 정리한 대담집.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세대/계층 간 언어-문화의 괴리와 소통 부재의 문제가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왜 사람들이 보고 읽는 것은 많아지면서도 맥락을 파악하고 깊이 있게 쓰는 능력은 떨어져 가는 건지, 그렇게 떨어진 사회 전체의 문화 리터러시가 사회 통합과 민주주의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이 문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담겨 있다.

다소 학술적인 성격의 책이라 가볍게 읽기엔 좀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좀 어렵더라도 여러 사람이 모여 일종의 독서회를 조직해 함께 공부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미디어, 교육, 사회학, 정책 입안 관련 종사자들이 이 책을 읽고 토론할 기회를 많이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말은 결혼을 성립시키고 관계를 단절하며 법안을 통과 시키고 사랑을 공표하며 전쟁을 시작한다. 혐오 발언은 비합리적 증오의 행위이며 고맙다는 말은 감사의 실천이다. ‘그저 말일 뿐인 말’ 따위는 없는 것이다.”(10쪽)

“개인이 음식을 섭취하여 몸을 만들어 가듯, 우리가 접하는 매체는 사고와 정서의 뼈대를 만든다. 그렇기에 이 시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세계를 인식하고 지식을 구성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 맺기의 양상을 구성하는 방식의 거대한 변화다. 읽고 쓰기의 풍경 또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문해력의 추락에 대한 우려가 커져 간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도도한 흐름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항해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하다.”(12쪽)

“자신의 삶과 유리된 글은 누구도 쉽게 읽을 수가 없거든요. 제게 법학자가 쓴 논문을 주고 읽으라고 하면 굉장히 힘들어 할 것이고 못 읽어내는 부분도 많을 거예요. 텍스트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난이도를 갖고 있고 훈련을 받으면 모두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삶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47쪽)

“리터러시를 아는 것 자체가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삶의 리터러시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삶의 리터러시, 즉 삶을 읽어내는 리터러시는 완전히 무시되는 거죠. 권력화된 방식의 리터러시에서는 반대로 권력자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문해력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리터러시는 백성을 계몽하고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권력을 공고히 하고 백성들을 배제하는 방식이 됩니다.”(50쪽)

“나는 리터러시란 응답할 줄 아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담에서 우리가 정리한 것처럼, 바벨탑 쌓기가 아니라 다리 놓기로서의 리터러시란 홀로 표현하고 선포하는 것을 넘어 응답할 줄 아는 역량이다. 응답과 응답이 끊이지 않고 순환함으로써 서로 배움을 부추기고 발생하게 하는 것, 이게 새로운 배움의 방법론이자 조사연구의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292쪽)

by 해피의서재 2020. 11. 9. 22:10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 김민정 / 작가 / 2020

국내에 드문 본격 드라마 리뷰 에세이 북. 비평보다는 리뷰라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리는 책이다. 다루는 작품은 한국 드라마가 다수이지만 외국 드라마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당초 생각만큼 분량이 많거나 내용이 깊지는 않아 아쉬운 감이 있지만 대중예술의 한 장르로서 드라마를 조망하고 작품의 행간을 적극적으로 읽어 나가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메시지에 대하여 들여다보고자 한 시도는 긍정적인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이 책에 실린 드라마 목록>

<워킹데드>
<동백꽃 필 무렵>
<지정생존자> (미국 오리지널 버전)
<굿 플레이스>
<드라마월드>
<밴더스내치>
<뷰티 인사이드>
<눈이 부시게>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별나도 괜찮아>
<열혈사제>
<휴먼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
<미스터 션샤인>
<사의 찬미>
<라이프>
<스케치>
<보좌관>
<모두의 거짓말>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by 해피의서재 2020. 10. 18. 09:09

코로나 사피엔스 / 정관용 외 / 인플루엔셜 / 2020

코로나19는 한순간에 우리 사는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던 여러 전문가들의 소견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기존의 사회 질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생태환경, 경제, 법 체계, 문화, 교육, 무엇 하나 예전과 같을 수 없다.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놓인 가운데 앞으로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형태로 사회 체제를 정비하고 디자인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격변의 시점을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6명의 석학이 있다. 생태, 경제, 과학, 정치사회, 철학, 심리학 이렇게 여섯 분야의 권위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대담이 이 한 권의 책에 모여 엮였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시대를 살아나가기 위해 앞으로 한국 사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저마다의 시점에서 역설한 이들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하 책 속 서문(8~10쪽) 일부 인용)

최재천- 공장식 축산과 인구 밀집, 무차별 개발 등 인류의 무분별한 자연 침범을 멈추고 자연과의 공존과 친환경 생활을 추구하는 생태백신과 행동백신이 필요하다.

장하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경제체제의 주객전도 현상을 바로잡고 시민권에 기반한 보편적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다.

최재붕-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비대면 경제/문화 체제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이상, 디지털화와 스마트 기기, AI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경제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홍기빈- 시장근본주의를 극복하고, 포용적이고 효율적인 민주주의를 구축하며,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방역과 욕망에 대한 질서 부여, 도시적 공간 집약화의 해소만이 인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길이다.

김누리- 위기 대응의 공공인프라를 초토화해 온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을 것이며, 강자의 약자 무한착취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야수 자본주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극복해 내야 한다.

김경일- 기존 사회가 강요하는 무한 욕망과 서로간의 파괴적인 경쟁으로 점철된 세상이 아닌, 각 개인의 뜻대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by 해피의서재 2020. 10. 13. 19:18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난 지 반 년이 훌쩍 넘었다.
국내 감염자는 누적 기준 1만 명을 넘어섰고, 이 백신도 치료제도 전무한 감염병에 전세계의 모든 일상이 결박당했다.
분주하던 공항은 적막 속에 잠겼고 활력이 넘치던 번화가와 극장가도 침묵에 갇혔다. 책을 읽으러 갈 곳도, 운동을 할 곳도, 산책을 하며 바람을 쐴 곳도, 커피를 마실 곳도, 심지어 일상의 대부분을 소화하던 장소인 학교와 직장 사무실마저 굳게 봉인되어 버렸다.
월 수입이 줄거나 완전히 끊기고 마침내 더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급한대로 긴급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임시 생활비를 대 주었다. 봄에 배부되었던 긴급지원금의 사용기한이 다 지나도록 감염병의 확산세는 여전히 줄지 않았다. 백신의 개발과 시판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코로나 시대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던 사회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은 이제 거의 정설로 굳어져 가는 분위기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전례 없는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운명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것은 즉 이제까지 존재했던 산업도 직종도 직업도 다 전혀 새로운 쪽으로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대표되는,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을 강제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는 로봇과 인공지능 등의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노동력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로의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이는 다름아닌 노동으로 삶의 기반을 지탱하는 직업인들이다. 어딘가에 소속된 직장인이건, 일감이 있을 때마다 그에 맞춰 살아가는 소위 프리랜서 노동자건, 유형 혹은 무형의 점포나 기업을 차리고 일하는 자영업자건 모든 ‘일하는 이들’의 앞날 또한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 앞으로의 노동 문제에 대해 논한 책들을 두 편 소개하고자 한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시국에서 앞날에 대한 막막함을 안고 끝없는 인고의 나날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들이 해답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1. 노동의 미래 / 이철수 외 / 현암사 / 2020
<책소개-교보문고>
“사회안전망과 기본소득부터, 미래노동에 대한 가치 정립, 고령화, 소득불평등, 노동소득분배 및 소득주도성장, 노사관계,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 등 총 일곱 장에 걸쳐 앞으로의 노동과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술과 산업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을 변화시킬 일의 미래에 대해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2. 미래의 일자리와 기술 2050 / 제롬 글렌 / 비팬북스 / 2020
<책소개-출판사 서평 중>
“정책 입안자, 기업 경영자, 민관 연구원, 교육자, 과학자, 예술가, 근로자, 자영업자, 문화 및 미디어 종사자, 엔지니어는 각자의 일자리가 어떻게 될지 궁금할 것이다. 또한 향후 어떤 전략을 마련해야 할지 방향성이 모호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여러 나라 전문가들이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면 명확한 답을 얻어서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앞으로 성큼성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by 해피의서재 2020. 9. 9. 18:40

사람에 대한 예의 / 권석천 / 어크로스 / 2020

경력 30년차 기자가 그동안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사건들과 사회 이슈들, 그리고 기자이자 직장인으로서 살아 왔던 궤적을 돌아보며 써내려간 칼럼들을 한 편의 책으로 엮었다. 유명한 영화를 인용해 글을 풀어가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이나 사건, 정당을 내세운 짧은 소설이나 가상의 편지 형식으로 쓴 글도 있다. 기존의 칼럼 양식을 최대한 배제한 자유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추구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정도면 괜찮은 인간인 줄 알았던 나 자신’이 사실은 이 뒤틀려가는 한국 사회 앞에 얼마나 하찮고 비겁한 존재였는지를 토로하며, 온갖 사회 병리 속에 각처에서 인간성이 무참히 짓밟히는 202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일면들을 선명하게 지적한다. 책 속 곳곳에 현재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진지하게 귀기울여야 할 중요한 진언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형식적 파격에 신경쓴 나머지 그래서 결론이 뭔가 싶은 글도 몇 편 있지만, 그 외에는 거의 손색이 없는 좋은 사회 에세이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일독할 수 있길 기원한다.

<책 속 문장들>

누가 대신 책임져 주느냐는 반문이 사회 윤리로 굳어지면 힘 있는 자가 모든 걸 먹어치우는 약육강식의 세렝게티 초원이 펼쳐진다. 누가 미끼에 걸려 피해를 입었을 때, 그 책임을 당사자가 지라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잔인한 요구다. 그 요구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점을 교묘하게 은폐시킨다.
불행이 엄습했을 때, 범죄와 혐오의 대상이 됐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책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과 범죄와 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32쪽)

악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 보존의 법칙일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의 불특정 다수다. (...) 거리에서 분노를 풀 용기조차 없는 자들은 아내와 자녀에게 푼다. 한국 사회에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가 넘쳐나는 이유 중 하나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다시 학교에서 분노를 배설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폭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폭력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보자는 것이다. (41쪽)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쉽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어떤 관계든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는 적정 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50쪽)

사회적 기억은 보다 정밀한 조작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른바 ‘가짜 뉴스’가 겨냥하는 게 바로 사회적 기억입니다. 가짜 뉴스들이 쌓이고 쌓이면 진실이 뒤틀리고, 뒤틀린 진실들이 모이면 역사가 됩니다. 그래서 정치 세력들은 사회적 기억을 놓고 치열하게 갈등하고 대결합니다. (63쪽)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악이 거악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닌가. 거악은 한두 사람의 악인이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의 작은 악들이 모인 결과가 아닌가. (127쪽)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믿는 것들이 주변의 영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사무실에,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 공기처럼 떠다니는, 크고작은 편견의 미세먼지들이 뭉치고 뭉쳐서 내 가치관이 되고, 신념이 된 것은 아닐까. 그 가치관과 신념이 얼마나 균형감각 있고, 상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42쪽)

나는 “법전에 있는 대로 헌법이 지켜지고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헌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면 힘이 있다는 이유로, 돈이 많다는 이유로, 그 무수한 ‘갑질’이 왜 일어나는가. ‘유전무죄’와 전관예우, 그리고 금수저/은수저/흙수저의 계급은 또 무엇인가. (166쪽)

폭력의 위력은 단지 통증에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인격에 모멸감을 갖게 한다. 자신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고, 언제라도 무릎 꿇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자각은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폭력은 아무 수식어도 필요 없다.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206쪽)

한국에는 자신이 의식하든 못 하든, 유능한 공포 기획자들이 많습니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오고, 번듯하게 차려입은 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공포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우릴 지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더 섬뜩한 것은 그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의도 없이, 그래서 망설임도 없이 근면 성실하게 성공의 사다리를 기어오를 뿐입니다. (244쪽)

폭력은 결코 ‘인간적인 반응’이라고 부를 수 없어. 인간적인 반응이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반응이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슬퍼하고, 남의 행복에 즐거워할 수 있어야 인간은 인간이 되는 거야. (306쪽)

법 논리와 법 감정은 서로 연결돼 있고, 함께 진화해야 한다. 법 감정은 앞서 가는데 법 논리가 제자리걸음을 한다면 그 사회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법 논리는 어떻게든 법 감정을 설득해 편차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318쪽)

정의는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 완전하지 않다고, 결함이 있다고, 그들을 조롱하거나 비켜가서는 안된다. ‘순수한 피해자’라는 도식은 피해자의 발언권을 박탈하려는 수작이다.
정의는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지만 사람들 마음 속에 살아 숨쉰다. 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해야 하는 건 결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정의다. (320쪽)

by 해피의서재 2020. 8. 9. 20:53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 존 허스트 / 위즈덤하우스 / 2017

유럽 세계의 형성과 각 국가별 역사적 변화 양상을 최대한 간단하게 추려 정리한 책. 중간중간에 지도와 도표도 들어 있어 마치 이해하기 좋게 잘 집필된 역사 교과서 같은 느낌도 준다. 제목으로는 세계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유럽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다. 차라리 ‘세상에서 가장 짧은 유럽사’라고 제목을 정하는 게 나을 뻔했다.

정말 최소한도의 요약 내용만 빨리 읽을 생각이라면 1장 부분만 읽어도 충분하다. (애초에 이를 염두에 둔 구성을 하고 있다) 2장은 1장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하여, 여러 가지 주제어로 세분화된 각 챕터 안에서 연대기적 서술로 유럽 사회의 복합적인 변화를 정리하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집필 계기에서 알 수 있듯 사실상 학교 수업 교재와 같은 성격의 책으로, 유럽 역사의 개괄적 이해에는 큰 도움이 되는 반면 세밀한 역사 서술이나 보다 깊이있는 역사적 통찰을 발견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맞지 않는 책.

<목차>

서문

1부. 단숨에 정리하는 2,000년 세계사
1. 고대와 중세: 모든 것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기독교의 탄생│게르만족의 등장│그리스­로마 세계와 기독교의 융합│게르만족과 기독교│유럽의 중세
2. 근대: 세계를 제패한 유럽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르네상스: 유럽의 세속화│종교개혁: 기독교 교회의 붕괴│근대과학과 진보│계몽주의: 이성의 발견│낭만주의와 민족주의│근대 유럽의 그림자
*쉬어 가기: 고전은 어떻게 최고가 되었나

2부. 조금 더 꼼꼼히 들여다본 세계사
1. 침략과 정복: 이민족과의 전쟁이 만든 기독교 세계
게르만족의 침입과 로마의 흥망│무슬림의 침입│바이킹의 등장│유럽의 팽창
2.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 군대와 세금에서 시작된 정치
그리스의 민주정치│로마의 민회와 집정관│로마공화정│로마제국과 황제
3. 중세와 근대의 정치: 민주주의를 향한 긴 여정
중세 시대의 봉건 군주│절대군주의 등장│잉글랜드의 의회정치│프랑스혁명
4. 황제와 교황: 종교와 정치가 공생하는 법
프랑크왕국의 분열과 그 이후│교황과 황제의 권력투쟁│근대 이후 종교와 정치
5. 언어: 살아 있는 송장, 라틴어
로마제국과 라틴어│이민족의 침입과 언어의 변화│라틴어가 유럽에 미친 영향
6. 서민: 묵묵히 역사를 지탱해 온 보통 사람들
유럽 서민의 삶과 농업│농노제 이후의 변화
*쉬어 가기: 유럽은 어떻게 근대성을 획득했는가

3부. 세계를 뒤흔든 사건들
들어가기 전에: 유럽을 파괴한 두 개의 힘
1. 산업화와 혁명: 참정권을 가진 노동자의 등장
잉글랜드와 차티스트운동│프랑스의 체제 변화│독일제국의 등장│러시아혁명
2.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위기가 만들어 낸 괴물
제1차 세계대전│패배 이후 독일│히틀러와 나치│제2차 세계대전│전쟁 이후 새로운 유럽연합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by 해피의서재 2020. 8. 6. 00:27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 정지우 / 한겨레출판 / 2020

지금 당장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꼭 한 번씩 읽어봐야 할, 증오와 분노가 만연한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있게 한 근본적인 문제와 그 해결 방안을 찾아가는 열쇠가 되어 줄 책.

총 3개 장에 걸쳐 청년, 여성, 공동체 문제에 관한 글들을 각각의 장에 모아 엮은 형태의 책이다.

타자혐오와 온갖 종류의 폭력으로 가득 찬 한국인의 일상을 30대 연령층의 생활인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이 모든 병리현상들이 어디로부터 기원했는지에 대해 고찰한 끝에 내린 나름의 결론과 신념들을 저자는 나직하고 담담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오직 생존만이 삶의 지상과제이자 지향점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 절망이 서로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법 조항 몇 가지 뜯어고치고 사법부 판사 몇 명 징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권위적이고 반인권적이며 폭력적인 각 사회조직의 구조와 이를 부추기는 교육-경제 체제부터 하나하나 세심하게 바꿔 나가고서야 오늘날 한국 사회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는 이 모든 병폐를 해결할 실마리가 보일 것이라는 메세지를, 이 책은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전하고 있다.

by 해피의서재 2020. 7. 21. 14:45

“우리개와 함께 살아온 삶 속에서 발견한 그들의 삶은 너무나 고귀했고 황홀했으며 날 부끄럽게 했고 그래서 때로는 너무나 슬펐다.”

(강하고 현명하고 자상한) 우리개 이야기 / 김종규 / 잼난인연 / 2019

30년간 천도농장에서 진돗개를 위시한 한국 토종견을 전문적으로 길러온 저자가 그간 길렀고 지금도 기르고 있는 견공들과의 에피소드를 쓴 글을 엮은 책이다.

제 짝을 해친 삵을 기어이 찾아내 잔혹하게 복수한 수캐 이야기, 자신이 평생 좋아하고 따르던 할아버지가 죽자 아무도 알려준 적 없는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스스로 숨을 거둔 개 이야기, 산 속에서 조난당한 사람에게 마을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준 개 이야기, 아픈 주인을 위해 나름 먹을 것을 챙겨준다고 쥐를 잡아 가공(?)까지 해서 주인의 방 앞에 갖다 준 개 이야기 등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견공들의 실제 이야기가 민담처럼 또는 동화처럼 구수하게 펼쳐진다.

오랫동안 개를 지켜봐 온 저자는 말한다. 개, 특히 자생적으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람들과 교감하며 살아온 우리개들은 엄연한 자의식을 가진 주체로서 대해야 할 존재들이라고. ‘믿어주는 만큼 자라고, 아껴 주는 만큼 여물고, 인정받는 만큼 성장하는 법’이라는 코이의 법칙은 당연히 개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평생을 우리개에게 바친 만큼 개들을 향하는 시종일관 애틋하고 따스한 저자의 시선은, 애견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조언들과 함께 책의 곳곳에 잘 스며들어 있다.

by 해피의서재 2020. 6. 26. 20:49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 이수정, 이다혜 / 민음사 / 2020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공개되어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은 동명의 팟캐스트 방송 내용을 글로 옮긴 책.

한국을 대표하는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와 함께 동서고금의 주요 범죄 스릴러 영화 속 범죄와 범죄자들을 전문가의 시선으로 분석하고,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방송 스크립트를 그대로 옮긴 대화체로 쓰여 있어 매우 쉽고 편하게 읽히나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다.

가정폭력과 성범죄, 디지털 범죄 및 각종 혐오범죄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부터 대형 강력범죄의 상당수가 촉발되는 것을 이 책 속에서 영화 이야기와 함께 제시되는 다양한 실제 사례에서 선명히 볼 수 있다.
슬럼화된 지역과 하위 계층에서 일어나는 여성 및 아동 청소년 대상 범죄에 법과 공권력과 정계가 무심한 사이, 여전히 수많은 사회적/물리적 약자들이 범죄의 위험과 신변의 위협에 노출되고 있음을 이 책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책이 촉구하는 것은 무분별한 엄벌주의의 주장이나 자극적인 여론 형성이 아닌, 사회 구성원들 간의 연대와 사회 전반의 인권 감수성 확립 그리고 입법-사법-수사 기관의 합리적인 기능 수행이다.
개인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계의식을 늘 가지고 피해자와 연대하며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하며, 국가와 기관은 빠르게 변해 가는 시대에 자신들의 속도를 맞춰 가며 무엇보다 약자와 피해자의 인권에 우선하여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제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흉흉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요즘, 어느 때보다 지금 정말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수정 교수가 이 방송에 나선 이유가 이 책의 주제를 충분히 함축한다.
“우리는 연대하기 위해 이 방송을 하고 있다.”

<책 속의 주요 문장>
한국에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집을 나가야 해요. 그런데 상식적으로 봐도 때린 사람이 집을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42쪽)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등한 관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너의 인격과 나의 인격을 서로 인정해 주고, 용인하고, 약점은 약점대로 수용하는 것이 정말 성숙한 사랑이죠.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제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혜택 안에서 안주하는 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51쪽)

형사 사법 기관 종사자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80쪽)

태어날 때부터 잔혹한 가해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어린 시절에 지속적인 폭력 피해를 당하다가 이런 폭력적인 경험이 나의 일상이구나, 내가 이렇게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강자가 될 수밖에 없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본인이 가해자가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101쪽)

사실 피해자 입장을 생각해 보면 양심의 갈등 이전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분명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용기가 없던 사람도 용기를 낼 수도 있습니다. (126쪽)

힘없는 여성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힘없는 남자들입니다. 하층 계급은 상층 계급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폭행은커녕 접근조차 쉽지 않기 때문에 대신 만만한 하층 계급을 향해 화풀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40쪽)

경찰력과 자본을 어떻게 잘 분리할 것인가는 사실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242쪽)

규범의 바탕이 되는 도덕성은 슬픔이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슬픔도 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이타적인 슬픔도 있지요. 슬픔은 고도화된 정서고, 이를 느낄 수 있어야 동정심이나, 공감, 또는 죄의식 등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270쪽)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사람이 지배 계층이라도 그들을 공격할 수 없으니 만만한 쪽으로 눈을 돌려 자기방어력이 낮은 여성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들은 여성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는지를 찾아보면 별로 없어요. 일종의 피해 의식이자 망상인 것입니다. (...) 인셀이란 백인 남성에 한정되기보다 사회로부터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피해 의식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72쪽)

인권은 중요하지만 누구의 인권도 절대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코 한쪽만 옳고 한쪽만 틀리는 일은 없습니다. 결국 정부는 공동체가 안전하게 함께할 수 있도록 상호간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갈등을 조정해야 합니다. (279쪽)

남성 조사관이라도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고 공감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런 태도를 취하며 피해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별보다 고통에 대한 이해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더 중요합니다. (354쪽)

강간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를 주목하는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절제를 못하는 가해자의 욕망이 문제지, 피해자가 어떻게 생겼느냐, 피해자가 어떤 특성을 가졌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355쪽)

특히나 지금은 인터넷 등 기술 관련 범죄가 많은데요. 범죄 수사는 사실 체력보다 기술이 관건이다 보니 당연히 다양한 범죄에 대응할 수 있는 수사 인력 확충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수사 방식이 과학화될수록 성별은 더욱 중요하지 않을 테고요. (356쪽)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만연한 사회에 미래는 없습니다. (381쪽)

어느 나라나 성범죄는 발생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을 중히 여기고 아이를 찾아 나서는 국가는 그 점에서 선진국입니다. 그저 일부 아이들의 불행이고,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너희의 불행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사회가 과연 선진국일 수 있을까요. (382쪽)

이런 피해를 입는 아이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해야 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런 피해를 입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요. (389쪽)

부당한 일에 대한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안다. (399쪽)

by 해피의서재 2020. 6. 24. 13:15
| 1 2 3 4 5 6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