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 박웅현 / 북하우스 / 2011


저자는 말한다. ‘책은 마음 속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고. 단단히 굳어 있는 마음의 바다를 깨어 다시 찰랑이게 만드는 데서 창의성이 다시 솟아나 넘실거리고, 그 힘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다시 뜨이게 되며, 다시 뜨인 눈을 통해 인생의 풍요와 행복을 새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책이라고.

 

저자는 흔히 말하는 다독가는 아니라고 스스로 평한다. 대신 한 권을 읽어도 깊이있게 읽는다고 자부한다. (그래도 한 달에 서너 권씩 읽을 정도면 독서량 면에서도 꽤 괜찮은 스코어 같다) 아울러 그는 다독 콤플렉스를 버리라고 충고한다. 독서량에 매몰되면 쉽고 빨리 읽히는 얇은 책만 찾게 된다고. ‘인생에 울림이 있는 책을 얼마나 만났느냐가 더 중요하지 숫자는 중요치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나 역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 권을 읽어도 꼼꼼하고 세심하게 책의 가장 깊은 정수까지 흡수한 덕택인지, 그가 지금까지 읽어온 여러 책을 한 강의에 한데 버무려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그의 언변은 물흐르듯 거침이 없다. 하나의 강연 안에 이철수의 판화(미술), 김훈의 산문과 최인훈의 <광장>(문학), 불가의 선문(종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함께 공존한다. 얼마나 다양하게, 또 깊이있게 책을 읽으면 이런 강연이 나오는 걸까. 8회에 걸친 강독회 원고를 고스란히 글로 옮긴 책의 특성 때문인지 책을 펼치면 마치 강연 실황을 녹음한 것을 귀로 듣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는 정말로 어느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들으며 노트 필기하듯 이 책을 읽었다.

 

프롤로그격인 시작은 울림이다편을 시작으로, 김훈의 지극히 사실적인 글들을 통해 보는 세밀한 관찰의 힘, 알랭 드 보통의 소설 혹은 인생사 연구 보고서’,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들이 그린 지중해 특유의 실존적이자 현세지향적인 내면 의식,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안나 카레니나>를 통한 인간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박웅현은 다방면의 책들을 편안하고도 흥미롭게 독자에게 소개하며 그 속에서 얻은 자기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설파한다.

 

그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면 현재를 살아라, 주위를 늘 관찰하라,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제적인 것에 충실하라정도가 될 듯하다. 방대하다면 방대한 스케일에, 고금의 인정을 받은 책들이 대거 등장하고 다양한 인문학적 이야기가 쏟아지는 향연들로 이루어진 책이지만 이리저리 다 정리해서 추리고 나면 정말 저 정도 말이 남는다. 현학적이거나 주관적인 말을 버리고 오직 사실에 입각해서 탁탁 쳐내듯 글을 쓰는 김훈의 문장이나, ‘상대적 궁핍 혹은 궁핍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불안이 온다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대한 해석이나, 땅에 발을 디딘 현실적 인문학이 아닌 기계적인 이론만 갖고 사회를 파악하려는 헛똑똑이인물을 등장시키며 그를 비판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한 대목, 그리고 여자든 꽃이든 지나가던 짐승이든 순간순간 눈에 띄는 모든 것에 경이로워하고 감탄하던 그리스인 조르바 등, 이들의 공통점을 추려 보면 정말로 현재, 실존, 있는 그대로정도로 요약되지 않는가.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예전같은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이 세상을 보고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한다. 알게 해 주는 매체가 바로 책이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책을 통해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앎으로서 세상을 새로이 바라보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느끼고 누릴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경쟁에 파묻혀 사는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삶을 누리는 법을 터득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도 이 강연집에서, 저자가 내가 이 자리에서 소개하는 책을 여러분도 사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달자면, 이 책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이 강독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북토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토크는 문헌정보학, 특히 그 중에서도 독서지도론 쪽에서 나오는 말인데, ‘어떤 일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몇 권의 도서를 선정하여 보여주면서 그 도서들과 관련된 흥미롭고 인상에 남을 만한 내용이나 에피소드를 소개하여 그들이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도록 유인하는 책 소개 기술의 하나로, 서평과 소개의 중간 정도라고 볼 수 있는 집단 독서 지도의 한 형태라고 정의되어 있다. (<신독서지도방법론>/손정표/태일사/p.296) 그런데 지금 이 <책은 도끼다>를 읽고 보니, 이 책이 그 자체로 위의 정의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북토크가 아닌가. 실제로 이 책을 통해 나 역시 제목만 알고 있을 뿐 읽지 않았던 책들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대략적인 내용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 책을 직접 읽어야겠다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으니, 과연 박웅현 씨는 실로 훌륭한 북토커(book talker)라 할 것이다.

 

by 해피의서재 2012. 5. 9. 13:41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해도 / 량얼핑 / 명진 / 2011




일전에 올린 지도에 관한 책 리스트(http://readinghappy.tistory.com/19) 중에 있던 책 중의 한 권을 최근에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3월에 감명깊게 보았던 KBS 다큐 <지도, 문명의 기억>과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읽기에 더욱 흥미로웠던 책이기도 하다.

책을 모두 읽고 느낀 점이라면, 해도가 세계사의 운명을 바꾸었다기보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사의 운명을 바꾸어 가는 과정을 해도가 증언한다고 보는 게 더 이치에 맞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새로운 지리 정보를 담은 해도가 계속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더 먼 바다로, 그 바다 건너의 새로운 대륙으로 나아갈 발판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주체는 다름아닌 인간이었으며, 해도를 비롯한 모든 지도는 인간이 나아가고 세상을 인식한 딱 그 만큼씩 그려져 왔으므로. 희망봉을 발견하기 이전 제작된 지도에 아프리카 남부가 다른 대륙과 서로 붙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책의 목차는 크게 1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은 전반적으로 '지구'에 대한 인간의 인지가 점차 확대되어가는 과정 순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1장 '고리 모양 물길에 둘러싸인 대륙'에는 바빌로니아 점토판 지도와 TO 지도 등 고대와 중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도들이 모여 있다. 바빌로니아 지도에서는 바빌론이 세상의 중심이고, TO 지도 속 세계에선 동쪽에 아시아, 북서쪽에 유럽, 남서쪽에 아프리카 대륙이 자리한 가운데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아직 관념적인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대인들의 지리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고대에 이미 상당한 지리학 지식과 현대에 가까운 구대륙(유럽+아프리카 및 아시아 일부) 지도를 남긴 프톨레마이오스와 그리스의 지리학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2장 '얽히고설킨 세계와 나침반'부터 본격적인 해도와 항해, 그리고 탐험 이야기가 등장한다. TV에서 본 덕에 눈에 익숙한 폴리네시아의 막대 지도와 프라마우도 세계 지도 등을 다시 지면에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3장부터 7장까지는 각각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항로의 발견과 개척, 신대륙 아메리카의 발견, 세계 일주 항해와 경도의 발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발견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유럽 각국의 해상 진출 배경과 그 성과, 그리고 탐험에 나선 인물들과 국가의 이후 행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중세 시기 동안 묻혀 있던 고대의 자연과학이 주목을 받고,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유럽의 과학 지식이 유입되고, 나침반이 도입되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항해술이 발전하는 등, 세상을 객관적-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보다 멀리 항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배경이 갖추어지면서 유럽은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마냥 재미있게만 읽어나가기엔 왠지 입맛이 썼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그리고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탐험가를 후원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며 열심히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의도가 씁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게다. 물론 그 시대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고, 그 시대에 유럽 각국이 식민지를 설립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이유도 없었으며, 탐험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이 TO 지도 같은 막연한 관념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세계와 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당대 유럽의 '항로 개척'이 더 많은 자원과 부를 얻기 위한 '욕망의 여정'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유럽의 입장에서 이것은 '개척과 정복'이었지만 그들의 함대를 맞이하는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엄연히 '침략과 착취'였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럽인들이 상세하게 그린 아프리카 서부 해안선 지도의 이면에 이 해안선을 따라 오가는 노예무역선에 실려갔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핏빛 역사도 배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세계사에 남은 유명한 해전과 해협들, 그리고 극지방의 발견에 관한 이야기가 관련 지도들과 함께 언급된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의 국제 정세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캐리커처 지도'도 따로 한 챕터에 모여 있다. 마치 신문 만평을 보는 듯했다. 아울러 지도 속에 이렇게 세상의 이야기가 다 들어 있구나. 하고 새삼 와닿았다. 따지고 보면 지도는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에 대한 설명을 나타낸 삽화들이 곁들여져 있던 고지도들이 함께 뇌리에 떠오르면서 든 생각이다.

이제 요즘 사람들은 구글이나 포털사이트의 지도 섹션을 통해 지리 정보를 접한다. 5대양 6대주가 모두 표시된 완성된 지구본이 학교마다 비치되어 있고 비행기와 배는 GPS와 위성 신호의 안내를 받아 가며 전세계를 누빈다. 종이 위에 그려지는 지도이든 컴퓨터를 통해 작성되고 열람되는 전자 지도이든, 현대의 지도와 지리 정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상생을 위해 기능하기를 기원해 본다. 대항해 시대 유럽이 행했던 침략과 착취의 행보를 넘어선, 진정한 상생의 여정을 여는 도구가 되어 주기를.

by 해피의서재 2012. 4. 12. 06:47

책쾌(冊儈)는 조선시대에 책을 팔던 사람을 말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도서 외판원쯤 될 것이다. 생계가 막막해진 몰락양반 중에 책쾌로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책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서사(오늘날의 서점)에서 책을 구해서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윤을 남겨 파는 것이 이들의 업무였다.

고서점의 문화사 / 이중연 지음 / 혜안 / 2007

나는 '책쾌'라는 단어를 『고서점의 문화사』를 통해 알았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책쾌부터 1970년대의 동대문 고서점 거리에 이르기까지, '옛 책들의 유통 과정과 고서점의 역사, 그리고 그 의미'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을 요즘 읽고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책쾌 조생'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여기에 잠시 끄적여 보고자 한다.

"내 비록 책은 없지만, 아무개가 어떠어떠한 책을 몇 년 소장하고 있는데 내가 그 책의 일부를 판 것이오. 그 때문에 그 뜻은 모르지만 어떤 책은 누가 지었으며, 누가 주석을 달았고, 몇 권 몇 책인지 다 알 수 있다오. 그런즉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내 책이요, 세상에 책을 아는 사람도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 책이 없어진다면 나는 달리지 않을 것이요, 세상 사람이 책을 사지 않는다면 내가 날마다 마시고 취할 수도 없을 것이오. 이는 하늘이 세상의 책으로 나에게 명한 바이라, 내 생애를 책으로 마칠까 하오."
                                                                                   -『고서점의 문화사』 p. 39, 49 中

책쾌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책을 파는 일 자체를 즐거워했다는 일화와 온갖 종류의 책에 대해 막히지 않고 얘기하는 모습이 '박아(博雅)한 군자' 같았다는 평(위의 책, p. 49)에서 조생의 전문가, 프로페셔널의 자부심과 치열함이 묻어나는 듯하다. 

사실 책쾌란 직업은 사회에서 그리 환영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조생은 '가난한 집안에서 싸게 책을 떼어다가 비싼 값에 팔아 이윤을 챙기는 장사치'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고, 한때는 책쾌라는 직업군 자체가 일명『명기집략』사건(조선의 왕실을 모독한 내용의 책이 책쾌들을 통해 유통된 사건으로, 이때 몇몇 책쾌들은 효시형을 당하기도 했다)의 여파로 아예 범죄집단처럼 취급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조생은 명기집략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꿋꿋하게 책쾌 활동을 계속했고, 정약용과 유만주 등 당대 지식인들과도 자주 교류하며 책 유통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숨김없이 발휘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고 또 일을 얼마나 즐겼는지는 그가 일했던 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 먼저 나와 있는 국내외의 서적목록을 참고하여 판매할 서적목록과 실제 거래할 수 있는 목록을 미리 작성해서 늘 가지고 다녔고,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목록을 보여주고 납품할 책이 정해지면 바로 구입절차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했던 큰 거래도 능숙하게 성사시켰다. 일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쉽지 않을 일이다. 그와 거래했던 지식인들의 기록 속에 존재하는 이 이야기들은 '조선 시대에 이토록 열정적으로 살았던 전문 직업인이 있었다'는 점에서 내게 묘한 감동을 주었다.

조생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들은 조생의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한 생몰연대가 언제인지까지는 적지 않았다. 『고서점의 문화사』에서는 그의 본명을 이런저런 다른 문헌들을 기초로 하여 나름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건 내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비록 이름없이 살다갔을지언정 그 열정과 전문성으로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기록 속에 남겨진 사람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을 뿐이다. 이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다간 조선시대의 모든 이름없는 직업인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by 해피의서재 2012. 3. 18. 20:45

검은 책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


이 책은 난해하다. 독자에게 불친절하다. 사실 이 책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작가 자신을 위해 쓴 것 같다. 소설 속에 기억의 정원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책은 작가 오르한 파묵 자신의 기억의 정원을 재현하는 데 충실했다. 그의 기억 속 어린 시절 경험과 그 때 보았던 풍광들, 읽고 접하고 상상했던 것들을 허구의 세계에 고스란히 재구성하여 되살려 놓은 파묵의 기억 속 박물관. 그래서인지 소설 속 배경이나 등장하는 설정들 중 상당수가 작가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어떤 때는 자서전 <이스탄불>의 허구 버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80년대 터키의 대중문화와 이스탄불의 겨울 거리 풍경도 생생히 그려져 있어 정말 기억의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의 구성도 독특하다. 1권이 19, 2권이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홀수 장은 소설 속 사건의 진행 상황을 보여준다면 짝수 장은 오롯이 제각각 독립된 한 편의 글들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홀수 장은 주인공 갈립이 사라진 아내 뤼야와 그의 배다른 오라비이자 자신의 사촌형인 제랄을 찾아 나서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메인 이야기이고, 짝수 장은 갈립이 찾아다니는 제랄이 신문 <밀리예트>에 연재하는 칼럼들이다. 갈립이 제랄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로 여기는 것이 이 칼럼들이며 칼럼 속의 내용은 소설 곳곳에서 출몰하며 메인 이야기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 이 칼럼 속에, 또 홀수 장의 메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다양한 비유는 옛 이슬람 문학에서 따온 것이 많아 이쪽에 사전 지식이 별로 없으면 책을 가까이 대하기가 더욱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나 또한 그쪽 지식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다만 역자 주와 책의 맨 뒷부분에 나오는 역자 후기에 기대어 그럭저럭 넘기듯이 이해하며 읽었다.

어쨌든 난해한 책인 건 맞는 것 같다. 쉽게 읽히고 이해가 잘 되는 책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 책은 묘한 마력이 있다. 안 읽힐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계속 빠져 읽게 하는 매력이 있다. 몽환적인 매력마저 느껴지는 소설 속 제랄의 칼럼(‘보스포루스의 물이 빠져나갈 때왕자 이야기는 정말 백미다)과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 묘사, 사라진 아내와 사촌 형(때로 우상처럼 여기던)을 찾아 헤매는 갈립의 꿈꾸는 듯한 여정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함께 사라진 아내와 사촌 형을 찾아나선 한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다지 화목하다고 할 수 없는, 어딘지 뭔가 결핍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의 대가족 틈에서 자란 변호사 갈립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형 제랄과, 제랄의 아버지이자 갈립의 큰아버지가 나중에 재혼해서 얻은 딸인 사촌누이 뤼야가 있다. 터키는 사촌간의 결혼이 자연스러운 모양인지, 세월이 흘러 갈립과 뤼야는 부부가 되어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제랄은 재혼한 아버지와 가정 주변을 겉돌다가 신문사 칼럼니스트가 된 후 어느 순간 완전히 독립을 한 듯 하고, 소설의 주 배경이 된 시점에서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모처에 숨어 살다시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팬을 보유하고, 사회적으로도 꽤 영향력 있는 인기 칼럼니스트인 제랄은 갈립에게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느 날 뤼야가 한 장의 쪽지만을 남긴 채 집을 나간다. 어디로 갔는지도, 왜 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즈음 사촌 형 제랄도 며칠째 신문사에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갈립은 곧 알게 된다. 평소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듯했던 두 사람이 동시에 행방이 묘연해지자 갈립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자신의 글 속에 자신만의 코드를 은근슬쩍 숨겨 놓는 특징이 있는 제랄의 칼럼 속에서 두 사람이 가 있을 곳에 대한 힌트가 있을지 모른다고 추리한 갈립은 이제 제랄의 칼럼 속에 숨은 코드들을 따라 온 이스탄불을 헤매고, 제랄이 읽었을 신문과 잡지, 스크랩을 모조리 뒤지며 제랄의 인생을, 제랄의 머릿속 기억의 정원을 파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제랄이 썼던 칼럼, 그 칼럼의 소재가 되었던 사람들과 사건들, 칼럼에 인용했던 다른 사람의 문구들, 칼럼 속에 은밀히 담겨 있었던 정치적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 제랄의 집에서 발견된 스크랩 속 제랄의 관심사들, 이런 여러 텍스트를 따라 갈립이 도달한 제랄의 실체는 갈립이 기억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실하고 처량하다. 갈립이나 또다른 제랄의 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제랄은 그리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남의 이야기 하듯 냉소적으로 칼럼에 쓰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글을 자기 것처럼 제 칼럼의 일부에 태연하게 따서 썼으며, 자신이 탐닉하던 세계에 대한 환상을 은밀히 담은 글로 사람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던 칼럼니스트 제랄의 인생. 결국 제랄도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현학적인 텍스트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혹은 매몰되어 버린 불쌍한 인생일 뿐이었던 셈이다. 갈립이 제랄의 글과 스크랩을 보고 눈물짓다가 분노의 감정을 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라고 되뇌는 제랄과 갈립, 후에 우리들 누구도 우리 자신이 아니다라고 분노어린 말을 내뱉는 갈립의 모습에서 느낀 바가 그랬다.

그러고 보니 《검은 책》 속 에피소드들은 모두 이야기라는 화두로 결부되는 듯하다. 제랄의 칼럼, 당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터키와 할리우드의 영화들, 제랄이 탐닉했던 후루피주의(문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단) .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보고 영향을 받는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왕자 이야기>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모든 책과 사물을 없애 버리는 왕자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도 어쨌든 아주 사소한 것에서조차 자아에 영향을 받는다.

글을 읽는 것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서서히 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 <검은 책> 제2권, p. 127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음에도
,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끊임없이 쓰고 읽으며, 또 그러기를 원한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도피하거나, 혹은 이야기로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안달하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속박하는 몸과 영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속임수였다.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또다른 이야기를 얻는 방법이었다.
                                                                                                             - <검은 책> 제2권, p. 45


심하면 이야기 속 세계를 진실로 믿게 되어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 그 환상이 깨어지면서 깊은 절망에 잠긴 나머지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야기에 집착하고 탐닉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더하다. 때로는 속칭 어그로를 끌려고, 때로는 남들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때로는 외롭지 않으려고, 때로는 자신의 신세를 이해받으려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난해하고 새로이 매력적인 이 책에 대해 밤낮으로 계속 생각하다 보니 이 책은 결국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문장이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닐까.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다. 오직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이건 글쓰기가 인생보다 더 경이롭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제랄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과 정체성을 은연중에 감추어 암호처럼 포장한 글을 주고받으며 세상과 벌이는 두뇌게임. 파묵에게 글쓰기란 끝없는 자기고백이고, 혹은 세상과의 밀당게임이며, 혹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말하고 싶은 사람의 하나뿐인 해방구일지도 모르겠다.

by 해피의서재 2012. 3. 1. 10:00

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 저,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새삼 접하게 된 책이다. 삶에 대한 철학적 통찰과 위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의 중요성과 하루하루 우직하게 내 길을 걸어가는 삶의 가치 등을 담담히 적어낸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출발을 시도할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의 4가지 키워드>

1. Carpe Diem (p. 172)

하루하루의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순간순간 겪어 왔던 일들이 모두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기에, 산티아고는 죽음의 목전에서 나는 후회없이 살았다고 의연히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 그것이 곧 인생의 보물을 찾는 과정이다. 결국 인생의 가장 큰 보물은 매일매일 주어지는 시간일지도.

2. 이세상에 의미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p. 265)

누구나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살면서 마주치는 어느 것 하나 의미없이 스쳐가는 게 없다.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영향을 미친다. 그걸 바로 표지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3. 마크툽, 그렇게 되리라. (p. 130)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모두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음을 안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곧 사라질 것이다. 미래의 불행을 미리 예상하고 상상하며 두려워할 시간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지금 현실에 몰두해 보자.

4. 자아의 신화 (p. 116)

뭔가 이루고 싶고, 꿈꾸고 싶고, 싶은것을 향해 첫 발을 디딜 실행력과 용기, 그리고 중간에 가혹한 시험을 맞이하였을 때 포기하지 않을 정신력만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뭔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2. 2. 19. 13:44

불안증폭사회 / 김태형 / 위즈덤하우스, 2010


1년 전 읽었던 이 책을 새삼 다시 꺼내 든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병리를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살핀 이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간략히 정리하자면
지금 이 사회,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국사회가 이 책의 제목처럼 '불안증폭사회'가 되어 있다는 것과,
그 불안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유포시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불안을 깨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신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불안증폭사회>는 우리 사회가 심각한 정신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책에 따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이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다.
"이게 다 IMF 때문이다!"라고.
IMF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기조가 쓰나미처럼 한국 사회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사회안전망도 마뜩찮고 학벌주의 등 기저에 상당한 사회병리적 증상이 깔려 있던 우리 사회가
더욱 극심한 상황으로 밀려들어갔다는 것이다.

고용안정 등 그나마 존재하던 사회적 안전장치가 하나 둘 풀려나갔다.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정부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건실한 노동에 따른 소득보다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돈 놓고 돈 먹기'식 금융투자에 따른 소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돈이 있는 부자들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부를 더욱 축적해 갔고, 그럴 여력이 못 되는 중산층은 급속도로 서민층으로 급강하했다.
'돈 놓고 돈 먹는 경제'에 고용이 늘어날 리가 없다.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사업 확장을 제한하고 기업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사회적 부의 분배를 추구하는 정책은
시장경제에 배치된다 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한다.
이와중에 그 권력을 제한받지 않는 대기업들은 동네 상권까지 무차별적으로 접수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대기업의 물량공세에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직장도 쉽게 얻을 수 없고, 어렵게 얻은 직장도 언제 잘릴지 모르고,
실업자가 되었을 때 생계와 재취업에 도움을 줄 공신력 있는 기관의 존재도 기대하기 어려우며,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부와 권력을 쥔 자와 그에 연줄을 댄 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Winner takes it all'의 사회에서,
게다가 이런 아수라장을 극복해 보겠다고 나섰던 정치인이나 사회적 명사들이
좌절하거나 변절하거나 원래 그들과 이(利)를 같이하는 사람들임이 드러나는 것을 수 차례 목격한 시민들은,
이제 세상의 변화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예 기대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힘만으로 이 정글같은 세상을 헤쳐가려 한다.
맞벌이를 뛰고, 미친듯이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입시학원을 2~3군데씩 보내고...
그러나 그 삶이 결코 행복할 리 없다.
이렇게 쫓기듯이 살아도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빚을 동원해 가며 겨우 확보한 작은 아파트 한 채와 고학력 실업자가 된 자녀뿐이다.
평생 아등바등 살았건만 주어지는 소득은 그 사력에 가까운 노력에 비하면 너무나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미 한국인들의 삶 자체가 소박한 행복이나 순수한 욕망의 충족 같은 건 생각할 틈이 없는, 
오직 생존을 위한 사투로 점철된 것이 아닐까.
오직 돈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갑옷'인 시대에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회안전망도,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는 살벌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의식 때문에.
마치 값비싼 노스페이스 점퍼를 걸쳐야 왕따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청소년들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런 한국인들의 심리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보고 있다.
생존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한국인...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언제 나락으로 추락할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
한 번 추락하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는, 패자부활전이 전혀 없는 사회.
좌절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는데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도가 없다.
맨정신으로 살아갈 자신을 잃은 사람들은 술이나 사이비 종교 등에 중독되거나, 혹은 차라리 자살을 택한다.
가정불화와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덩달아 성정이 강퍅해진 아이들 사이에서도 폭력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비틀린 사회가 온갖 사회적 병리 현상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팍팍한 삶과 살벌한 사회에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OECD 중에서 최악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국가가 되어 버렸다.
<불안증폭사회>의 저자는 이것이 한국인 멸종의 전조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있던 사람들은 죽어가고,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 없다면,
한국인의 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종국에는 멸종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인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런 살인적인 사회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멸종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회를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풀죽어서 환경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은 '먹고살기 바빠서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며,
'먹고살기 바쁜'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언제 최하 빈민층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안을 부추기는 것은 다름아닌 '승자독식'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사회 기득권층과 그들에게 장악된 언론들이다.

시민들이 불안과 좌절의 노예로 살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며 산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당에 자포자기성 표를 던지고,
막장드라마를 욕하며 보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하고 초라한 현실을 애써 잊고,
생활고에 서로 눈치 보여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성적 일탈을 감행하고,
아주 어려서부터 집단생활을 시작하며 정작 부모의 따스한 사랑을 독차지할 시간을 얼마 누리지 못한 아이가
어느 날 히키코모리나 학원폭력 가해 학생이 되어 TV뉴스에 등장하는 우울한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개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불안증폭사회>의 저자는 이런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존재는 시민들뿐이라고 말한다.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절대 유리한 이 체제를 스스로 버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경험이 있는 만큼
현재의 시민들에게도 충분히 그만한 저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안증폭사회'의 해결책으로 저자는 서로의 마음 속에 들어앉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기 위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활동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한동안 사회적 화두였던 '연대'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책의 내용과 표현 등이 상당 부분 과격한 면이 있다. 사족같은 부분들도 종종 보인다. 
민족 얘기나 한국인의 멸종 같은 표현은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불안에 잠식당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내면 역시 만만치 않게 불안이 깊었던 모양이다. 

책이 처음 출판된 시기가 2010년 11월이다. 나는 이 책을 발행 3개월만인 작년 1월에 처음 읽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 같은 책을 다시 읽으며 우리 사회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의 저자가 울분에 가까운 문장을 토해내던 그 때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by 해피의서재 2012. 2. 13. 20:48

하얀 성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2011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무력하고 슬퍼 보이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에 수치스럽고 화가 나고 죄책감이 들고 슬퍼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슬퍼하며 죽어가는 동물을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나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데에 익숙해진 것처럼,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생각을 깨닫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과 못생긴 입과 연필을 쥐고 있는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p.195)


터키 함대에 사로잡혀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스탄불로 끌려와 한 학자의 노예로 살게 된 한 베네치아 인이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되뇌는 독백 중의 일부이다
. 여기서의 는 세간인들에게 호자(Hoca)’라고 불리던, 베네치아 인의 옛 주인을 말한다.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세상을 객관적인 과학에 입각해 바라보고 싶어했으며, 어린 파디샤의 마음을 사로잡아 권력을 쥐고 자신의 과학관과 신념을 당대의 오스만 제국에 이식하고 싶어했으나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절망하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베네치아 인 노예가 가진 서양 과학 지식에 더욱 집착했고, 그래서 더욱 자신이 처한 당대의 이스탄불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래서 당대 사람들에 대한 조소와 연민 사이에서 갈등했던 사람.
 

졸지에 낯선 땅의 노예로 끌려온 베네치아 인은 자신의 주인이 된 이 호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관찰한다.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그 외모가 마치 거울처럼 서로 똑 닮았다고 한다. 마치 또다른 자신과 함께 사는 듯한 기분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 파디샤의 명을 수행하며, 때로 서로를 질시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다가 서서히 서로에게 녹아들어간다. 책상에 마주앉아 각자의 옛 과오에 대한 고백을 서로 채근하며 써내려가던 시절부터 이미 두 사람은 서로의 운명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탄불에서 함께 잔치용 폭죽을 만들고
, 어린 파디샤를 알현하고, 흑사병을 퇴치할 방도를 찾고, 능력을 인정받은 호자가 황실 점성술사에 오르는 동안에,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점차 서로를 닮아가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가고 있었다. 짧은 소설임에도 근 수십 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긴 세월 속에서 호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든다는 명분 하에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점점 서양 과학 속으로(혹은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고, 베네치아 인은 갈수록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호자를 대신해 파디샤의 궁을 드나들며 오스만의 고관대작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린다. 호자가 그토록 무시하고 비웃고 조소하던 사람들이지만 베네치아 인에게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수준의 인사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호자가 만든 무기가 실제 전장에서 아무 효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 베네치아 인이 그 책임을 둘러쓰고 살해당할 처지에 이르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완전하게 서로의 운명을 바꾼다. 호자는 베네치아 인의 차림으로 유럽으로 떠나고, 베네치아 인은 호자가 되어 오스만 제국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든 베네치아 인은 자신과 호자의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긴다
. 어린 시절 살던 베네치아의 옛 집 정원을 그대로 재현한 정원이 딸린 오스만 제국의 자기 집에서.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과 호자의 삶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오르한 파묵은 어린 시절
,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그와 삶을 서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외모가 똑같으니 누가 누구인지, 서로 바뀌었는지 어땠는지 주위 사람들은 전혀 인식할 수 없을 테니까.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을 그런 상상을 그는 기어이 소설의 힘을 빌려 구현해 냈다.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책 속에서나마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들만의 특권일까. 그래서 <검은 책>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글쓰기라는 말이 나오나 보다. (정확한 문장은 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가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 지금 내가 사는 삶보다 더 나은 모습일까. 그런데 그 삶은 어차피 내가 사는 삶이 아닌데, 더 낫든 더 낫지 않든 더 이상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일까. 반대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면 나는 그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삶은 내 것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인 건 맞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 왔던 내가, 사실은 원래의 내가 아닌지도 모른다. 남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 이미지가 사실은 내 본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괜히 오싹해진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니, 어느 시공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든 나는 끝내 본연의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검은 책>의 이야기 속 왕자처럼 모든 것을 배척하며 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답은 내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운명까지도 모두 내 것으로 묵묵히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파묵도 어쩌면 그런 뜻으로 이 글을 쓴 것일 게다.

분량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주는 책이다.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즈가 작가를 극찬할 만하다.


by 해피의서재 2012. 1. 30. 11:58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2005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시기의 나는 내 마음의 갈피를 도통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한마디로 삶과 열정을 쏟을 무언가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항상 어딘가 공허했고 알 수 없는 갈증이 났다. 대체 내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뭔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사실 문제는 나 자신의 삶의 태도에도 상당 부분 있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무한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무력하게 지워갔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나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종일 도서관에 앉아 되는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들어 되는대로 뒤지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돌아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용기도, 자신감도, 도전정신도, 진득한 끈기도, 열정도 갖고 있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도서관 서가 한켠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노트에 감명깊은 구절들을 베껴적었다. 그 후 생각날 때면 책을, 또는 노트에 적어둔 구절들을 다시 펴서 보곤 했다. 

누군가 네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 이 책을 꼽겠다. 내가 갖고 있던, 그리고 지금도 해소하지 못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요동치게 해 준, 그리고 지금도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가.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내.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불화하고,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을 견뎌야 했던 인생. 800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 유화 한 장 정도. 불행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축복이라면 유일하게 그를 알아 주었던 동생 테오의 존재와 만년에 그의 그림을 인정해 준 평론가 몇 명이 전부일 것이다.


참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도리어 그의 삶이 참 행복해 보였다. 이게 웬 미친 소리냐고?


자신을 오롯이 던질 곳이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잊고 오직 한 곳에 자신의 열정을 바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을 곳이 있었으니까.


그는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다.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사색과 고민을, 그리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그가 남긴 편지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특히 테오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흐의 자부심과 열정이 녹아 있다.


그는 화가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다. 정신병 발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지키는 데 충실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신념을 절대 꺾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건 어떻게 여기건, 자신이 스스로 접하고 느껴서 가치있다 판단하면 거침없이 그 판단에 따랐다. 그는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경외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동네 일가족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비록 그 그림들이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꿋꿋이 자신만의 화법으로 자신이 사랑한 자연과 사람들을 치열하게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의 치열함이 새겨진 그림들은 불멸이 되었다.


그는 적어도 밍숭맹숭하게 살지 않았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고 있던 그 시기의 내게 고흐가 남긴 영혼의 편지들은 내 태만한 영혼을 깨우는 죽비소리가 되었다. 그 책을 처음 손에 든 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책은 내게 그런 존재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아직도,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고흐가 남긴 편지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내가 남기는 글 속에서 훗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나를 보게 될까. 열정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지켜냈던 사람의 초상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살다간 허망한 그림자의 흔적일까.


by 해피의서재 2012. 1. 9. 21:24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2010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노교수가 있다. 춤추기를 좋아했으나 루게릭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가 이제 춤은 고사하고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가기조차 불가능해져 간다. 무력한 육신에 갇힌 채 죽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노교수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죽음을 가치있는 일로 승화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죽음을 생의 마지막 연구 프로젝트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가 있다. 피아노 연주가가 꿈이었으나 결국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스포츠 언론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무엇을 위해 왜 뛰는지도 모르는 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간다. 일과 소비가 전부인 삶을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날 TV방송에서 옛 은사의 인터뷰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린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이 교수와 제자가 14번의 화요일마다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교수의 이름은 모리 슈워츠, 제자의 이름은 미치 앨봄이다. 책은 죽음을 앞둔 모리와 그를 화요일마다 찾아오는 미치의 대화 사이에 미치의 대학 시절 기억들을 교차시키는데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교차편집을 보는 듯한 효과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사제의 이야기가 오랜 시간을 넘나들며 한데 연결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모리와 미치가 나누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 자기 연민, 후회, 죽음, 가족, 감정, 나이듦, 돈, 사랑, 결혼, 문화, 용서, 의미있는 삶 등.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제들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 모피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모리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의 땀으로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결국 교수의 길을 택한다.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모리의 가르침은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미치에게 들려주는 말들 하나하나가 삶에 대한 위로이자 새겨야 할 교훈인데,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네.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걸 굳이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해."

"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 그래서 마음을 상하면서도 상처받지 않아야 하는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이기는 건 언제나 사랑이며,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다."


"살아가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를 발견해야 해.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의미있는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둘러싼 지역 사회에, 그리고 자기에게 목적과 의미를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데 있다. 거기엔 돈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연민을 가지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낀다면 세상은 훨씬 좋을 곳이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일정한 공식이 없다. 양쪽 모두가 공간을 넉넉히 가지면서 넘치는 사랑으로 협상을 벌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다. 자기 상황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황에도 마음을 쓸 때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더 마음을 열고, 광고로 인해 만들어진 헛된 가치에 유혹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생애 마지막 이야기인 양 관심을 기울여라. 그리고... 인생에서 '너무 늦은 일' 따윈 없다.."



미치는 화요일마다 모리를 찾을 즈음, 일하던 신문사가 파업을 하면서 일손을 놓은 상태였다. 일중독자처럼 살아왔던 미치에게 ‘일이 없고’ ‘자기를 찾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닥친 셈인데 이때 미치는 심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워한다. ‘나 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는 사실에 경악해 버렸다’는 문장이 이를 대변한다. 그런 미치에게 모리의 말들은 마음의 위안이자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미치가 속한 스포츠 언론계는 자극적인 상업문화가 넘실거리는 곳이다. 치열한 경쟁이 상존하고, 조금이라도 밀리면 나가떨어지는 살벌한 곳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이 공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도 주택, 차, 생필품 등만 생각하며 끊임없이 소비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삶을 관조하며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건지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방송국에서 모리를 찾아와 3번에 걸쳐 인터뷰를 한 것(첫번째 인터뷰 덕에 미치는 모리를 찾게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후에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 것은 바로 삶을 담담히 관조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결국은 죽는다. 살아서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어떤 화려한 삶을 누렸어도 죽고 나면 한 줌의 재와 제 이름이 새겨진 묘비 하나만이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오늘도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그래서 의미없는 크고작은 싸움을 벌이는가.


누군가가 말했다. ‘이 짧은 세상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헛된 가치에 유혹되지 말고 나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충실하며 사는 것,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 내가 보고 또 누리고 있는 이 자연에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죽음 앞에 내 삶이 당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by 해피의서재 2011. 12. 26. 13:15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굳이 정제된 독후감을 쓰고 싶단 생각이 전혀 없어졌다.
그러니 읽고 느낀 것을 그저 내키는대로 마구 써내려가 보련다.

책 속에 길이 없고 종교에 길이 없고 국가에 길이 없고 이념에 길이 없다.
중요한 건 단지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에 얼마나 몰입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인생의 해답도, 진리도 오직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삶에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그런다고 그들이 나를 구원해 줄 수도, 그럴 리도 없지 않은가.
경건한 신앙으로 치장하고 그 속내는 곪아터져 가고 있을 뿐인 산중의 정교 수도원에도 구원은 없었다.
터키와 그리스가 박터지게 싸운 끝에 크레타는 터키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이 전장에서 죽인 터키인과 조르바가 찾아가 산투르를 배운 터키인은 서로 차이가 없는 다같은 인간이었다.
불교에 몰두하는 그리스의 지식인 청년이 그토록 죽어라고 읽고 쓰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삶의 진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인간을 종교와 국가, 이념, 그 외 모든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거침없이 노래하고 춤추고 산투르를 연주하고 일하고 놀고 여자와 자고 하며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지식인 청년은 '대지로부터 이어진 탯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이 야성적인 사내에게서 비로소 삶의 자유와 행복을 발견한다.
따지고 보면 역사는 골치아프게 머리 굴리고 이상한 지식을 만들어 내고 거기서 새어나온 이념이란 것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속박한 시간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조르바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사람을 위시하여 이세상의 모든 존재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거침없이 살아가는 조르바.
우린 그 사람처럼 살 수 없을까?
어려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엄청 쉬운 것 같은데.
자유라는 것도 사실 그렇게 누리기 어려운 것이 아닐 텐데.
그래 그냥 다 놔 버리는 거다. 모든 속박과 집착을 놔 버리고 이세상 모든 것을 난생 처음 본 것처럼 신기하게 바라보고 어울리고 같이 놀자. 세상 모든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사물이 내 친구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노닌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참 간단한 일 같은데 현실에서 이러다간 미친X 취급 받겠지?
아니 조르바는 저런 걱정 따위 일절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마음 가는대로 산다.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를 세우고서.
그가 참 부럽다.
그래 인생 뭐 있어??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이 공허한 세상. 철저하게 오늘을 살자. 오늘만 생각하자. 나를 사랑하고 세상 모두를 사랑하자.
그리고, 자유를 누리자. 그게 전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생에 걸쳐 인간 영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화두로 삼았다 한다.
소설의 주인공 조르바가 그런 그에게 강렬한 가르침을 준 실존인물이고.
그의 묘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한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저 묘지명이 참으로 강렬하게 오버랩된다.


by 해피의서재 2011. 10. 2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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