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박근영 / 나무수 / 2010

이번에 새로 좋아하게 된 한 배우의 무명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인터뷰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서관에서 찾아내 읽은 책.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아프고 치열하게 고뇌하고 도전한 삶의 궤적이 느껴져 그 배우가 더 좋아졌다.

여기 그를 비롯한 11명의 청춘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인터뷰어의 따듯한 시선과 더불어. 통상적인 삶의 경로와 다른, 자신만의 생각과 신념과 꿈을 따라 남들이 가지 않은 거칠고 불안한 길을 걸어가기를 기꺼이 택한 아름다운 청춘들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반짝이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또 어떻게 반짝이고 있을까. 최근 한 인기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나타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그 배우처럼 다른 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또 실제로도 지금 그렇지 않을까. 꼭 그러기를 바란다. 그 젊은 날의 꿈과 고뇌와 신념을 바탕으로 더욱 성숙하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들이 되어 있기를.

<목차>

여는 글
01 포토그래퍼 하덕현 : 상처 받은 자는 걷는다
02 패션 디자이너 문성지 : 아름다움은 아름답다
03 연극배우 김주헌 : 끝까지 부딪치고 넘어본다
04 화가 김민희 & 이근희 :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가라
05 영화감독 이종필 : 지루한 삶에 불.을.지.펴.라.
06 인테리어 잡지 에디터 임상범 : 삶은 바다로 가는 여행이다
07 만화가 김풍 : 끝까지 즐겁게 사는 게 이기는 거다
08 뮤지션 이지린 : 음악은 소소한 일상이다
09 여행작가 변종모 :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10 건축가 백지원 & 인테리어 디자이너 정연진 : 도시라는 정글을 유쾌하게 건너다
11 시인 김일영 : 슬픔도 고이면 단단해진다
맺는 글


by 해피의서재 2020. 4. 10. 12:50

역사 드라마, 상상과 왜곡 사이 / 주창윤 / 역사비평사 / 2019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사극들에는 우리가 살았던 그때의 현실과 욕망이, 그리고 시대 정신이 스며 있다. 고로, 당대의 인기 사극은 사극 속 시대의 재연이라기보다, 오히려 제작-방영 당시 시청자들의 삶을 비추는 은유의 거울이다.”

이 책의 메시지를 한 문단으로 요약하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만 들어도 익숙하고 반가운, 시대를 풍미한 사극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 7편의 논문을 엮은 책이 지금부터 이야기할 이 책, <역사 드라마, 상상과 왜곡 사이>이다.

논문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인기 TV사극이라는 친숙한 내용을 다루고 있고 글 자체도 쉽게 쓰여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특히 일명 ‘드덕(드라마 덕후)’이라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책의 말미에는 광복 이후 2018년까지 방영된 모든 TV사극들의 목록이 첨부되어 있어 ‘한국 사극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역사드라마의 정의에 대한 고찰에 관한 글을 시작으로, 역대 인기 사극에서 주로 다루어진 인물과 소재의 변천사, 시대에 따른 작법과 연출의 변화, 사극에 반영된 각 시대별 사회적 특징을 다룬 글들이 이어진다.

중국의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일 때 양산되었던 고구려/고조선/발해 관련 드라마, 일본의 계속되는 역사부정에 대한 반발과 분노가 녹아든 항일 사극, 당대의 정치 양상을 과거 역사에 투영하여 표현한 정치사극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눈여겨 볼 만하다.

오늘날에 가까워질수록 거대담론보다 여성, 서민, 일상사, 생활문화,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경향의 사극이 많아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극은 현 시대의 반영’이라는 이 책의 주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한 편의 드라마를 예시로 하여 집중 분석한 글도 있다. 예시로 제시된 작품은 바로 2018년도 최고 화제작 <미스터 션샤인>. 이 글 안에 현대 사극의 주요 특징이 모두 축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이 만약 한 장의 음악 앨범이라면 이 글은 타이틀곡쯤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시대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레퍼런스의 확장(1902~1907년 배경의 드라마에 1870~1930년대 문화 아이템을 폭넓게 사용),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들을 허구의 인물과 상상된 이야기와 한데 엮어 자연스럽게 변주한 줄거리 전개, 그 속에서 강렬하게 표현된 ‘이름 없이 용기있게 싸우다 간 위대한 이들의 단심’이라는 주제, 성격은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세 남자의 순애보와 사랑 대신 대의를 선택하는 강인한 여성상을 제시한 새로운 인물상까지.

함께 실린 스틸컷 사진들이 흑백으로 인쇄되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게 다가온다.

한국 대중문화, 특히 드라마의 변화 양상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사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by 해피의서재 2020. 3. 12. 13:13

도서관 지식문화사 / 윤희윤 / 동아시아 / 2019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구분이 가능하다.

전반 파트(1~3장)에서는 세계 각국 도서관의 역사를 고대/중세/근대/현대 시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며 중국, 일본, 아랍 지역 그리고 한국의 도서관사를 현대 시점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술해, 이 한 권만으로도 세계의 도서관사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후반 파트(4~7장)에는 오늘날의 공공도서관들이 처해 있는 난관들과,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의 도서관들이 새로운 시도에 도전한 사례들, 그 장단점과 풀어야 할 과제들에 대해 논한 글들이 모여 있다.

책의 전체 내용을 꿰뚫는 하나의 주제는 이것이다.
“도서관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습득하고 활용하며 기억해야 할 지식을 정제하여 보존하고 전달하는 본질에 충실해야 하며, 단순히 시대의 유행만을 따르거나 피상적으로 겉모습의 변화에만 치중해서는 존재 의미의 상실과 도태를 피할 수 없다”는 것.

실제로 비슷한 성격의 다양한 문화기관과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는 공공도서관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지킬 수 있는 길은 역시 다른 기관에는 없는 도서관만의 차별화된 성격을 지키는 것밖에 없으며, 그 길은 바로 책을 위시한 정제된 지식의 축적과 제공에 심혈을 기울여 보유한 정보의 공신력을 확보하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의 역사와 함께해 온 도서관의 과거와 오늘날의 도서관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 제기, 그리고 도서관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기본 철학 등 도서관인에게 꼭 필요한 전언들을 한데 모아 놓은 중요한 책이다. 곳곳에 각국 주요 도서관들의 외관과 내부를 찍은 컬러 사진들도 들어 있고 편집도 가독성 있게 잘 되어 있다.

다만 아무래도 학술서적에 가까운 성격의 책이라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
<목차>
프롤로그 5

1장 고대 도서관,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1. 도서관의 시원 17
2. 고대 문명 속의 도서관 21
3. 고대 그리스·로마의 도서관 41
4. 고대 동아시아의 도서관 56

2장 중세 도서관, 유럽 수도원부터 이슬람 모스크까지
1. 중세에 대한 오해와 편견 73
2. 수도원과 도서관 77
3. 유럽의 수도원 도서관 85
4. 이슬람 모스크와 지혜의 집 107
5. 해인사 장경판전 119

3장 근대 도서관, 혁명은 가까이에 있다
1. 중세의 가을과 근대의 봄 131
2. 인류 최고의 걸작, 인쇄술 136
3.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57
4. 근대 도서관의 파노라마 172

4장 현대 도서관, 지식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1. 공공도서관의 시작 197
2. 영미 공공도서관의 태동 200
3. 중일 공공도서관의 성립 219
4. 한국 공공도서관의 역사 243

5장 도서관의 에토스·파토스·로고스
1. 도서관의 진화와 변용 265
2. 도서관의 가치와 편익 269
3. 도서관 위기론과 해법 279
4. 도서관의 에토스·파토스·로고스 296

6장 도서관이 움직인다
1. 도서관의 고답적 정체성 315
2. 시류와 혁신의 아이콘 320
3. 장소로서의 도서관 337
4. 도시 재생과 도서관 360

7장 책과 도서관에 바치는 헌사
1. 도서관의 모태와 은유 381
2.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 384
3.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야만적 선동 389
4. 도서관의 절대성과 상대성 400
5. 도서관의 변용 405
6. 책과 도서관의 학살 416
7. 책과 도서관에 바치는 헌사 438

주 445
찾아보기 469

by 해피의서재 2020. 2. 14. 09:14

“예술은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의 포착이다.”
“경험과 기억의 덩어리가 삶인 것이다.”

최근(9.20~10.3) 총 4부에 걸쳐 KBS1에서 방영된 실크로드 문화기행 다큐 <매혹의 실크로드>에서 가장 인상깊게 기억된 문장들이다.

길 위의 몸짓(춤), 소리(음악), 재주(기예) 이렇게 세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실크로드 문화를 다룬 이번 다큐에서 춤 테마는 무용가 차진엽이, 음악 테마는 작곡가 원일이, 기예 테마는 밥 장이 맡아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옛 신라 수도 경주에서 중국 북서부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북인도를 거쳐 중동 한복판에 자리한 옛 페르시아, 즉 현재의 이란에 이르는 여정을 거치면서 세 예술가는 ‘길’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와 융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행을 마친 후 여기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다큐의 마지막 장면, 경주 황룡사지 유적 위에서 펼쳐진 원일의 음악 <바람의 길>과 차진엽의 춤은 4부작짜리 다큐의 대미를 장식하는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단상으로 남았다.

일러스트레이터 밥 장은 비록 무거운 곤봉을 직접 휘두르거나, 서커스를 하거나, 말을 타고 격구나 마상무예를 직접 할 수는 없지만 대신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섬세한 선과 강렬한 색으로 화폭에 구현해 냈다. 이 기록을 엮어 출간된 책이 바로

여행, 작품이 되다 / 밥 장 / 시루 / 2019.09.16




세월은 흐르고 옛 영화는 스러졌으며 번화했던 도시는 사막같은 폐허로 변했지만 한때 그 영광스런 시간 속에서 함께 반짝이던 ‘가장 찬란하던 한순간의 포착’, 예술만큼은 시공을 넘어 공기 속에 스며든 채 오늘까지 그 빛을 내고 있다. 이 책과 다큐가 바로 그에 대한 기록이자 증거가 아닐까 한다.

원일의 <바람의 길>을 들으며 이 책을 읽으면 다큐를 보면서 느꼈던 그 감동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곡은 음원이 나올지 안 나올지 감이 안 온다...


by 해피의서재 2019. 10. 19. 21:31

역사의 쓸모 / 최태성 / 다산초당 / 2019

스타 역사 강사 최태성이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의 일생과 선택을 들여다보며 깨달은, 진정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침과 교훈들을 22개의 이야기 속에 녹여 엮은 책이다.

각자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한국사 속의 여러 결정적인 장면들이 읽는 이에게 깊은 통찰과 울림을 준다.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을 전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삶 속을 흐르고 있는 현재라고. 현재 처한 세상의 부조리에 지레 포기하지도, 눈앞의 이익에 쉽게 자신을 팔지도 말라고. 자신의 존엄함을 지키며 자신과 세상을 진정으로 가치있게 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그런 삶이 비록 당사자에겐 지난하고 보는 이에겐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르나 역사는 결국 그런 이들의 편이었고 끝내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해 갔노라고. ​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요, 그 갈망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한 시대의 꿈이 이루어져서 다음 시대가 와요. 이걸 알게 되면 굉장히 설렙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꿈은 뭘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언제 오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역사학자 E.H.카의 유명한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미리 벽을 세워버려요. 역사 속 인물은 과거의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름을 외우고 업적을 외우는 게 끝이죠.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과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32~33쪽

역사 속에서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정상에서 배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줄 알고, 잘 내려온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내려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나의 존재, 나의 격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59쪽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광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저는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창조인가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한 창조만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꿔나갈 테니까요. -116~117쪽

저는 사람들이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 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자신만의 자리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그 힘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든요. -214쪽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젊음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역사라는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저는 늘 사람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만큼 뒤이어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 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훗날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일생으로 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26쪽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낸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세부적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그 궤적은 같아요.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나갔던 사람들이거든요. (...)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어요. 아무리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이 부족하고 그 사람만의 무언가가 없으면 진정한 ‘인싸’가 되지 못합니다. 손에 쥔 것이 없어지면 전부 사라질 인기이고 인연인 것이죠. -240쪽

시민의식이 다른 게 아닙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정신, 법과 도덕을 준수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이릅니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한다면, 권리만 찾고 의무는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정치에 참여히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시민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시민사회가 탄생한 지 100년, 이제 시민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282쪽

by 해피의서재 2019. 8. 30. 16:13

사라진 여성 과학자들 / 펜드리드 노이스 / 다른 / 2019



인류 과학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여성 과학자 16명의 일생과 그들의 업적을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의 형태로 정리하여 엮은 책.

책은 중세 프랑스 궁정에서 일하며 임상 산부인과 의학을 발전시킨 루이제 부아지에 이야기로 시작된다.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어거스타 에이다 바이런 러브레이스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라듐을 발견한 최초의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리 퀴리의 신산했던 삶, ‘등불을 든 천사’ 이미지에 가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공중보건학자이자 의료행정가로서의 진면목이 이어서 펼쳐지고, 근세의 천문학자 마리아 쿠니츠, 대다수의 여성이 과학과 학문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근세 시대에 직접 ‘여성을 위한 쉬운 화학책’을 쓴 마리 뫼르드라크, 미국 해군 소속 장교로서 컴퓨터 언어 번역 프로그램인 컴파일러의 고안과 발달을 이끈 그레이스 머레이 호퍼, 2차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원자핵의 베타붕괴 반응을 실험으로 입증한 우젠슝, 수많은 항암제와 백혈병 치료제를 개발해 내며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린 거트루드 벨 엘리언에 이르기까지 아직 대중들에게 낯선 여러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들이 세심한 설명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청소년 교양도서에 적합한 성격의 책으로, 여성 지성사와 더불어 물리학/수학/화학/의학의 발전사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 중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도 있고, 다소 낯선 이름도 있다. 비록 책의 제목대로 ‘사라진’ 혹은 흔적도 없이 ‘지워진’ 적은 없지만. ‘잊혀진’ 혹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이름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적극적으로 발굴되고 기억되며 널리 회자되게 하는 것이,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정진하여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그녀들에 대한 합당한 대우일 것이다.

PS.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lara1020&logNo=130169405047
마리아 쿠니츠의 일대기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주소. 추가 참고자료로 올려 본다.

by 해피의서재 2019. 8. 19. 20:19


이웃집의 백호 / 백호 누나, 백호 / 위즈덤하우스 , 2019

(아래의 글은 2019년에 쓴 것이다. 당시엔 해당 책의 저자의 선의를 진심으로 믿었었다. 4년이 흐른 지금, 이 글은 저자 관련 이슈로 완전히 빛이 바랬다. 2023년 현재의 시점에 대해선 이 링크 참조.)

반려동물 천만 마리 시대. 아울러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가 공중파 방송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SNS에 자신의 반려동물을 소개하는 계정이 많아지고, 그 중 몇몇 계정은 여간한 연예인이나 유명인 못지 않은 뜨거운 관심을 몰고 다니기도 한다. 심지어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가 종이책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올해 다섯 살 난 웰시코기 백호. 견주의 성인 강씨를 앞에 붙이면 자연스럽게 ‘강백호’가 된다. 인기 만화 <슬램덩크> 주인공의 이름과 똑같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 만화 주인공처럼 이 강아지도 넷상에서, 아니 넷을 넘어 현실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5년 전, ‘이웃집의 백호’라는 이름의 트위터 계정에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주 조그마한 웰시코기 강아지의 사진을 올릴 때만 해도 ‘백호 누나’는 이 정도의 인기와 영향력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표정과 어딜 가나 씩씩하고 싹싹한 백호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백호에 열광하는 ‘랜선 누나’와 ‘랜선 형’이 늘어났고, 이제 백호는 SNS 팔로워 수 70만 명을 거느린 ‘스타견’이 되었다.

너무 작고 약해서 다른 형제들이 다 입양을 가는 동안 입양처를 찾지 못했다는 강아지 백호. 만약 끝까지 입양처를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냥 대충 개를 키우다 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가벼운 생각을 가진 견주에게 갔다면 지금의 ‘이웃집의 백호’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오랫동안 시추를 반려견으로 키우다 보낸 백호의 누나는 이미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백호만큼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 놓인 다른 개들을 위한 자선 활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SNS 인기견으로서 얻은 백호의 인지도를 활용한, 그야말로 ‘선한 영향력’의 행사를 시작한 것이다.

백호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산책회’를 열 때마다 백호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몇백 명의 인파가 몰려오고, 백호를 모티프로 한 일러스트와 디자인이 반영된 ‘굿즈’(기념품)는 공지가 뜨기 무섭게 예약이 밀려든다. 이렇게 들어온 수익은 모두 유기동물 보호소에 기부할 사료와 기타 물품 비용으로 지출된다. 기부처와 기부 내역도 모두 SNS에 공개된다.

백호는 언제나 해맑다. 유난히 낯가림이 없고, 누굴 만나든 사람처럼 웃으면서 반긴다. 당당하게 마트 한복판을 누비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심지어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렇게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동물병원에서 주사를 맞는 와중에도 수의사의 얼굴을 혀로 싹싹 핥아 주며 열광적으로 반가워한다.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만큼 사랑을 표현할 줄 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백호 누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헌신적인 돌봄과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늘 환하게 웃는 백호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한 생명과 함께하는 것은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날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강아지의 평균적인 수명은 15년. 내 인생의 15년을 함께할 생명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가벼워서는 안된다.” - 249쪽

개의 하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소파와 침대를 높이 15cm 이하로 모두 맞춰 제작하고,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매일 털빗질과 집안 청소와 바깥 산책과 삼시세끼 생식 급여를 빼놓지 않으며, 수시로 동물병원에서 건강 체크를 해주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동물 전용 구급 키트를 살피고 챙기는 삶. 2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이 작은 털동물에게 자기 삶의 일부를 온전히 내어 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 동물 반려를 쉽게 결정하지 말라고 이 책은 엄중히 경고한다.

백호의 누나는 자신보다 강아지가 먼저 세상을 등질 것임을 알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강아지와 더 재밌게 살고 훗날 ‘우리 재밌었지? 좋은 파트너였지?’ 하고 헤어질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더불어 이세상의 다른 모든 개들에게도 지금의 백호처럼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지금도 버림받고 외로운 개들을 위한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사람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개와, 그 개의 사랑을 원동력으로 성장하는 사람.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by 해피의서재 2019. 7. 8. 22:03

​세상을 바꾼 위대한 오답 / 김용관 / 궁리 / 2017

​"오답을 지적하면서 다른 방법들이 출현했고, 전혀 다른 관점의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런 오답들이 있어 수학은 전복되며 확장됐다. 오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234쪽)

이 책은 고대 시기로부터 전해 내려온 수학적 화두가 세대를 거듭하고 다양한 수학자들의 손을 거치며 새로운 원리와 증명을 찾아가며 수학이라는 학문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12가지 주요 문제를 소주제 삼아 전개한 수학사 소개서이다.

작도 문제나 도형의 면적 및 둘레를 구하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미적분과 로그 등의 다양한 수학적 개념과 계산법, 원리와 법칙들은 어떻게 고안되고 활용되어 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은 어디까지 인식하고 생각할 수 있는가'의 지평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다다랐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수식과 그림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다. 쉬운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 내용의 이해를 돕는다. 홀린 듯이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유명한 수학자들의 이름과 수학 용어, 기하학에서 대수학과 해석학을 향해 나아가는 근현대 수학의 발전 양상을 알게모르게 파악할 수 있다.

수학이 단순한 문제풀이 이야기가 아닌, 세상의 이치와 구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철학의 영역에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이 책은, 수학의 발달 과정을 다룸으로써 은연중에 인간 지성의 확장사도 함께 다루고 있다.

책의 말미에는 ‘오답으로 읽는 수학사 연대표’를 수록하여 수학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by 해피의서재 2019. 5. 6. 21:15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 스위즈 / 애플북스 / 2016

왠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소설이 연상되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2016년 현재 싱가포르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가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중국인의 내면적 특성을 분석해 본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20세기 초에 루쉰이 아Q정전 등의 저작을 통해 당대 중국인들을 향한 거침없는 비판을 퍼부었던 때로부터 약 100년이 흘렀는데, 이 책 속에 나타나는 현대 중국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은 그때 제기되었던 것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신중국’이 세워지고 새로운 이념이 사회에 덮어씌워지고 경제 규모가 거대해지는 등 수십 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중국의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내면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중국인들의 문제는 대략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2천 년간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유교적 권위주의와 토대로 쌓아올려진 관본위(지위와 권력의 크기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가치관) 사회에서 공고해져 버린 체면-인맥중심의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사회 각계에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할 자유로운 혁신적 사고와 창작이 실종되는 문제가 첫번째.

과학기술보다 문학이 더 강조되고 발달했던 고전문화 풍토에서 비롯된 이성적 사고의 부재와 그로 인해 차분하고 논리적인 사고 없이 감정적으로 쉽게 휘둘리는 군중심리가 두번째.

제대로 된 민주 의식 및 가치관 교육의 전무로 인해 시민의식이 자리해야 할 곳을 대신 차지하고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도는 물론 국가의 신뢰도까지 추락시키고 있는 기회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세번째.

이외에도 중국이 앞으로 나아지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여전히 너무도 많고 심지어 해결도 난망하다.

사실 책에서 제시한 문제 중 상당 부분은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와도 많이 겹친다. 어떤 대목에선 이게 중국이 아닌 한국을 분석한 글인가 싶을 정도.

어쩌면 한국이 이 문제들을 앞서 해결할 수 있다면 그 해결책이 중국에도 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아마도 개개인의 이성적 사고 능력을 끌어올리고 모두가 진정으로 동의할 수 있는 신념, 바로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공동체 의식을 널리, 깊이 심어 주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까 한다.

<책 속의 인상적인 문장들>

​높은 관리 앞에서 중국인은 생각이 멈춰 버린다. 보통 사람이 관리를 만나거나 하급 관리가 고위 관리 앞에 서면 독립적 판단력이 자동으로 사라지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따른다. 이처럼 아첨하며 떠받드는 것이 관본위 사회의 특징이다. 유교 문화는 질서를 강조한다. 이 질서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중국인은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적인 사고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강권에 의해 빼앗기고 만 것이다. 유학자들이 강조하는 ‘왕은 왕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은 신하의 모범이 되고, 아비는 자식의 모범이 된다’의 본질은 개인의 독립적 사고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 자신감이나 자아의식이 부족하다 보니 언제든 권위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중국인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회가 전반적으로 활력을 잃어버렸다. 일상생활 속의 처세는 사회 발전에 좋지 않고, 학술계의 아첨은 학문의 발전을 방해한다. 이 두 가지 현상은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모두 중국인이 반성해야 할 문화 현상이다. -132~133쪽

​한 무리에서 체면의 총량은 정해져 있어 한 사람이 높아지면 다른 이들은 작아진다. 다들 체면을 따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할까? 해결책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 중국 역사를 보면 민족 내부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대재난을 맞이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화혁명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다. 이런 재난에는 공통된 특성이 있다. 바로 체면이나 명예가 없는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명망 높은 사람들을 모욕하고 해를 가한다는 것이다. 문화혁명 때도 그랬다. 그 당시에 지위높은 학자들이나 체면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각종 굴욕을 당했고, 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많았다. 누군가가 숙청 대상자를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주변 분위기에 휩쓸린 대중은 알아서 자신이 공격할 목표를 찾아냈다. 중국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반성 없이 모든 책임을 소수의 야심가에게만 전가한다면, 문화혁명 같은 대재난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240~241쪽


1. 유교 사상에는 평등 관념이 부족하다. 유교 사상은 중국을 수천 년간 통치해온 주류 사상으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평등 사상이다. 사회에서는 물론 가정 내부에서도 성별과 나이에 따라 수많은 등급으로 나뉜다. ... 그렇다 보니 보통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게 되면서 서로 무시하고 차별하는 사회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2.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소농의식이 강하다. 오랫동안 내려온 농경문명으로 형성된 사상과 의식은 이미 뼛속까지 새겨져 있다. ... 소농의식에 사로잡히면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큰 것을 놓친다.

3. 전체 민족을 통합하는 신앙이 없다. ... 정신적으로 함께 추구하는 것이 없는 중국인은 세속화되거나 물질적으로 변하기 쉽다. 특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사람을 나누다 보니, 다들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다.

4. 인구가 많다. ... 인구가 많다 보니 서로간의 친밀감도 약하다. 또 ‘네가 한 술 더 먹으면 내가 한 술 적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서로 방어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강하다. -246~247쪽

​2천 년 동안 지속된 봉건적 전제주의는 중국인의 독립정신은 물론이고 민주의식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 특히 땅이 기본 조건인 중국인은 일단 나고 자란 땅을 떠나면 아주 낯설어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주인의식도 사라져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린다. 역사를 돌아보면, 중국인에게 다음의 특징이 나타난다. 바로 노예처럼 죽은 듯이 살거나, 참다 안되면 일어나 부숴버리는 것이다. 계약과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공민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261쪽

서양 사회에서는 ‘절대적 높이’의 올림픽 정신을 숭상하지만, 중국인 사회에서는 ‘상대적 높이’의 병적인 경쟁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같은 병적인 경쟁은 개인의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 전체를 퇴보시킨다. ... 병적인 경쟁 사회에서는 뛰어난 사람이 가장 쉽게 상처를 받는다. ... 자연히 사람들은 마음 편히 살기 위해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268쪽

by 해피의서재 2019. 4. 22. 14:12

​수학의 감각 / 박병하 / 행성B / 2018

이 책의 저자 박병하는 처음부터 수학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대학원에 다니던 중 수학의 매력에 이끌려 ‘수학의 세계로 이민’을 했다고 한다. 현재의 전공은 수리논리학인데, 사회과학과 수학을 모두 경험해 보았기에 이렇게 문과와 이과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2009년에 출간된 <수학 읽는 CEO>의 개정판 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인문학적 메시지가 다분한 글 위주로 다시 모아 엮은 책이라고 저자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다. 무한과 0의 개념, 숫자의 표기, 계산의 발달 과정, 유클리드 기하학 및 절대기하학, 함수, 좌표, 그래프, 오일러 산책, 리만 가설, 페르마의 정리 등 수학 분야의 대표적인 개념들이 인생과 직결된 철학적인 교훈들과 자연스럽게 엮여 제시된다.

최대한 쉽게 풀어 쓴 책임에도 역시 위에 나온 여러 수학 개념에 완전히 문외한인 사람이 읽기엔 다소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나 생각 다이어트, 관계성의 인식 등 작금의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지적-정신적 덕목을 일깨우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책이다.

​<책 속 주요 문장>

수 없이 셈 없고, 셈 없이 수 없다.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다. 상호 관계 속에 있다. ... 내가 있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고, 너는 내가 있기 때문에 있다. 좋건 싫건 그 관계망 속에 내가 있다. 나는 관계 자체이며 관계의 ‘사이’에 있기도 하다. 점과 직선, 수와 셈은 악기와 손의 관계처럼 따로 있어서는 소리를 못 낸다. -41~42쪽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묻고 그렇게 했을 때 가장 좋다면 고정관념을 과감히 버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순응하는 것이다. ...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 아름답다. 내 안에서 지금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채우라. 바로 지금 형식적으로 결핍된 곳을 채우는 것은 선호와 익숙함에 우선한다. -62쪽

유클리드 시스템은 좁고 평평한 공간에 더 맞고, 로바쳅스키 시스템은 광활하고 휘어 있는 공간에 더 맞다. 모든 공간을 설명할 절대적인 기하학이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따라 기하학들이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88쪽

아무리 해도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시스템 자체의 결함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껴안아야 한다. 시스템을 새로 정립하는 방법은 개인이나 기업처럼 단위의 크기, 그리고 문제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93쪽

수학은 0과 무한의 학문이다. 궁극의 없음인 0과 있음의 궁극적 확장인 무한 위에 서 있다. 수학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수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때문이다. -171쪽

계산은 필요 이상의 노력을 덜어 내도록 도와 준다. 그리고 남은 힘을 필요한 곳에 집중하게 한다. ... 계산은 가장 비창조적인 행위로 취급된다. 스위스 시계처럼 그 맞물림은 엄정하고 차갑다. 맞물림에 이상이 생겨 어딘가에서 삐긋하면 결과는 무용지물이 된다. ... 그러나 세상의 모든 계산은 한때 치열한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계산이 스스로를 혁신해 가는 과정을 보면 한 편의 대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230~231쪽

계산이 제자리를 잡고 계산이 제 기능을 할 때 상상의 공간은 넓어지고 창조의 향기는 오래 퍼질 것이다. -239쪽

실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삶의 본원적인 것이기도 하다. 실수 없이 사는 건 실은 사는 게 아닌 것이다. 실수 없이는 삶의 진화도 없기 때문이다. 실수는 삶의 주춧돌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실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데 있다. 실수는 배우고 발전할 좋은 기회다. 실수는 발전의 디딤돌이다. 맹수 같은 기상으로 배우라. 틀려도 좋다. 아니, 잘 틀리면 더 좋다. -259쪽

직관은 ‘당연하다, 그냥 받아들이라’고 속삭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직관이 시키는 대로, 그래 당연해, 하다 보면 현실은 고착된다. 딱딱한 땅에 상상력은 뿌리내릴 수 없다. 동양 수학이 고대와 중세의 높은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변방의 변방으로 퇴보한 원인도 여기에 있다. 의심을 허락하지 않고 실용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만 수학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열쇠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정말?’과 ‘왜?’에 붙어 있는 물음표, 그것이 창조의 광맥을 찾는 열쇠다. -277~278쪽

by 해피의서재 2019. 2. 11. 20:00
| 1 2 3 4 5 6 7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