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저자
알베르 까뮈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04-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카뮈는 살아 있을 때 그렇게도 벗어나고자 했던 바로 그 주춧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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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의 도시 오랑. 평화롭다 못해 따분한 나날 속을 살던 이 도시의 거리에 죽은 쥐들의 시체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쥐들의 죽음은 곧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사망자의 수는 무서운 속도로 늘어만 간다. 전염을 막기 위해 외부 세계와 차단되어 고립된 도시는 거대한 무덤처럼 변해 간다. 죽음의 도시가 되어 버린 오랑 안에서도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며 버티고, 의사 베르나르 리유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라는 이름의 이 소리없는 학살자와 싸워 나간다.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장편소설 『페스트』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기자 레이몽 랑베르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베르나르 리유가 정리한 비망록의 형태를 취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건조한 문체이다. 본시 작가 카뮈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그 건조한 문체다. '습기가 없는 마른 바람 같'다는 평론이 있을 정도로. 촉촉한 물기라곤 단 1mm도 느낄 수 없는 그의 글투는 이 소설에서 전염병 앞에 무너져 가는 한 도시의 처참하고 비극적인 모습을 역설적으로 더 강렬하게 드러낸다. 아울러 그 습기 없는 문체로 묘사된 각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와 심경 변화, 그들 각자의 신념은 작가 카뮈가 이 작품을 통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가치, 즉 "인간에의 희망"을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결국 이러한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페스트가 수그러들었어도 도시 곳곳에 여전히 페스트 균이 남아 있을 것임을 알기에 마냥 안심할 수 없고, 여전히 불안 속에서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도시의 앞날을 암시하는 결말 부분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린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위협과 불안 속에서, 그들에 맞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등하며, 그럼에도 끝까지 싸워 나가야 하는 숙명과 그 숙명을 기꺼이 감당할 의지를 가진 존재."

by 해피의서재 2015. 6. 14. 22:10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느티나무도서관. 

2000년에 설립돼 어느새 개관 15년차를 넘기고 있는 사립 공공도서관이다. 

오늘을 사는 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유'와 '공공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생각에 

개관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느티나무도서관.

공립 도서관보다 상대적으로 운신이 자유로운 '사립'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느티나무도서관은 공공도서관 본연의 역할을 보다 충실히 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해 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도서관계의 실험실'. 


그렇게 느티나무도서관이 해온 실험들과 그간의 성과, 그리고 앞으로의 발전 방안에 대한 고민 등을 담은 책들이 이제 꾸준히 나오고 있다. 

박영숙 관장이 다른 도서관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간의 활동 내용을 정리하여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는데 

『꿈꿀 권리』를 시작으로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에 이어 이제 『이용자를 왕으로 모시진 않겠습니다』라는 세 번째 책이 나왔다.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진 않겠습니다

저자
박영숙 지음
출판사
알마 | 2014-07-1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도서관의 기본가치인 공공성과 지적 자유는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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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매우 인상적이다. 

보통은 공공기관이건 기업이건 심지어 작은 동네 가게를 가든 요새는 '손님이 왕이다'라는 말이 철칙으로 여겨지는 상황인데 

이 책은 과감하게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진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다. 


사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이용자의 능동성과 자유를 존중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용자가 원하는대로 일일이 다 떠먹여 주는 것, 더 나아가 이용자의 마음 속을 먼저 다 알아채고 시종일관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것, 

이것이 과연 실제로 이용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공공도서관은 시민들이 스스로 지식을 찾고 생각을 하며 자기만의 삶을 찾아 가꿔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말 그대로 '능동적인 시민을 키워내는 곳'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느티나무도서관에게 

위와 같은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기'란 도서관의 존재 가치와 배치되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직접 이용자를 모시고 섬기기보다, 책(과 서가, 공간의 구성)을 가지고 무언의 말을 걸면서 

이용자, 아니 시민이 스스로 도서관으로 걸어들어와 도서관에 알게모르게 자신의 손길을 보태며 함께 어우러지도록 이끈다. 


위와 같이 다양한 컬렉션을 운영하며 책을 매개로 '소리 없는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거나 


이용자들이 읽고 놓아둔 책을 서가 군데군데 모아두어 은연중에 '함께하는 책 전시회'를 유도하는 센스 등.


이외에도 다른 공공도서관에서도 참고해도 좋을 법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책 곳곳에 가득하다. 

'도서관은 책으로 말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장서 구성과 운영부터 도서관 건물 내부 각 공간의 배치에 관한 설명,

그리고 도서관 간 협력과 시민을 대상으로 한 도서관 교육에 대한 이야기까지. 

공공도서관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계속 참고해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실제 느티나무도서관의 현판 디자인. 이 현판 하나만으로도 이 도서관의 설립 목적과 비전을 선명하게 잘 알 수 있다.

by 해피의서재 2014. 11. 17. 22:18



데미안

저자
헤르만 헤세 지음
출판사
부북스 | 2013-01-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소설은 1919년에 처음으로 출간되는데, 그 시기는 세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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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함께 일하는 친구에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낸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공부 때문에 이 책을 읽었으며, 보통의 고전이 그렇듯이 어렵고 공감하기 힘든 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접했을 때의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시 이 책이 읽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다시 펴든 『데미안』은 그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랫동안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에 빠져 지냈다. 지금도 오르한 파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이 내게 던져 주는 주요 화두가 바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고는 한다. 파묵의 소설 『검은 책』에 나왔던 이 말. 


"난 나 자신이 되어야 해." 

"우리 중 누구도 우리 자신이 아니야."


전혀 다른 시기를 살았고 또 살아가는, 국적도 다른 두 작가 사이에서 비슷한 화두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역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에밀 싱클레어는 사회가 '승인한' 밝고 도덕적이며 모든 것이 정갈하게 재단되어 있는 첫 번째 세상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첫 번째 세상과 상반된 어둡고, 음침하며, 난잡하며 혼란스럽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두 번째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날것의 세상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정갈함의 이면에 있는 날것스런 세상은 각 개인의 마음 속에도 오롯이 실재한다. 

그러나 보통의 사회는 세상의 날것스런 이면을 굳이 외면하고 쳐다봐서도 안된다고 가르친다.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날것의 세상에서 스스로의 성숙을 이루는 길에 대해 알려 주지 않는다.

자신의 진짜 내면을 찾기 위해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하는 싱클레어에게, 위에 언급한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이가 바로 막스 데미안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매의 환상과, 완벽한 모신(母神)의 현신처럼 묘사되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의 존재는 

싱클레어가 끝내 다다르기를 원하는 이상적인 자신,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끌어안으며 어떤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는 

성숙한 자아를 의미하는 일종의 은유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읽어도 이 책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면 이 책의 프롤로그 부분을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의 주제가 바로 프롤로그 부분에 이미 다 나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추구하는 자였고 여전히 그러하다. 하지만 이젠 별과 책에서 추구하지 않고 내 안에서 내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나의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자신을 속이는 짓을 더는 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의 삶이 그러하듯이, 나의 이야기는 부조리와 혼란의 맛, 광기와 꿈의 맛을 낸다.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다. 한 번 나서 본 길, 어렴풋한 경로다. 돌이켜보면 사람은 누구나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신이 되려 애쓴다. 누구는 둔하고 무겁게, 누구는 더 가볍게, 각자 할 수 있는 대로. (중략) 그러나 모든 각자는 자연이 사람이라는 목표를 향해 던진 존재다. 그리고 다들 같은 곳에서 기원한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들에게서, 똑같은 심연에서 나온다. 하지만 심연에서 기원한 시도요 던져진 존재인 각자는 자기 나름의 목표로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납득할 수 있지만, 해석은 각자 자신에 대해서만 할 수 있다.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길을 가는 것(p.66)인데,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과 하나였던 적이 없기에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서로에게 달아난다고 했다(p.183).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며, 사람은 거북처럼 자기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p.90)고 했던가.

자연이 인간을 매개로 의지하는 바는 이런저런 패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개인과 그들의 삶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p.185)고 

데미안은 말한다.


이념이나 조직의 질서 같은 것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사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대다수인 가운데 

우리 중 우리 스스로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물론 그렇게 살려면 필연적으로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삶은 다른 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법이다. 

훗날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그 삶이 어쨌든 내 의지대로 온전히 살아낸 것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면 

적어도 돌이킬 수 없는 내 지난 삶에 대한 후회가 조금이라도 덜하지 않을까.

아울러 내 삶이 그러하듯 다른 이의 삶도, 다른 이의 존재도 있는 그대로 중하다는 것을 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사람을 경시하는 풍조가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소설의 중간에 니체가 잠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키에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를 연신 떠올렸다.

우린 모두 하나의 개인, 그 자체로 가치있는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깨어난 사람의 의무는 이것 하나뿐이다. 다른 의무는 전혀, 그 어디에도 전혀 없다. 자기 자신을 추구하기, 내적으로 견고해지기, 끝이 어디이든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아가기, 이것이 유일한 의무다. (중략) 그 사람의 몫은 아무 운명이나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운명을 발견하고 그 운명을 내면에서 온전히, 꿋꿋이, 또한 끝까지 사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이요 달아나려는 시도요 뒤돌아 대중의 이상으로 도피하기, 순응이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두려워하기다. (중략) 나는 자연이 내던진 존재, 불확실성을 향해 던져진 존재, 어쩌면 새로운 것에, 어쩌면 무에 이를 존재였다. 그리고 깊디깊은 심연에서 비롯된 이 던지기가 실현되게 하기, 이 던지기의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오직 이것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로지 이것만이! (p.173)


by 해피의서재 2014. 8. 18. 20:56



동양고전이 뭐길래

저자
신정근 지음
출판사
동아시아 | 2012-05-23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우리 시대 대표적 인문학자 신정근 교수의 원칙적이면서도 새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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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시작하는 동양고전 핵심 명저 25"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논어, 맹자, 주역, 대학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양 고전들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춰 해석한 본격 동양 고전 해설서라고 보면 될 듯하다.

동양고전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사서삼경'을 떠올리지만 

이 책의 저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제자백가의 책들까지 더하여 "팔경(八經) 오서(五書) 십이자(十二子)"로 분류하여 제시했다. 

팔경과 오서와 십이자에 포함되는 책들은 각각


팔경=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악경(음악), 이아(사전류), 효경

오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 소학

십이자(제자백가)=관자(관중), 묵자, 노자, 장자, 순자, 손자, 한비자, 상군서(상앙), 전국책(종횡가), 공손룡자(개념의 구분), 양주(자아중심주의), 추연(음양오행)


이며, 이 책들을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소개하고 책들의 내용과 탄생 배경 등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책의 맨 뒷부분에는 각 고전의 관계를 정리한 상관도(圖)와 간략한 요약문도 있어 읽는 이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아래의 자평(自評)을 통해 고전들이 저술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본서는 중국 고대의 사상사이자 고대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도는 여느 철학사와 달리 학파의 분류보다는 사상가의 분류에 따라서 서술되고 있다. 고대 철학이 집단적 대응의 측면도 있지만 개인적 분투가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분투가 제자백가라는 말처럼 선진 시대의 사상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352쪽)

이 책에 따르면 팔경, 오서, 십이자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팔경은 고대 중국의 '현왕 시대'를 배경으로 가장 이상적이고 근본적인 사물(또는 세상)의 이치, 치국의 도리 등을 정리한 책들이다.

그래서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와 방식'을 풀어 쓴 주역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그 다음으로 사회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할 질서를 다룬 예기를 제시했으며, 순수한 인간의 감정 표출을 다룬 시경(문학)과 악경(예술, 음악), 서경(현왕들의 치세를 정리한 일종의 행정문서), 춘추(법률, 역사), 효경(윤리), 이아(언어, 사전)를 '팔경'으로 묶어 정리한 것이다. 


중국 서주 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군웅할거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관중 등 학자관료를 중심으로 보다 현실적인 내용을 다룬 책들이 등장했는데 이 도서군(群)이 바로 오서이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소학의 다섯 도서 중, 사실 대학과 중용은 팔서 중 하나인 예기의 일부에 있던 부분이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한 것이다. 이 오서는 유학의 대표적인 도서들로 남아 국가 이념 정립과 통치 철학에 관한 지식을 후세 왕조에 꾸준히 공급하며 오랜 시간 그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한편 춘추전국시대, 오서가 확정되기 이전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던 수많은 사상들을 담은 책들이 바로 십이자에 해당하는 제자백가의 도서들이다. 상대적으로 잊혀진 주장과 사상이 되었지만 위 인용에 나온 대로 이 사상들은 선진 시대의 사상계, 나아가 중국의 지식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존재들이다. 그러니 이 사상을 만들어 내고 널리 퍼뜨리고자 애썼던 그 수많은 '지적 투사'들은 마땅히 잊혀지지 않고 계속 세상에 기억될 권리가 있다. 


세상을 이해하고 경영하기 위한 다양한 사상과 지식, 그리고 사례(역사 속의 다양하고 날것인 인간군상 포함)를 한데 모아 놓은 이 명저들에 대해 배워 보니, 오랜 세월 동안 동아시아 학자와 관료들이 이 책들을 항상 가까이 두고 읽어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4. 5. 23. 22:18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저자
최진석 지음
출판사
소나무 | 2013-05-0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소크라테스와 한나절만 보낼 수 있다면...스티브 잡스는 인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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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책과 비슷한 내용과 성격의 책을 다룬 포스팅을 올렸던 기억이 나는데, 

그 책의 내용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좀 더 강하고 직설적인 어조의 책을 발견하여 여기에 한 번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지금, 당신만의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까'라는 메시지가 워낙 강하게 다가오기도 했고. 


다른 대중인문학 책에서도 본 얘기지만, 인문(人文)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뜻한다. 

'사람'이란 존재가 가진 날것의 기질과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굳이 억압하거나 포장하기보다 그 날것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가치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인문학의 가치', '인문학의 존재 이유'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 간다. 

인문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인문학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과 나름의 답변이 이 책의 주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책은 "인문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행복해지기 위한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인문학을 통해 "자유롭고 관용적인 사고의 소유자, 나 자신에 충실하며 후회없이 사는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글줄 좀 읽었다고 그 지식에, 이념에, 관습에 자신과 남의 인생을 우겨넣을 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인문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책의 저자는 '교조주의에 물든' 사람을 경계한다. 그것은 가짜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날것'으로 태어나 어디까지나 '날것'일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온갖 속박을 가하고 자유로운 본성을 누를 것을 강요하는 인문학은 

절대 살아있는 인문학일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EBS 인문학 특강'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저자가 강의해 온 내용을 엮어 정리한 이 책에서 꾸준히 이야기하는 '인문적인 인간'이란 

이 자리에서 정리해 보건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한다. 


"애써 정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사람. 

나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고 남의 주체성 역시 존중하는 사람. 

맹목적인 사람이 아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나에게도, 남에게도 달리 생각할 자유를 인정하는 사람. 

앵무새가 아닌 자신만의 언어와 질문을 가진 사람."


그 어떤 이념이나 물리적 속박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펼치며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살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이의 '있는 그대로' 역시 기꺼이 인정하는 것. 
'지식'보다 '행동'을, '추상'보다 '현실'을 중시하고 기꺼이 그쪽을 먼저 선택하는 것.
한마디로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을 가지고 나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자신만의 무늬를 그리는'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인문적인' 사회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나는, 지금 나만의 무늬를 그리고 있는가?

.
.
.

<Remarks>
"상상력이란 것도 별반 다른 게 아니에요. 즉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의 방향이 어디로 움직일지 꿈꿔 보는 능력이지요. (...)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혹은 결이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인간의 동선입니다. (...)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지요.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독립적으로 알아내기 위해서 인문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62~63쪽)

"지속적인 성공을 하려면 자기를 지배하던 이전의 성공 기억을 벗어나서 새로운 상황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봐서도,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봐서도 안됩니다. 오직 텅 빈 마음을 가지고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하는 강제성도 강해지지요. 이념가들이 변화하지 못하다가 실패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념가들이 선명성 경쟁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66쪽)

"한국 사회는 걱정하지 마세요. 간곡히 말하건대, 제발 그러지 마세요. 자기는 자기 일만 잘 해결하면 돼요. 자기만 잘하면 됩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는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지 않고 왜 스스로를 사명의 완수자가 되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지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사회'나 '국가'에 양보하면 안 됩니다. 각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튼실한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라야 건강합니다. 사회를 위해서 자기 욕망을 소외시키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결국 부조화스럽고 비틀어집니다." (75쪽)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의 욕망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은 더 헌신적이고 더 창의적일 수 있습니다. 윤리적 힘도 바로 거기서 나옵니다." (78쪽)

"욕망은 '이곳'에 있는 자기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힘이고 의지이며 충동이고 생명력이에요. 욕망이 거세된 인간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인간은 사람이 아니에요! '나'를 '우리'라는 우리에 가두지 마세요! 그것이 인문적 태도가 여러분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82쪽)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실 버릇없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에요. 익숙한 것, 당연한 것, 정해진 것들에 한번 고개를 쳐들어 보는 일이에요. 왜? 익숙하게 하는 것, 편안하게 하는 것들은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럼 무엇이냐? 관습이거나 이념이거나 가치관이거나, 뭐, 그런 것들이죠." (103쪽)

"철학은 사실 인간이 신을 벗어난 사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독립과 관계되지요. 철학은 신화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을 벗어나서 생각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입니다." (105쪽)

"독립적 주체의 확립 없이 창의성은 불가능합니다. 창의성은 주체가 대상을 외압 없이 독립적으로 대면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적 주체가 확립되었을 때만이 창의성과 같은 차원에서 작동되는 인격적 성숙, 미학적 삶, 행복, 자유 등도 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일반'이 아니라 '개별'로써의 자아에게만 확인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116쪽)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한다는 것은 뭡니까?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를 부드러운 상태로 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화하는 거지요. 점점 굳어가면서 명사화되어 가는 자신을 율동감이 있는 동사로 되살리는 거에요. (...) 이념 따위는 잘근잘근 씹은 다음에 과감히 뱉어 버리세요. 이념 같은 딱딱한 명사들이 목울대에 걸려 있는 한 말캉한 동사들이 입을 통해 나오기 어렵습니다. 몸속에 들끓는 욕망의 꿈틀거림이 이념과 개념의 필터에 막혀 터져 나오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념 따위의 명사들을 몸 밖으로 뱉어 버리세요. 핏발 서린 이념의 눈빛은 얼마나 촌스러운지요?" (121쪽)

"자기가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만큼 잡고 빠져 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손에 남겨진 것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바로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개념은 출발부터 세계를 전면적으로 반영하기에 부족한 것이고, 출발부터 소유적 상태이고, 출발부터 제한된 상태이고, 출발부터 딱딱한 거에요. (...) 개념은 실재하는 세계와 살아 움직이는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마름 같은 것인데, 이 마름이 오히려 실재하는 세계를 제어하거나 '나'를 규정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가 주인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122~123쪽)

"이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회는 경색되고, 이념 간에 무한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어요. 이념은 항상 순교자를 원하니까요. 철저한 수행자만 원하니까요. 순교자와 수행자에게 타협이란 없습니다. 이념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간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경화된 이념과 신념은 우리를 억압합니다. 그리고 광기와 폭력을 부릅니다. 이 광기와 폭력의 가장 근본적인 지점에 개념이 있습니다. 세계를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 익숙한 인간의 습관과 더불어 그 개념과 세계의 진상을 관련시킬 능력을 상실한 점이 인간을 나약하게 합니다." (130~131쪽)

"세계를 발전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론가들이 아니라 실천가들이고 행동가들입니다. 전문가들이 자기만의 경색된 이론 틀로 실천가와 행동가들의 발목을 잡으면 아 ㄴ됩니다. 지식으로 무장한 이론가들이 쉽게 지위가 높아져서도 안 됩니다. 전문가들은 행동가와 실천가들에게 사용되고 이용되어야 합니다. 실천가나 행동가들은 사건에 집중해요. 수준 높은 이론가들이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준 높은 행동가, 수준 높은 실천가들이 나오는 겁니다. 세계는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그래서 '내공'있는 실천가와 행동가들이 역사에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식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미래 지향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6쪽)

"지식과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지식인은 예측을 할 수 없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150쪽)

"우리가 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구분하는 순간 세계는 자기한테 반쪽밖에 안 열립니다. 나머지 반쪽은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처음부터 배제되어 버리는 거지요. 우리가 이 반쪽의 세계만 가지고 만족하면 다행인데, 그렇지를 않아요. 반쪽의 세계를 가진 다음에는 다른 반쪽을 비난하고 억압하지요. 나머지 반쪽을 자기와 다른 것 혹은 자기가 의존해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잘못되거나 비진리인 것으로 치부합니다. 심지어는 악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자신의 불행이 시작될 뿐만 아니라 사회의 혼란도 커집니다." (155쪽)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유연해졌습니까? 왜 유연해지지 못합니까? 지식에 제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험을 관념으로 가두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을 벗어나서 자기 안에서만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생명력, 욕망, 충동을 살려내야 합니다. 이 충동이 여러분을 인문적 통찰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156쪽)
"지식은 무엇을 이해하는 데 머물러 있는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식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까지여야 합니다.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에게 아직 열려 있지 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식은 우리에게 뿌리로 기능하지 않고 날개로 기능할 것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지식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147쪽)


by 해피의서재 2014. 2. 1. 13:25


아시아 역사

저자
아서 코터렐 지음
출판사
지와사랑 | 2013-05-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아시아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이 책은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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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중심으로 몰려드는 아시아의 잠룡들에 맞서 세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들의 기호와 기대에 부응하는 것뿐이다. 세계화 시대에 그 어떤 대륙도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면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우리의 미래는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역사』 中, 763쪽)


8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 이 책을 다 읽는 데만 꼬박 3주가 걸렸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을 시작으로 중국의 황하 문명과 인도의 인더스 문명을 거쳐 

중국-한국-일본의 동아시아, 베트남-타이-캄보디아(크메르)-인도네시아(스리비자야)-말레이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실크로드 일대의 중앙아시아 지역, 이란-아라비아-터키 일대의 서아시아 등 아시아 곳곳의 역사를 

시대/지역별로 챕터를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인데,

그 서술이 마치 거대한 강의 도도한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느 정도 익숙한 중국과 인도, 중동의 역사는 물론 

우리가 상대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각 국가가 거쳐간 흥망성쇠를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던 책. 


특히 책 속에 펼쳐지는 중세 이후의 아시아 역사, 특히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유럽 열강의 식민사로 점철되어 있다. 

아울러 오늘날 중동 지역이 화약고가 된 이유도 영국의 잘못된 식민 정책에서 유래했음을 

객관적인 사실 서술의 힘을 빌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탐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식민사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는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동아시아의 중국, 남아시아의 인도,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서아시아의 터키가 장차 세계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아서 코터렐은 예측하고 있다(2011년 기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이 예측이 현실과는 다소 어긋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세계의 중심이 다시 아시아로 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시아의 역사를 통해 아시아의 오늘을 읽고, 더 나아가 세계의 내일을 보는 비전을 갖게 해 주는 책이었다.


by 해피의서재 2014. 2. 1. 12:49


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신지수 지음
출판사
책으로여는세상 | 2011-10-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대한항공 A330 조종사가 3만 피트 하늘 위에서 들려주는 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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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들어 비행기와 조종사에 관한 이야기에 부쩍 관심이 생겼다. 여행과 일탈을 향한 열망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늘 떨치기 힘들기에, 그 열망을 해소하기 위해 ‘여행’그것도 ‘먼 여행’의 상징인 비행기와 공항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비행기에 관한 책도 몇 권 구해 읽었다. 물론 전문적인 책은 아니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비행기와 항공 종사자에 대해 이야기한 책들이다. 항공에 관심 많은 젊은 네티즌들이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하게 된 책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나의 아름다운 비행’이었다.


  책은 한 민항기 조종사가 비행 생활 중에 겪은 에피소드를 적은 9편의 에세이를 엮은 것이다. 각각 ‘눈(Snow)’ ‘기억’ ‘타깃’ ‘뺑뺑이’ ‘사냥’ ‘배달’ ‘위기’ ‘고통’ ‘어머니 대자연’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눈 오는 날의 이륙 준비(눈), 훈련생 시절 조종사 자격 심사비행을 하던 때의 기억(타깃), 악천후 속의 어려운 착륙(뺑뺑이), 화물기 운항에 얽힌 에피소드(배달), 조종석에서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한때 잃었던 초심을 떠올린 이야기(고통) 등 조종사로 살면서 보고 겪어 온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글 속에 풀어냈다.

 
  저자는 2013년 기준으로 입사 16년차를 맞이한 대한항공 소속 기장이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조종사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대학도 비행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경영학과로 진학했고, 역시 비행기와 관련 없는 육군으로 병역을 마쳤다. 모 대기업의 사무직 직원으로 취직도 했다. 그런 그가 27세 때 자신이 있던 곳을 과감히 뛰쳐나와 대한항공 직영 제주비행훈련원(현재는 폐지되었다고 한다)으로 들어간다. 이제까지 다른 이(특히 가족)들이 지정해 준 길을 벗어나, 정말로 자신의 적성에 맞고 자신이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고, 그 길이 바로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이후 긴 훈련 기간을 거쳐 그는 30세가 되던 해 대한항공의 정식 부기장이 되었고, 현재 에어버스 A330이라는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장이 되어 세계의 하늘을 날고 있다.


  ‘비행은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고 그는 책에서 고백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비행을 통해 진정한 자신과 삶의 의미,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끊임없이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행기의 모험(비행)과 귀환(착륙)에서 ‘우린 결국 원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 ‘타깃’편이라든가,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과 그의 피조물이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연의 위대함과 자비 앞에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어머니 대자연’편이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보통 민간 제트 여객기의 순항 고도가 3만 9천 피트 대인데, 이 정도 높이의 상공에선 산소는 희박하고 기압도 매우 낮으며 기온은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높은 하늘 위에서, 조종사들은 이 거대한 하늘에 비하면 더없이 자그마한 일엽편주 같은 비행기를 이끌고 고독한 비행을 하는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에 매년 건강검진과 엄격한 조종능력 심사를 거쳐야 하며, 끊임없이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때로는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며, 갑자기 비행기를 ‘사냥’하는 자들의 타깃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개중에는 정말 목숨을 잃은 조종사들도 있다. 그들을 위한 글도 이 책에 실려 있다. ‘앞서 간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기억’편의 마지막 문장이나, ‘인간은 비행기를 사냥해선 안 된다. 죽이기 위한 사냥은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사냥’편을 읽으면서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부연하자면 ‘기억’편은 1999년에 중국에서 일어났던 화물기 사고를, ‘사냥’편은 2001년 9.11 테러 당시 또다른 피랍기로 오인받았던 한 비행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듯 조종사의 삶과 애환, 그리고 4만 피트 상공의 하늘이 말해준 가르침들을 항공 전문 지식들과 버무려 감성적인 필치로 써내려간 저자는 책의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인 ‘어머니 대자연’ 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 비행기를 너무나 사랑하고, 내 동료들을 절대 믿으며, 내 승객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존경한다.’

 

  그 마음을 잃지 않는 한, 그의 비행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늘 아름다울 것이다.

 

<Remarks>

비행의 의미는 ‘나를 찾는 것’이었으며 착륙은 ‘나에게, 원래의 내 모습으로,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의 타깃은 거울에 비친 내 솔직한 모습이었으며, 나를 찾을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76쪽)

비행은 늘 마지막에 낮은 곳을 조준한다. 미래와 정상보다는 과거와 집을 지향한다. 이미 높은 곳을 마음껏 날은 비행기는 집으로 그리고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을 꿈과 모험의 피날레로 여긴다. (79쪽)
나는 내 삶을 살기 위해 안간힘 써 왔지만 그것은 사실 내 삶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내 가족과 함께 사는 내 모습이, 내 동료와 내 친구와 함께 사는 내 모습이, 그리고 내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사는 내 모습이 내 삶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228쪽)
고통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외치는 나의 울림이다. 집 떠난 내 영혼이 그 소리를 듣고 나에게로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229쪽)
모든 개체는 자연 앞에서 동등하다. ‘날개 달린 기계’역시 내 형제요, 내 친구다. 결국 당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다. 알고 보면 세상에 특별한 것은 없다. (257쪽)


by 해피의서재 2013. 9. 21. 09:51

 


터키에서 읽는 로마사

저자
곽영완 지음
출판사
애플미디어 | 2012-09-03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로마의 마지막 1000년 이야기!330년 콘스탄티노플 수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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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는 서기 476년에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그렇게 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학창시절 세계사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그렇다. 그러나 사실 로마는 그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후기 로마 제국은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고 동서별 황제와 그 부관격인 부제(副帝)를 각각 따로 두었다. 때로는 합쳐지고 때로는 다시 분할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들 모두 로마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연방 제도처럼 제국을 운영했던 셈이다.


  476년에 멸망한 것은 서로마였다.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건재했고, 이후 천 년 동안 세계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동쪽으로는 각자 흥망성쇠를 거듭한 이슬람 세력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뒤늦게 국가로서의 자리를 잡은 여러 이민족 국가들과 교황을 위시한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을 상대하며 오랜 세월을 버텨낸 국가였다. 그리고 서로마 지역이 이민족의 약탈과 파괴로 그간 쌓아 온 문화적 전통을 모조리 잃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로마의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 온 국가였다. 동로마 제국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갖고 있었던 로마의 문화 유산과 지적 자산들이 서유럽으로 전파될 수 있었고 이슬람의 확장으로부터 유럽 기독교계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던 동로마 제국의 세계사적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아울러 동로마 제국을 둘러싼 중동 지역과 서유럽의 민족들과 국가들의 역사적 부침(浮沈)까지도 세세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가족과 함께 터키를 여행하며 동로마와 그 주변 지역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역시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천 년간의 역사를 자세하게 풀어 준다는 점이다. 이슬람의 기원과 각 왕조의 탄생 및 쇠퇴 과정, 서유럽의 혼돈기와 각 나라의 형성기, 십자군의 등장 배경과 활동 과정 및 역사적 영향,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의 대처 등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유럽과 소아시아의 중세사를 간편하게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종교와 권력, 그리고 물욕이 인간을 얼마나 흉포하고 추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점이었다.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혀 발디디는 곳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흉포한 행태와, 오직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러한 십자군의 횡포를 방조하고 부추긴 교황 세력에 대하여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무지한 십자군의 무자비한 파괴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 속에서 기울 대로 기울어진 국운을 힘겹게 이어가는 동로마 제국의 고군분투는 그들과 관련 없는 국가에서 현대를 사는 나조차 안타깝게 했다.


  역사는 현대를 비추는 거울이라 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이 책 속에 기록된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종교와 민족을 명분으로 테러가 자행되고 전쟁이 발발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과 죽음을 면치 못하고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는 일들이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그 역사를 읽고 예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의 세계는 언제쯤 피와 고통으로 점철된 역사책들의 교훈을 따라, 옛사람들이 저질렀던 과오들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by 해피의서재 2013. 9. 21. 09:46

 


염철론

저자
환관 지음
출판사
현암사 | 2007-1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중국 고대 지성인들의 치열한 토론이 담긴 경제논쟁서 염철론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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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한 시대, 한 소제(昭帝)의 조정에서 소금과 철의 전매제를 둘러싸고 현직 관료들과 재야의 학생들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시작은 단순히 전매 제도를 지속할 것이냐 폐지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였지만

화제는 점점 확대되어 한 제국의 경제와 국방 정책, 세금 문제, 치안 문제는 물론

나중에는 국가의 통치 이념과 위정자의 도덕성 문제로까지 이야기가 번졌다.

어느 편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다소 공격적인 언사가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냥 막말만 주고받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고대 중국의 여러 역사적 일화와 고전 속 명문들이 수시로 인용되는 가운데 관료들과 학생들은 치열한 토론을 이어갔다.

이 토론은 훗날 환관이라는 인물에 의해 염철론이라는 책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져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마치 고대 중국판 ‘100분 토론을 보는 듯한 이 책은 화제별로 소제목을 나누어 양측의 의견을 교대로 서술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하나의 의제에 대하여 대부(현직 고위 관료)가 먼저 정부측의 입장을 말하면,

그 다음에 현량과 문학(재야의 유생들)이 정부의 의견에 반박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법가 사상에 기초한 현실적, 실용적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대부와

유가 사상에 기초하여 치국의 기본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현량-문학 간의 논리 대결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먼저 소금과 철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전적으로 통제하는 염철 전매제를 찬성하는 대부의 입장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흉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방비가 필요하며

그 국방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국고에 충분한 예산이 비축되어 있어야 하므로 염철 전매제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상공업의 발전을 중시하고 장려하는데, 이것 역시 유통을 발달시키고 백성의 부를 축적시켜

충분한 세금을 확보하고 군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 부양을 통해 국가가 충분한 돈을 확보하여 국방을 튼실히 해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가 평화롭고 백성들도 두루두루 잘먹고 잘살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들의 사상적 기반은 한비자, 상앙 등이 주창한 법가 사상에 있다.

 

유가 사상의 영향을 받은 현량과 문학은 이러한 의견에 반대한다.

관료들의 무리한 계획경제 정책과 상공업 장려가 백성들 간의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인간성이 돈에 밀려 소외되는 사회 풍조를 조장하며,

정부에서 소금과 철을 전매하고 계획경제 정책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부패한 관료들이 백성들을 착취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나라의 도덕적 기강까지 무너뜨리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유가 사상의 기본으로 돌아가 위정자의 도덕적 문제부터 바로잡고,

백성들에게는 농업과 자급자족을 권장하여 혼자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끔 생계를 안정시키고,

국가는 전매제를 폐지하고 민간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마디로 괜히 백성들의 삶에 개입해서 폐 끼치지 말고 백성들이 각자 할 일을 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전혀 상반된 생각을 가진 두 집단은 토론 내내 계속 날선 대립을 이어간다.

대부는 현량과 문학을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비판하고

현량과 문학은 대부를 윤리를 무시하고 물질만을 좇는 탐욕주의자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쨌든 두 집단 사이에 오간 대화는 매우 진지하고 품격있는 것이었으며,

내세우는 실질적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측 모두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애초에 그런 진지한 고민이 있었기에 조정에서 관료와 유생이 한데 모여 토론하는 이러한 자리가 마련될 수도 있었으리라.

 

이 토론을 책으로 정리한 환관은 이때 토론에 참여하였던 문학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기초하여 정리를 했다고 한다.

그 자신 또한 문학의 편에 가까웠으니, 사실 염철론은 현량과 문학의 의견에 좀 더 기울어져서 서술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문학의 날카로운 비판에 대부가 당황하거나 아무 말도 못하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러나 대부의 말에 문학이 말을 잃었다는 부분은 없다.

서술자가 완전한 공평을 기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유념하고 읽을 필요가 좀 있을 것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3. 7. 15. 17:26

 


오르한 파묵

저자
이난아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4-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국내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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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광의 중심에 있었으나 점차 그 옛 명성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락해 간 침잠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세상의 변방에서 살아가는 분노와 우울을 딛고 마침내 문학의 힘으로 그의 도시를 세상의 중심으로 옮겨놓은

터키 문학의 거장 오르한 파묵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한 책'.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전담 번역해 온 터키 문학 전문가 이난아의 시선으로,

그의 팬이자 전담 번역가이자 연구가이자 사적인 친구로서 지켜본 오르한 파묵의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 그의 각 작품들에 대한 탐구, 창작에 임하는 자세와 철학, 번역가 이난아와의 인터뷰와 또다른 사적인 면모 등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한 번에 답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이 어느 정도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명의 작가에 대해 그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모두 정리한 책 자체도 사실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그 점에서 이 책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은 오르한 파묵의 생애에 대한 개관부터 시작하여

그의 데뷔작(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부터 최신작(순수 박물관)까지 7편의 소설과 1편의 에세이(이스탄불)를 각 챕터별로 상세히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최신작 <순수 박물관>의 집필 과정과 실제로 이스탄불에 세워진 박물관의 개관 준비 과정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파묵과 그의 고향 이스탄불의 관계에 대하여 정리하는 글과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인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늘로 우물 파듯', 매일 아침부터 매일 저녁까지 한 자리에 앉아 마치 부지런한 직장인처럼 늘 부지런히 글을 쓰는 그는,

'글을 쓰는 그 자체가 행복이자 위안이어서, 그리고 글쓰기가 곧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쓴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생 수도승처럼 하루종일 방 한 구석에서 글만 쓰면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

문학에 대한 파묵의 철학을 알고 싶다면 책의 중반부 '검은 책'에 대한 인터뷰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좋을 것 같다.

 

"문학이 화염 속 세계를 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는 문학 속에서 심오한 어떤 것과 휴머니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휴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문학이지요. 하지만 나는 문학이 세계를 구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실효성에서 보았을때, 사실 다소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중략) 문학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략)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이 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깊이에 빠지고 싶고, 그 세계에 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그저 문학을 통해, 또 내가 쓰는 소설을 통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싶을 뿐이지요."(p.97-98)

 

<안나 카레니나> 등 19세기 소설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 가족소설에서 출발한 파묵의 작품 세계는,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성향을 받아들여 다양한 장르(세밀화, 신문칼럼, 시, 연극 등)와의 콜라보레이션과

기존 소설 구성의 해체(챕터마다 제각각의 화자가 제각각 말을 하는 <고요한 집>, <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등),

이슬람 고전문학과의 퓨전(<검은 책>에서 현대 문학의 포맷 안에 이슬람 고전문학을 각색하여 접목한 것) 등

파격적인 형식적 실험들을 도입한 작품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실험의 틀 속에 담겨 있는 파묵의 이야기는 그가 살아온 이스탄불의 역사와 현대 사회상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고요한 집>과 <새로운 인생>, <눈> 등의 작품에서 격동과 혼란의 터키 역사와 사회상의 변화를 캐치해 녹여넣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 시대에 대한 담담한 관찰 외에 그 시대에 대한 연민과 비판의식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파묵의 소설 대부분은 '환상적이고 유희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고 역사적이다'(p.114).

 

"소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낙관적인 형태로 열려 있고, 세상을 질책하기보다는 인정하며,

의심하기보다는 삶의 경이로움에 동참하라고 호소합니다." (p.132)'

 

책의 뒷표지에는 이 책의 본문 일부가 프린트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변방에 살면서 느끼는 고독과 과거에 대한 굴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주변에 대한 분노가 가끔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때 주변의 폐허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존재하고 있을 한 권의 책을 가능케 한 것은, 책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책 속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야기를 지은 존재는 행복했으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영광 속에서 기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스스로를 변방보다 더한 집필실의 고독과 영감으로 유폐시킨 작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고향의 역사와 오늘을 문학의 힘을 빌어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이세상에 남기고 싶어한 작가 파묵의 내면을 잘 표현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by 해피의서재 2013. 7. 1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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