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증폭사회 / 김태형 / 위즈덤하우스, 2010


1년 전 읽었던 이 책을 새삼 다시 꺼내 든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병리를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살핀 이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간략히 정리하자면
지금 이 사회,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국사회가 이 책의 제목처럼 '불안증폭사회'가 되어 있다는 것과,
그 불안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유포시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불안을 깨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신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불안증폭사회>는 우리 사회가 심각한 정신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책에 따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이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다.
"이게 다 IMF 때문이다!"라고.
IMF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기조가 쓰나미처럼 한국 사회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사회안전망도 마뜩찮고 학벌주의 등 기저에 상당한 사회병리적 증상이 깔려 있던 우리 사회가
더욱 극심한 상황으로 밀려들어갔다는 것이다.

고용안정 등 그나마 존재하던 사회적 안전장치가 하나 둘 풀려나갔다.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정부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건실한 노동에 따른 소득보다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돈 놓고 돈 먹기'식 금융투자에 따른 소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돈이 있는 부자들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부를 더욱 축적해 갔고, 그럴 여력이 못 되는 중산층은 급속도로 서민층으로 급강하했다.
'돈 놓고 돈 먹는 경제'에 고용이 늘어날 리가 없다.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사업 확장을 제한하고 기업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사회적 부의 분배를 추구하는 정책은
시장경제에 배치된다 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한다.
이와중에 그 권력을 제한받지 않는 대기업들은 동네 상권까지 무차별적으로 접수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대기업의 물량공세에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직장도 쉽게 얻을 수 없고, 어렵게 얻은 직장도 언제 잘릴지 모르고,
실업자가 되었을 때 생계와 재취업에 도움을 줄 공신력 있는 기관의 존재도 기대하기 어려우며,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부와 권력을 쥔 자와 그에 연줄을 댄 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Winner takes it all'의 사회에서,
게다가 이런 아수라장을 극복해 보겠다고 나섰던 정치인이나 사회적 명사들이
좌절하거나 변절하거나 원래 그들과 이(利)를 같이하는 사람들임이 드러나는 것을 수 차례 목격한 시민들은,
이제 세상의 변화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예 기대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힘만으로 이 정글같은 세상을 헤쳐가려 한다.
맞벌이를 뛰고, 미친듯이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입시학원을 2~3군데씩 보내고...
그러나 그 삶이 결코 행복할 리 없다.
이렇게 쫓기듯이 살아도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빚을 동원해 가며 겨우 확보한 작은 아파트 한 채와 고학력 실업자가 된 자녀뿐이다.
평생 아등바등 살았건만 주어지는 소득은 그 사력에 가까운 노력에 비하면 너무나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미 한국인들의 삶 자체가 소박한 행복이나 순수한 욕망의 충족 같은 건 생각할 틈이 없는, 
오직 생존을 위한 사투로 점철된 것이 아닐까.
오직 돈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갑옷'인 시대에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회안전망도,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는 살벌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의식 때문에.
마치 값비싼 노스페이스 점퍼를 걸쳐야 왕따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청소년들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런 한국인들의 심리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보고 있다.
생존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한국인...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언제 나락으로 추락할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
한 번 추락하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는, 패자부활전이 전혀 없는 사회.
좌절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는데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도가 없다.
맨정신으로 살아갈 자신을 잃은 사람들은 술이나 사이비 종교 등에 중독되거나, 혹은 차라리 자살을 택한다.
가정불화와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덩달아 성정이 강퍅해진 아이들 사이에서도 폭력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비틀린 사회가 온갖 사회적 병리 현상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팍팍한 삶과 살벌한 사회에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OECD 중에서 최악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국가가 되어 버렸다.
<불안증폭사회>의 저자는 이것이 한국인 멸종의 전조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있던 사람들은 죽어가고,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 없다면,
한국인의 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종국에는 멸종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인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런 살인적인 사회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멸종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회를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풀죽어서 환경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은 '먹고살기 바빠서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며,
'먹고살기 바쁜'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언제 최하 빈민층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안을 부추기는 것은 다름아닌 '승자독식'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사회 기득권층과 그들에게 장악된 언론들이다.

시민들이 불안과 좌절의 노예로 살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며 산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당에 자포자기성 표를 던지고,
막장드라마를 욕하며 보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하고 초라한 현실을 애써 잊고,
생활고에 서로 눈치 보여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성적 일탈을 감행하고,
아주 어려서부터 집단생활을 시작하며 정작 부모의 따스한 사랑을 독차지할 시간을 얼마 누리지 못한 아이가
어느 날 히키코모리나 학원폭력 가해 학생이 되어 TV뉴스에 등장하는 우울한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개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불안증폭사회>의 저자는 이런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존재는 시민들뿐이라고 말한다.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절대 유리한 이 체제를 스스로 버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경험이 있는 만큼
현재의 시민들에게도 충분히 그만한 저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안증폭사회'의 해결책으로 저자는 서로의 마음 속에 들어앉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기 위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활동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한동안 사회적 화두였던 '연대'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책의 내용과 표현 등이 상당 부분 과격한 면이 있다. 사족같은 부분들도 종종 보인다. 
민족 얘기나 한국인의 멸종 같은 표현은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불안에 잠식당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내면 역시 만만치 않게 불안이 깊었던 모양이다. 

책이 처음 출판된 시기가 2010년 11월이다. 나는 이 책을 발행 3개월만인 작년 1월에 처음 읽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 같은 책을 다시 읽으며 우리 사회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의 저자가 울분에 가까운 문장을 토해내던 그 때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by 해피의서재 2012. 2. 13. 20:48

하얀 성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2011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무력하고 슬퍼 보이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에 수치스럽고 화가 나고 죄책감이 들고 슬퍼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슬퍼하며 죽어가는 동물을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나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데에 익숙해진 것처럼,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생각을 깨닫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과 못생긴 입과 연필을 쥐고 있는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p.195)


터키 함대에 사로잡혀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스탄불로 끌려와 한 학자의 노예로 살게 된 한 베네치아 인이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되뇌는 독백 중의 일부이다
. 여기서의 는 세간인들에게 호자(Hoca)’라고 불리던, 베네치아 인의 옛 주인을 말한다.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세상을 객관적인 과학에 입각해 바라보고 싶어했으며, 어린 파디샤의 마음을 사로잡아 권력을 쥐고 자신의 과학관과 신념을 당대의 오스만 제국에 이식하고 싶어했으나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절망하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베네치아 인 노예가 가진 서양 과학 지식에 더욱 집착했고, 그래서 더욱 자신이 처한 당대의 이스탄불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래서 당대 사람들에 대한 조소와 연민 사이에서 갈등했던 사람.
 

졸지에 낯선 땅의 노예로 끌려온 베네치아 인은 자신의 주인이 된 이 호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관찰한다.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그 외모가 마치 거울처럼 서로 똑 닮았다고 한다. 마치 또다른 자신과 함께 사는 듯한 기분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 파디샤의 명을 수행하며, 때로 서로를 질시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다가 서서히 서로에게 녹아들어간다. 책상에 마주앉아 각자의 옛 과오에 대한 고백을 서로 채근하며 써내려가던 시절부터 이미 두 사람은 서로의 운명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탄불에서 함께 잔치용 폭죽을 만들고
, 어린 파디샤를 알현하고, 흑사병을 퇴치할 방도를 찾고, 능력을 인정받은 호자가 황실 점성술사에 오르는 동안에,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점차 서로를 닮아가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가고 있었다. 짧은 소설임에도 근 수십 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긴 세월 속에서 호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든다는 명분 하에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점점 서양 과학 속으로(혹은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고, 베네치아 인은 갈수록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호자를 대신해 파디샤의 궁을 드나들며 오스만의 고관대작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린다. 호자가 그토록 무시하고 비웃고 조소하던 사람들이지만 베네치아 인에게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수준의 인사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호자가 만든 무기가 실제 전장에서 아무 효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 베네치아 인이 그 책임을 둘러쓰고 살해당할 처지에 이르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완전하게 서로의 운명을 바꾼다. 호자는 베네치아 인의 차림으로 유럽으로 떠나고, 베네치아 인은 호자가 되어 오스만 제국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든 베네치아 인은 자신과 호자의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긴다
. 어린 시절 살던 베네치아의 옛 집 정원을 그대로 재현한 정원이 딸린 오스만 제국의 자기 집에서.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과 호자의 삶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오르한 파묵은 어린 시절
,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그와 삶을 서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외모가 똑같으니 누가 누구인지, 서로 바뀌었는지 어땠는지 주위 사람들은 전혀 인식할 수 없을 테니까.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을 그런 상상을 그는 기어이 소설의 힘을 빌려 구현해 냈다.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책 속에서나마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들만의 특권일까. 그래서 <검은 책>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글쓰기라는 말이 나오나 보다. (정확한 문장은 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가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 지금 내가 사는 삶보다 더 나은 모습일까. 그런데 그 삶은 어차피 내가 사는 삶이 아닌데, 더 낫든 더 낫지 않든 더 이상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일까. 반대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면 나는 그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삶은 내 것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인 건 맞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 왔던 내가, 사실은 원래의 내가 아닌지도 모른다. 남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 이미지가 사실은 내 본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괜히 오싹해진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니, 어느 시공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든 나는 끝내 본연의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검은 책>의 이야기 속 왕자처럼 모든 것을 배척하며 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답은 내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운명까지도 모두 내 것으로 묵묵히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파묵도 어쩌면 그런 뜻으로 이 글을 쓴 것일 게다.

분량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주는 책이다.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즈가 작가를 극찬할 만하다.


by 해피의서재 2012. 1. 30. 11:58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2005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시기의 나는 내 마음의 갈피를 도통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한마디로 삶과 열정을 쏟을 무언가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항상 어딘가 공허했고 알 수 없는 갈증이 났다. 대체 내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뭔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사실 문제는 나 자신의 삶의 태도에도 상당 부분 있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무한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무력하게 지워갔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나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종일 도서관에 앉아 되는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들어 되는대로 뒤지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돌아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용기도, 자신감도, 도전정신도, 진득한 끈기도, 열정도 갖고 있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도서관 서가 한켠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노트에 감명깊은 구절들을 베껴적었다. 그 후 생각날 때면 책을, 또는 노트에 적어둔 구절들을 다시 펴서 보곤 했다. 

누군가 네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 이 책을 꼽겠다. 내가 갖고 있던, 그리고 지금도 해소하지 못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요동치게 해 준, 그리고 지금도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가.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내.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불화하고,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을 견뎌야 했던 인생. 800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 유화 한 장 정도. 불행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축복이라면 유일하게 그를 알아 주었던 동생 테오의 존재와 만년에 그의 그림을 인정해 준 평론가 몇 명이 전부일 것이다.


참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도리어 그의 삶이 참 행복해 보였다. 이게 웬 미친 소리냐고?


자신을 오롯이 던질 곳이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잊고 오직 한 곳에 자신의 열정을 바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을 곳이 있었으니까.


그는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다.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사색과 고민을, 그리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그가 남긴 편지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특히 테오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흐의 자부심과 열정이 녹아 있다.


그는 화가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다. 정신병 발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지키는 데 충실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신념을 절대 꺾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건 어떻게 여기건, 자신이 스스로 접하고 느껴서 가치있다 판단하면 거침없이 그 판단에 따랐다. 그는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경외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동네 일가족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비록 그 그림들이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꿋꿋이 자신만의 화법으로 자신이 사랑한 자연과 사람들을 치열하게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의 치열함이 새겨진 그림들은 불멸이 되었다.


그는 적어도 밍숭맹숭하게 살지 않았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고 있던 그 시기의 내게 고흐가 남긴 영혼의 편지들은 내 태만한 영혼을 깨우는 죽비소리가 되었다. 그 책을 처음 손에 든 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책은 내게 그런 존재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아직도,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고흐가 남긴 편지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내가 남기는 글 속에서 훗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나를 보게 될까. 열정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지켜냈던 사람의 초상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살다간 허망한 그림자의 흔적일까.


by 해피의서재 2012. 1. 9. 21:24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2010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노교수가 있다. 춤추기를 좋아했으나 루게릭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가 이제 춤은 고사하고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가기조차 불가능해져 간다. 무력한 육신에 갇힌 채 죽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노교수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죽음을 가치있는 일로 승화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죽음을 생의 마지막 연구 프로젝트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가 있다. 피아노 연주가가 꿈이었으나 결국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스포츠 언론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무엇을 위해 왜 뛰는지도 모르는 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간다. 일과 소비가 전부인 삶을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날 TV방송에서 옛 은사의 인터뷰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린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이 교수와 제자가 14번의 화요일마다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교수의 이름은 모리 슈워츠, 제자의 이름은 미치 앨봄이다. 책은 죽음을 앞둔 모리와 그를 화요일마다 찾아오는 미치의 대화 사이에 미치의 대학 시절 기억들을 교차시키는데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교차편집을 보는 듯한 효과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사제의 이야기가 오랜 시간을 넘나들며 한데 연결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모리와 미치가 나누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 자기 연민, 후회, 죽음, 가족, 감정, 나이듦, 돈, 사랑, 결혼, 문화, 용서, 의미있는 삶 등.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제들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 모피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모리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의 땀으로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결국 교수의 길을 택한다.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모리의 가르침은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미치에게 들려주는 말들 하나하나가 삶에 대한 위로이자 새겨야 할 교훈인데,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네.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걸 굳이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해."

"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 그래서 마음을 상하면서도 상처받지 않아야 하는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이기는 건 언제나 사랑이며,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다."


"살아가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를 발견해야 해.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의미있는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둘러싼 지역 사회에, 그리고 자기에게 목적과 의미를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데 있다. 거기엔 돈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연민을 가지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낀다면 세상은 훨씬 좋을 곳이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일정한 공식이 없다. 양쪽 모두가 공간을 넉넉히 가지면서 넘치는 사랑으로 협상을 벌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다. 자기 상황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황에도 마음을 쓸 때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더 마음을 열고, 광고로 인해 만들어진 헛된 가치에 유혹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생애 마지막 이야기인 양 관심을 기울여라. 그리고... 인생에서 '너무 늦은 일' 따윈 없다.."



미치는 화요일마다 모리를 찾을 즈음, 일하던 신문사가 파업을 하면서 일손을 놓은 상태였다. 일중독자처럼 살아왔던 미치에게 ‘일이 없고’ ‘자기를 찾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닥친 셈인데 이때 미치는 심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워한다. ‘나 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는 사실에 경악해 버렸다’는 문장이 이를 대변한다. 그런 미치에게 모리의 말들은 마음의 위안이자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미치가 속한 스포츠 언론계는 자극적인 상업문화가 넘실거리는 곳이다. 치열한 경쟁이 상존하고, 조금이라도 밀리면 나가떨어지는 살벌한 곳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이 공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도 주택, 차, 생필품 등만 생각하며 끊임없이 소비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삶을 관조하며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건지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방송국에서 모리를 찾아와 3번에 걸쳐 인터뷰를 한 것(첫번째 인터뷰 덕에 미치는 모리를 찾게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후에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 것은 바로 삶을 담담히 관조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결국은 죽는다. 살아서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어떤 화려한 삶을 누렸어도 죽고 나면 한 줌의 재와 제 이름이 새겨진 묘비 하나만이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오늘도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그래서 의미없는 크고작은 싸움을 벌이는가.


누군가가 말했다. ‘이 짧은 세상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헛된 가치에 유혹되지 말고 나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충실하며 사는 것,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 내가 보고 또 누리고 있는 이 자연에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죽음 앞에 내 삶이 당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by 해피의서재 2011. 12. 26. 13:15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굳이 정제된 독후감을 쓰고 싶단 생각이 전혀 없어졌다.
그러니 읽고 느낀 것을 그저 내키는대로 마구 써내려가 보련다.

책 속에 길이 없고 종교에 길이 없고 국가에 길이 없고 이념에 길이 없다.
중요한 건 단지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에 얼마나 몰입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인생의 해답도, 진리도 오직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삶에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그런다고 그들이 나를 구원해 줄 수도, 그럴 리도 없지 않은가.
경건한 신앙으로 치장하고 그 속내는 곪아터져 가고 있을 뿐인 산중의 정교 수도원에도 구원은 없었다.
터키와 그리스가 박터지게 싸운 끝에 크레타는 터키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이 전장에서 죽인 터키인과 조르바가 찾아가 산투르를 배운 터키인은 서로 차이가 없는 다같은 인간이었다.
불교에 몰두하는 그리스의 지식인 청년이 그토록 죽어라고 읽고 쓰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삶의 진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인간을 종교와 국가, 이념, 그 외 모든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거침없이 노래하고 춤추고 산투르를 연주하고 일하고 놀고 여자와 자고 하며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지식인 청년은 '대지로부터 이어진 탯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이 야성적인 사내에게서 비로소 삶의 자유와 행복을 발견한다.
따지고 보면 역사는 골치아프게 머리 굴리고 이상한 지식을 만들어 내고 거기서 새어나온 이념이란 것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속박한 시간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조르바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사람을 위시하여 이세상의 모든 존재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거침없이 살아가는 조르바.
우린 그 사람처럼 살 수 없을까?
어려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엄청 쉬운 것 같은데.
자유라는 것도 사실 그렇게 누리기 어려운 것이 아닐 텐데.
그래 그냥 다 놔 버리는 거다. 모든 속박과 집착을 놔 버리고 이세상 모든 것을 난생 처음 본 것처럼 신기하게 바라보고 어울리고 같이 놀자. 세상 모든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사물이 내 친구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노닌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참 간단한 일 같은데 현실에서 이러다간 미친X 취급 받겠지?
아니 조르바는 저런 걱정 따위 일절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마음 가는대로 산다.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를 세우고서.
그가 참 부럽다.
그래 인생 뭐 있어??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이 공허한 세상. 철저하게 오늘을 살자. 오늘만 생각하자. 나를 사랑하고 세상 모두를 사랑하자.
그리고, 자유를 누리자. 그게 전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생에 걸쳐 인간 영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화두로 삼았다 한다.
소설의 주인공 조르바가 그런 그에게 강렬한 가르침을 준 실존인물이고.
그의 묘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한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저 묘지명이 참으로 강렬하게 오버랩된다.


by 해피의서재 2011. 10. 23. 13:58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 오르한 파묵 저,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

최근 터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덩달아 이끌리게 된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오르한 파묵이었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터키 최초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가 《내 이름은 빨강》의 작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터키 여행 중에 가이드가 해 주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그가 터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시간 날 때마다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고
인터넷서점에 올라와 있는 네티즌들의 독후감을 열심히 찾아보면서 이 작가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저작 한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여러 작품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눈에 띈 책이 바로 이 《이스탄불》이다. 
파묵은 '이스탄불 작가'라고도 불린다 한다. 이스탄불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고향이자, 평생에 걸친 그의 화두이다.
8편의 장편소설 중 이스탄불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도시 카르스를 배경으로 한 《눈》뿐이다.
최신작인 《순수 박물관》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탄불이 배경이다.
(심지어 이 소설의 소재인 '순수 박물관'은 아예 이스탄불에 그 실물이 들어섰다.)


파묵의 소설을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먼저 이스탄불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가 왜 그토록 이스탄불에 천착하는지, 이스탄불은 대체 어떤 도시인지,
그 도시에서 파묵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왔는지
미리 알고서 다른 저작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게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이스탄불》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아주 어린 아기 때부터 23세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까지,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이 보고 겪은 개인사와 단상,
그리고 언제나 그 배경이자 무대였던 '영원한 고향'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쉼표를 사용한 단어의 열거가 많고, 만연체이다 보니 쉽고 편하게 읽힌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게다가 교정 과정이 꼼꼼하지 못했는지 중간중간에 한두 글자를 빼먹은 듯한 오타가 눈에 띈다.
물론 많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한 개씩 나오는 정도이긴 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사람이나 꼼꼼한 사람이라면
좀 거슬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용도 다소 어렵다. 난해하다기보다는 평소에 접해 보지 않아 생소한 얘기가 좀 많다.
레샤트 에크렘 코추라든지 탄프나르라든지 하는 터키의 작가들 이름이 나오는데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들이라서.
그 외에도 여러 생소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나오는데(플로베르 같은 익숙한 서유럽 작가의 이름도 나오지만),
그들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아무래도 19세기 말~1970년대 초까지의 터키와 서유럽의 문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많아 
읽기에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 두꺼운 책에서 참 감명을 많이 받았고 동질감도 많이 느꼈다.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 그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명멸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그 시절의 나와 참 많이 비슷하단 동질감이 느껴져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람도 나처럼 마음 속에 공상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 또다른 판타지를 안고 살았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위 사람들과 완전히 섞이거나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처럼 주위를 빙빙 맴돌며 자괴감도 느끼고,
되레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낯선 거리를 홀로 정처없이 헤매는 것을 좋아하는 면에서 묘한 동지애를 느낀 때문일까.


요리사와 가정부가 있고, 고모댁, 삼촌댁 등 친척들과 함께 한 아파트를 다 차지하고 사는 부유한 집안.
(집안 어른들이 재산으로 아파트를 직접 짓고 그 현관에 자랑스럽게 '파묵 아파트'라고 명패를 써붙였다 한다)
그러나 집안은 그리 화목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계속 재산을 날렸고 집안은 점차 가난해져 갔다.
부모간의 불화도 잦아졌고, 급기야 부모가 어린 아들들을 친척집과 외가에 맡기고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사태도 벌어진다.
파묵 아파트와 지한기르의 외가,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보스포러스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아이의 머릿속에는
'이스탄불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를 자신의 도플갱어와, 집밖 보스포러스 해안에서 잊을 만하면 터지는 화재 사고와 폭발 사고, 그리고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기묘한 살인사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상상' 등으로 구성된 '두번째 세계'가 끊임없이 명멸한다. 음울한 상상과 책읽기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 소년의 눈에 비친 '시티 오브 이스탄불'은...


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잃고 흐르는 시간 속에 서서히 빛 바래고 무너지고 사라져 가는
쓸쓸하고 서글프기 짝이 없는 애잔한 풍경이었다.


풍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완전한 이슬람 영역권도 아닌
이 '어중띤' 도시에 대해 쓰여진 여러 작가들의 글들 역시 이 이스탄불의 어린 소년에게 심란함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서양의 작가들은 그야말로 여행자의 시각에서 이스탄불의 신비스런 느낌을 강조한 글을 써내려갔고,
터키 현지 작가들은 서유럽에 대한 동경과, 그런 동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스탄불의 현실과,
뒷골목 사람들의 전통적인 터키식 라이프에 대한 찬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묵이 훗날 이스탄불에 대해 썼던 4명의 작가를 일컬어 '나의 슬픈 작가들'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정처없이 방황하는 도시와, 그 도시를 닮아 덩달아 갈팡질팡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고요하다 못해 침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 일상이 빚어내는 퇴락한 길거리와 바닷가의 풍경들까지.

회색빛의 이스탄불은 그렇게 어둡고 서글픈 도시였다.

그러고보니, 한 달 전 딱 하루밖에 머무르지 못하긴 했으나 이스탄불에서 활기찬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그러나 왠지 밝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도시.
그땐 단순히 날이 흐려서려니 했는데, 파묵이 말한 '비애에 침잠한 도시'가 바로 그것이었을까.


젊은 오르한 파묵 역시 이 우울한 도시의 공기 속에서 더불어 우울하게 성장해 간다.
그 시절의 청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학교생활에 영 재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선생들에게서도 전혀 존경심을 느낄 수 없어 결석이나 일삼고 부르주아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나 하는 고등학생 파묵. 언제부턴가 정해진 길인 '이스탄불 공대 건축학과'로 순순히 걸어들어가긴 하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한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길이었던 그림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그의 첫사랑이 떠나가 버린 후로는 그림마저도 그를 달래 주지 못한다.
('딸이 술주정뱅이 화가의 누드모델 아내가 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스위스로 보내 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쓰라린 가슴을 안고 이스탄불의 퇴락한 뒷골목을 헤매고, 배를 탄 채 할리치 만을 떠돌며 마음을 달래는 동안에 
그는 자기 안에 맺힌 슬픔을, 그리고 그에게 슬픔과 영감을 동시에 준 이 도시의 영혼을 글로 토해내야겠다는 생각을
서서히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가난과 퇴락과 침울 속에 잠겨 예술 따위 크게 쳐주지도 않는 이스탄불에서
어찌 화가가 되어 가난한 삶을 자초하려 드냐는 어머니의 충고(...)에,

"다시는 건축대학에 가지 않겠어요.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
라고 외치는 파묵의 말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스탄불의 과거와, 그 정체성과, 그 도시를 그려온 화가와 작가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 성장한 한 청년의 내면풍경이 모두 담긴, 
이 두서없는 듯 기묘하고 몽환적인 고백록은 책 속에 실린 흑백 사진들과 함께 묘한 중독성마저 선사한다.
이 책을 읽은 한 네티즌은 '이스탄불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같다'고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안 읽어봐서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 말에 수긍하고 싶어진다. 그냥 왠지 서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 것 같아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후에 보이는 것은 예전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언젠가 다시 이스탄불을 찾을 것이다. 그땐 이번처럼 허겁지겁 겉만 핥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홀로 여유로이 걸으며 다시 본 이스탄불은 처음 찾았을 때 아무 생각없이 보았던 그 풍경과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비애의 안개가 보스포러스의 물결 위를 유령처럼 유영하는 이스탄불에서,
오르한 파묵이 말했던 슬픈 도시의 영혼이 그땐 내 눈앞에 선연히 보일 것만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1. 7. 3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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