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예의 / 권석천 / 어크로스 / 2020

경력 30년차 기자가 그동안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사건들과 사회 이슈들, 그리고 기자이자 직장인으로서 살아 왔던 궤적을 돌아보며 써내려간 칼럼들을 한 편의 책으로 엮었다. 유명한 영화를 인용해 글을 풀어가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이나 사건, 정당을 내세운 짧은 소설이나 가상의 편지 형식으로 쓴 글도 있다. 기존의 칼럼 양식을 최대한 배제한 자유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추구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정도면 괜찮은 인간인 줄 알았던 나 자신’이 사실은 이 뒤틀려가는 한국 사회 앞에 얼마나 하찮고 비겁한 존재였는지를 토로하며, 온갖 사회 병리 속에 각처에서 인간성이 무참히 짓밟히는 202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일면들을 선명하게 지적한다. 책 속 곳곳에 현재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진지하게 귀기울여야 할 중요한 진언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형식적 파격에 신경쓴 나머지 그래서 결론이 뭔가 싶은 글도 몇 편 있지만, 그 외에는 거의 손색이 없는 좋은 사회 에세이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일독할 수 있길 기원한다.

<책 속 문장들>

누가 대신 책임져 주느냐는 반문이 사회 윤리로 굳어지면 힘 있는 자가 모든 걸 먹어치우는 약육강식의 세렝게티 초원이 펼쳐진다. 누가 미끼에 걸려 피해를 입었을 때, 그 책임을 당사자가 지라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잔인한 요구다. 그 요구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점을 교묘하게 은폐시킨다.
불행이 엄습했을 때, 범죄와 혐오의 대상이 됐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책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과 범죄와 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32쪽)

악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 보존의 법칙일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의 불특정 다수다. (...) 거리에서 분노를 풀 용기조차 없는 자들은 아내와 자녀에게 푼다. 한국 사회에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가 넘쳐나는 이유 중 하나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다시 학교에서 분노를 배설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폭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폭력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보자는 것이다. (41쪽)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쉽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어떤 관계든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는 적정 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50쪽)

사회적 기억은 보다 정밀한 조작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른바 ‘가짜 뉴스’가 겨냥하는 게 바로 사회적 기억입니다. 가짜 뉴스들이 쌓이고 쌓이면 진실이 뒤틀리고, 뒤틀린 진실들이 모이면 역사가 됩니다. 그래서 정치 세력들은 사회적 기억을 놓고 치열하게 갈등하고 대결합니다. (63쪽)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악이 거악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닌가. 거악은 한두 사람의 악인이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의 작은 악들이 모인 결과가 아닌가. (127쪽)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믿는 것들이 주변의 영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사무실에,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 공기처럼 떠다니는, 크고작은 편견의 미세먼지들이 뭉치고 뭉쳐서 내 가치관이 되고, 신념이 된 것은 아닐까. 그 가치관과 신념이 얼마나 균형감각 있고, 상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42쪽)

나는 “법전에 있는 대로 헌법이 지켜지고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헌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면 힘이 있다는 이유로, 돈이 많다는 이유로, 그 무수한 ‘갑질’이 왜 일어나는가. ‘유전무죄’와 전관예우, 그리고 금수저/은수저/흙수저의 계급은 또 무엇인가. (166쪽)

폭력의 위력은 단지 통증에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인격에 모멸감을 갖게 한다. 자신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고, 언제라도 무릎 꿇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자각은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폭력은 아무 수식어도 필요 없다.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206쪽)

한국에는 자신이 의식하든 못 하든, 유능한 공포 기획자들이 많습니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오고, 번듯하게 차려입은 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공포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우릴 지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더 섬뜩한 것은 그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의도 없이, 그래서 망설임도 없이 근면 성실하게 성공의 사다리를 기어오를 뿐입니다. (244쪽)

폭력은 결코 ‘인간적인 반응’이라고 부를 수 없어. 인간적인 반응이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반응이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슬퍼하고, 남의 행복에 즐거워할 수 있어야 인간은 인간이 되는 거야. (306쪽)

법 논리와 법 감정은 서로 연결돼 있고, 함께 진화해야 한다. 법 감정은 앞서 가는데 법 논리가 제자리걸음을 한다면 그 사회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법 논리는 어떻게든 법 감정을 설득해 편차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318쪽)

정의는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 완전하지 않다고, 결함이 있다고, 그들을 조롱하거나 비켜가서는 안된다. ‘순수한 피해자’라는 도식은 피해자의 발언권을 박탈하려는 수작이다.
정의는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지만 사람들 마음 속에 살아 숨쉰다. 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해야 하는 건 결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정의다. (320쪽)

by 해피의서재 2020. 8. 9.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