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 콘서트 / 이광식 / 더숲 / 2018(개정증보판)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빛의 속도로 무한 팽창을 계속해 가고 있다. 수많은 별들이 탄생과 죽음의 윤회를 거듭하고, 수천억 은하들이 광막한 우주공간을 비산한다. 그 무수한 은하들 중 한 조약돌인 우리은하 속에서 태양계는 초속 220km로 그 변두리를 순행하며, 지구라는 행성은 또다시 초속 30km로 태양 주위를 순행하고 있다. 원자 알갱이 하나도 제자리에 머무는 놈 없는, 그야말로 일체무상의 대우주다.”(394쪽)

지구의 모양과 크기를 재고, 지구로부터 태양-달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며, 항해와 역법 계산을 위해 별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 천문학은 점차 수학과 물리학, 관측술의 발달에 힘입어 점차 태양계와 그 너머의 천체, 그리고 우주 전체의 구조와 성질 그리고 기원에 대한 규명을 시도하는 학문으로 나아갔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을 거쳐 아인슈타인과 허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이 일생을 바쳐 이뤄나간 천문학 이론의 발달 연대기가 책 속에서 그들의 인생 이야기와 함께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제 현대에 이르러 우주는 태초의 대폭발과 계속되는 팽창 속에서 수소와 헬륨 등 화학 원소들의 결합과 핵융합으로 생성되고 타오르며 거대한 허공 속을 날아가는 별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윤회로 가득한 공간으로 기술되고 있다.

내용의 이해를 돕는 여러 컬러 사진과 과학 전문 저술가의 유려한 필체로 완성도를 더욱 높인 이 아름다운 천문학 대중서는, 영겁의 시간 너머 쓸쓸하고도 장엄한 마지막을 향해 도도히 날아가는 광막한 우주와, 그 우주의 은총으로 태어나 찰나를 살아가는 하찮고도 아름다운 지구와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해 준다.

​“​적색거성이나 초신성이 최후를 장식하면서 우주공간으로 뿜어낸 별의 잔해들은 성간물질이 되어 떠돌다가 다시 같은 경로를 밟아 별로 환생하기를 거듭한다. 말하자면 별의 윤회다. 은하 탄생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없이 많은 초신성 폭발의 찌꺼기들이 태양과 행성 그리고 우리 지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 곧, 피 속의 철, 이빨 속의 칼슘, DNA의 질소, 갑상선의 요오드 등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는 모두 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실화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어버이 별에게서 몸을 받아 태어난 별의 자녀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메이드 인 스타(Made in star)인 셈이다. 이처럼 우주가 태어난 이래 오랜 여정을 거쳐 당신은, 우리 인류는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주의 오랜 시간과 사랑이 우리를 키워온 셈이다. 물질에서 태어난 인간이 자의식을 가지고 대폭발의 순간까지 거슬러올라가 자신의 기원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것은 진정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새들이 우짖는다. 별들이 빛나는 전 생애를 걸쳐 원소를 만들고, 그것들을 자신의 죽음과 함께 우주로 아낌없이 뿌리지 않았다면 나도, 저 새도 없었을 것이다.” (270~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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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의서재 2019. 1. 7. 16:57

헤밍웨이 : 20세기 최초의 코즈모폴리턴 작가 / 백민석 / 북21아르테 / 2018

‘하드보일드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의 인생과 문학 세계를 돌아본 문학여행 에세이.

그가 여행하고 머물렀던 명소들을 찍은 컬러 사진과 매끄럽게 잘 읽히는 문장이 원활한 독서를 돕는다.

평생에 걸쳐 영광과 고통이 끊임없이 교차했던,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 강렬한 마초 문학가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의 의미를 저자의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분석한 책이다.

일찍이 자살한 아버지를 미워했고, 엄격하고 냉정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자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여겨 역시나 증오했으며, 평생 ‘남자답고 대단한 자신’을 과시하려 과격한 언사를 일삼은 탓에 주위와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만년에는 알콜 중독과 우울증을 끼고 살며 정신병원을 드나들다 끝내 아버지와 같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내.

‘어쩌면 그는 끊임없이 죽음을 갈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은, 평생 전쟁터나 사냥터 등 죽음이 언제든 덮쳐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들만 골라서 찾아다녔던 헤밍웨이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참 유효한 말인 것 같다.

헤밍웨이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 문학도 어쩌면 이런 그의 삶과 내면 풍경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의 단어와 문장으로, 별다른 부연설명도 없이, 거창한 듯 허망한 세상사와 그 속에서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별다른 이해를 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뱉어내는 글들.

문학사에 길이 남을 획을 그었으나 인격적인 면에서는 도저히 가까이 하기 힘든 면을 가졌던 마초 글쟁이. 종국에는 몸도 마음도 황폐해진 채로 쓸쓸하게 생을 마쳤으나 그의 문학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 영원히 남았다.

저자는 이 사내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3년간 헤밍웨이를 쫓아다니고 읽고 쓰면서,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게 되었다”​​(17쪽)라고.

by 해피의서재 2019. 1. 3. 10:42

​떨림과 울림 / 김상욱 / 동아시아 / 2018

​한줄평: 우리가 물리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새삼 깨닫게 해 주는 책.

책은 지금까지 쌓아올려진 현대물리학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 우주의 구조를 해설하고 있다. 물리학은 지극히 수학적이면서도 지극히 불확실한 이 세계가 구성된 원리를 밝히기 위해, 물질이 존재하고 움직이며 변화하는 이치를 찾고자 계속해서 관찰하고 계산하는 학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제이든 있는 그대로의 물질적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 비로소 그 원인과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자의적이며 편협한 태도로 세상을 보는 이들과, 또 그런 이들을 호도하여 제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너무 많기에 세상은 늘 혼란하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고, 물질적 증거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판단하라”는 저자의 당부는,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와닿는다.

​<기억할 책 속 문장>

우주는 시공간과 물질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시공간은 무대, 물질은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는 시공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연법칙이라는 대본에 따라 물질이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연극이다. ... 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은 연극무대와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배우와 같다. 배우의 특성이나 움직임에 따라 무대의 구조가 매 순간 함께 바뀌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기술되어야 할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다. -37~38쪽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으면 육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어린 시절 죽음이 가장 두려운 상상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원자론의 입장에서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이다. 원자는 불멸하니까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너무 슬플 때는 우리 존재가 원자로 구성되었음을 떠올려 보라. 그의 몸은 원자로 산산이 나뉘어 또다른 무엇인가의 일부분이 될 테니까. -49쪽

인류의 근현대사는 인간 평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투쟁의 역사다. 그런데 인간이 왜 평등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대답할 수 있을까? ... 모든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생물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각 개인이 가진 문화적, 사회적 겉모습을 벗고 벌거벗은 호모사피엔스로 섰을 때, 대기업 CEO와 지하철 정비노동자 사이의 차이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75쪽

모든 인간의 유전자는 다른 사람과 평균적으로 99.5% 정도 같다고 한다. 유전자만 보아서는 두 사람을 차별할 근거를 찾기 힘들다는 의미다. 유전자까지 오면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평등도 문제가 된다. 침팬지의 유전자는 인간과 99%가 같다. 참고로 남자와 여자도 유전자의 99%가 같다. 인간의 평등이 생물학적인 근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제 평등의 범위를 다른 생물종으로 넓혀야 할 시점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76쪽

물리학에는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의 원인이 그다음 순간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거다. 두 방법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결과를 주는 두 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후자에 대해 우주의 ‘의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의 본성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어난 일을 인간이 해석하는 방법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세상은 수학으로 굴러간다. 수학에 의도 따위는 없다. -97쪽

질량을 가진 물체 주위에는 중력장이 펼쳐진다. 전기장을 흔들면 전자기파가 생기듯, 중력장을 흔들면 중력파가 발생한다. 우주에 빈 공간은 없다. 존재가 있으면 그 주변은 장으로 충만해진다. 존재가 진동하면 주변에는 장의 파동이 만들어지며, 존재의 떨림을 우주 구석구석까지 빛의 속도로 전달한다. 이렇게 온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속삭임을 주고받는다. 이렇게 힘은 관계가 된다. -172쪽

오늘날 물리학자의 이해방식은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텅 빈 공간이다. 빈 공간 안에서 물체가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물체와 움직임, 두 가지다. ... 태양과 자동차의 운동, 스마트폰의 진동은 모두 물체의 움직임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의 목이 진동하여 소리라 불리는 주변 공기의 진동을 만든다. 이것이 상대방 귀 속의 달팽이관에 들어 있는 내부 액체를 진동시킨다. 이를 세포가 감지하여 전기신호를 일으키고 이것이 뇌로 전달된다. 전기신호란 것도 세포막을 통해 이동하는 나트륨, 칼륨 같은 이온의 운동에서 오는 것이다. 물리학자는 이처럼 세상을 ‘운동’으로 이해한다. -230쪽

운동은 위치 변화다. 위치의 변화가 없는 것도 ‘정지’라는 운동이다. 위치는 공간과 물체 사이의 관계다. ... 운동은 공간의 선, 즉 도형이 되고, 이 도형은 숫자로 표현된다. 숫자는 수식으로 다룰 수 있으니 운동을 수학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실 이 때문에 중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우리는 ‘함수’라는 것을 배운다. 함수는 수식과 도형을 연결해 주는 장치다. 물리학자는 수식에서 도형을 읽어내고, 도형에서 운동을 보고, 운동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231쪽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과학은 물질적 증거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리는 태도다. 증거가 없으면 결론을 보류하고 모른다고 해야 한다. 증거 없이 논리로만 이루어진 이론이나 주장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 과학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다. 충분한 물질적 증거가 없을 때, 불확실한 전망을 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결과의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는 데에서 나온다. 결국,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기보다 민주적인 것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기초가 되길 기원한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니까. -270쪽

by 해피의서재 2018. 12. 25. 17:05


​골든아워. 1-2 / 이국종 / 흐름출판 / 2018

이국종 아주대 외상외과 과장의 에세이 <골든 아워>가 최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이 포스팅에 올린 사진은 바로 이 책의 뒷표지를 찍은 것이다.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된 이 책은 이 교수와 그가 이끄는 중증외상 팀이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처절하게 버텨 온 사투의 기록이다. 긴 말 필요없이 이 뒷표지에 새겨진 글귀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기 충분하다.

16년이라는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이 밀려오고 밀려갔으며 살아남는 이도, 끝내 숨을 거두는 이도 있었다. 아덴만 여명 작전과 세월호 참사, 귀순 북한병사 사건 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도 있었다. 그 속에서 중증외상외과라는 분야가 새삼 세상의 주목을 받고 관련 정책이 쏟아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증외상을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된 게 없었고 아주대 중증외상 팀의 스태프들과 소방 구조대원들은 과로와 사고 등으로 하나 둘 무참히 쓰러져 갔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간결한 어조로(저자 자신이 밝혔듯 김훈의 <칼의 노래>와 흡사한) 적어 내려간 이 교수의 글 속엔 차마 미처 숨기지 못한 분노와 슬픔이 오롯이 어려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게 한다.

​“한국 중증외상센터의 직원 고용 수준은 영미권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적은 인력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하느라 과로로 쓰러져 나갔다. 수술방의 모든 의료진이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의 피를 뒤집어썼다. 전담간호사들이 다치거나 유산해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이 현실은 무관심 속에 외면받고 있었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무슨 이유로 희생을 기본 값으로 감수해야만 하는가. 거대 담론만이 존재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증외상센터의 지속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 국민들이 아는 사실은 실제 상황의 100만 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고, 그 안에서 각자도생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 사회는 영화 <매트릭스>와 흡사하고,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의 근간은 모르는 채 사는 것이 좋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정부나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 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낫다. 일부 ‘선수’들만이 그런 시스템을 이용해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할 뿐이다. 나는 이 사회 안에서 평범하게 자영업자로서의 의사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제넘게 시스템에 접근한 탓에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 281~282쪽


이 말에 더 이상 무슨 얘기를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스스로 이제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는 게 지치고 지겹다고 토로하는 지경이 되어 있다. 떠나라면 언제든 떠날 마음을 늘상 품고 살아 왔다는 저자. 그럼에도 지금껏 떠나지 못하고 지옥같은 사선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곳곳에서 생계를 위해 분투하다 육체가 으깨지고 부서진 채 실려오는 수많은 환자들과, 그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료와 후배들을 위한 마지막 불씨라도 지키고 남기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모두가 번지르르한 겉치레에 집착하고 모든 것이 기계적인 경제논리로 재단되는 세상에서 말도 안되는 수준의 박한 지원과 그보다 더 야박한 사회상(닥터헬기에서 나오는 소음조차 견디지 못하고 민원을 퍼붓는 등)을 견뎌내며 자신의 건강과 생명마저 제물로 바친 이들의 일대기를 읽어 나가고 있자면 대체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소수의 희생에 기반하고 안주하며 버티고 있는 조직과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을 것인가를 되뇌면서도, 이 땅에 제대로 된 중증외상 치료 시스템을 이끌어갈 마지막 희망을 남겨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이국종 교수와 그의 스태프들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 속에서 피울 수 없는 꽃을 키우는’ 심정으로 생사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줄 의무를 이 사회가 이제 자각할 때도 되었다. 실은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래야 한다.

by 해피의서재 2018. 11. 5. 11:25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 박재용 / 행성B / 2017

EBS 다큐프라임 <생명: 45억 년의 비밀> 3부작의 출판본을 집필한 과학 저술가 박재용이 과학사와 인문학(역사)을 한데 연결한 융합적 글쓰기를 선보인 책, <(인문학도에게 권하는)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를 읽었다.

사실 아주 쉽게 술술 읽힌다고는 할 수 없다. 인문학도를 대상으로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지만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거의 문외한이다시피 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어렵게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곳곳에 자꾸 눈에 띄는 오타와 비문이 매끄러운 책읽기를 방해한다. 출판사에서 교정 작업을 꼼꼼하게 안 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예를 들자면 쭉 ‘~습니다’체를 쓰다가 중도에 갑자기 ‘~다’체가 끼어든다든지, 같은 단어가 연달아 두 번 반복된다든지(00이 ​있이 있었습니다) 조사가 잘못 사용된 문장이 나온다든지.

앞서 언급한 단점 탓에 이 책에 마냥 높은 점수를 주기엔 다소 애매하지만, 생물학-천문학-지질학-물리학 순으로 각 과학분야의 발달사를 인류 문명사의 흐름과 연계하여 서술한 점은 이 책의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포인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자 관찰과 실험과 계산을 거듭한 끝에 나온 대표적인 이론들 그리고 오래된 이론과 새로운 이론이 각축을 벌이다 결국 새로운 이론이 대체되며 세상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시간의 흐름에 맞춰 정리-서술되어 있다. 이렇게 자리잡은 과학적 업적들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도 이 책은 함께 기술하고 있다. 당대의 왜곡된 사회 의식이 투영된 골상학과 우생학 같은 유사과학이 세계사에 남긴 끔찍한 부작용도 함께.

특히 이 책의 에필로그인 <과학을 한다는 것>만큼은 모두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명문이다. 과학이 인류에게 주는 교훈과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고, 인류가 과학의 성과를 활용하는 데 있어 매사 신중할 것을 힘주어 부탁하는 이 글에는 심지어 절박함마저 느껴진다.

오랜 시간 수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낸 자연과 우주, 지구의 성질은 모두 한결같이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며 인간(특히 유럽 백인)만이 특별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어쩌면 자연과학 연구란 ​자연의 본질은 어떤 인위적인 이념에 의해 왜곡되고 갇힐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와 더불어 이 우주 한가운데서 지극히 평범하고 동등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 기억할 만한 문장들 -

“만약 인간이 다른 동물 모두와 다르다면, 그것은 생물학 이외의 영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밝히는 것은 생물학의 영역이 아니라 인문학의 영역일 것입니다. (...) 인간은 다양한 지구 생물 중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다른 모든 생물이 그런 것만큼만 인간도 특별합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을 더 특별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생물종 모두와 비교해서 인간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과학에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층위에서 다른 학문이나 대상에게 행해져야 합니다. 그곳에서 인간이 특별하다는 답을 들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겠지만요.” - 116~117쪽

“사실 지동설을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마음 속 깊은 곳의 인간중심주의였습니다. 세상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오래된 암묵적인 믿음에 배치되는 이론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다가왔고, 이치를 따지기 전에 배척당했습니다.” - 141쪽

“주인공인 줄만 알았던 우리는 우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우주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잠깐 스쳐가는 ‘지나가는 행인 3’ 정도였던 것입니다. (...) 인간은 우주의 변방에 있는 평균보다 약간 규모가 큰 은하의 나선형 팔에 위치한 평범한 항성의 세 번째 행성에서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지성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인간이 지니는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 210~211쪽

“내가 남보다 고귀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타인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며 같은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자랑스럽고 고귀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중심에서 내려와 우주의 모든 동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평범한 우주 시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것 또한 자랑스러워할 일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찾아내는 일은 이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도 쉽게 일어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고작 우주 전체 나이의 1만 분의 1 정도의 시간을 살았으며, 문명의 역사도 겨우 1만 년에 불과한 우리가 그러한 발견에 도달한 것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입니다.” - 211~212쪽

“대항해 시대는 유럽의 입장에서는 전세계를 정복하고 보물을 얻는 꿈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전세계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는 암흑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대항해 시대라는 말 자체가 유럽의 입장일 뿐입니다. 유럽을 제외한 세계에서 그 시기는 대수탈의 시기였습니다. 그건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민지의 수탈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재화가 과학자들이 돈 걱정 없이 과학에만 몰두할 수 있게 제공되었습니다. 유럽에는 과학자들이 늘어났고, 과학 연구에 많은 돈이 투자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과학은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 그러나 이 시기의 과학 발달은 온전히 유럽인만의 것이었고, 그 열매도 유럽인들만이 향유했습니다. 물론 유럽인 모두가 향유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왕실, 귀족, 부자 같은 지배계급이 독점한 것이었습니다.” - 226~227쪽

“과학은 이제 모든 사람이 유전자 차원에서 앞산의 침팬지 집단과 뒷산의 침팬지 집단의 차이보다도 더 적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 과학은 인간을 나누는 그 어떤 기준도 과학적 근거가 없음을 명명백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274쪽

“당시 유럽의 과학자들이 이룬 성과는 무기의 혁신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식민지를 점령할 수 있는 무력을 선사합니다. 과학자들의 역할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질학에서, 유전학에서, 또 진화론에서 유럽이 전세계를 지배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 과학자들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시대적 한계라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보편적 인류’라는 인식은 너무도 먼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성, 장애, 피부색을 벗어나 보편적 인류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갔고, 이제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278쪽

“우리는 별도 태양도 지구도 모두 같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동일한 기본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압니다. 우주 어디에도 특별한 원소, 특별한 힘은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입자로 구성되고, 모두가 같은 힘의 원리로 존재합니다. 심지어 현재 밝혀진 네 가지 근본적인 힘(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도 하나의 힘으로 통일될 것이라고 물리학자들은 생각합니다.” - 349쪽

by 해피의서재 2018. 10. 21. 10:09

도서명 :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저자 : 양칭샹

출판사 : 미래의창

출판연도 : 2017

 

중국은 언제나 알다가도 모를 나라다.

바로 옆에 있고,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인 나라이기도 하다.

그곳에 사는 젊은이들은 우리와 같을까, 다를까.

지난 가을에 중국의 젊은 세대, 80년대생(80, 바링허우)들에 대하여 현지의 젊은 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기심에 얼른 구해 보았다.

 

알려진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여전히 더 많은 나라, 중국.

대국굴기를 외치며 크나큰 경제시장과 강대한 군사력, 막대한 머니파워를 세계에 과시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 내부에서 곪아가고 있는 문제는 다른 여느 인근 국가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빈부격차나 청년실업 문제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국민과 함께 해결하는 일에 중국 당국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외부 세계는 물론이고 자국 국민들에게도 철저하기 감추고 덮기 바쁜 중국의 문제들.

그러나 2010년대 현재, 중국의 중하층 시민,

특히 80년대 이후 출생자인 바링허우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취업난과 주거란,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고질적인 가난 그리고 가족해체 현상과 정서적 황폐 등의 사회 문제는

이미 너무나 심각한 상황에 다다라 있다.

 

고등 교육을 받고서도 바로 원하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고,

치안이 거의 보장되지 않는 낯선 공업도시에서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의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내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에 쫓기며,

기껏 꿈꾸는 목표와 희망이라곤 샤오즈즉 일명 쁘띠 부르주아로 사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사실상 불가능한 사회 구조 속에 중국의 젊은이들은 짓이겨지고 있다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책과 영화라는 가장 보편적인 문화생활과도 유리된 생존기계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의 젊은이들의 실상을, 이 책의 저자는 대중문학 비평과 시민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파헤쳐 보이고 있다.

저자인 양칭샹은 실제 광둥 성 둥관 시에 거주하는 중하층 바링허우 다수를 상대로 1:1 직접 인터뷰를 시도했고, 한한 등 유명 중국 작가들의 에세이와 대중소설을 분석하면서 그동안 중국 당국과 관영매체가 이때껏 보여준 적 없는 중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빈부 계층이 고착화된 지 오래인 가운데, 폭력적인 학교 교육과 여전한 사상통제

그리고 중국의 일상 곳곳에 배어 있는 부조리와 부패 등,

세상이 총체적으로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과 허무에 빠져들고 있는

중국의 청년 세대의 비극적인 면모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광경이 중국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따지고 보면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실재하는 문제이며,

더 나아가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하다.

무작정 숨기고 모르는 체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닐진대,

중국은 과연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해결책을 찾을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본 중국은 완전히 위험수위를 넘어가기 직전, 아니 이미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언제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모를 시한폭탄.

 

저자 양칭샹이 다시 중국에 묻는다.

바링허우, 이들을 위해 중국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나 역시 묻고 싶어진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나와 이 나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으로부터 한국과 중국, 양국은 전혀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7. 12. 3. 10:59
서명 : 늑대를 구한 개

저자 : 스티븐 울프

출판사 : 처음북스

출판연도 : 2014

 

한 중년 남자의 좌절과 재기를 담담하게 적은 이 수기의 제목이 왜 늑대를 구한 개가 되었냐 하면

이 수기의 내용이울프라는 성씨를 가진 한 남자가 한 마리의 개를 통해 새 삶을 되찾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개의 이름은 혜성이라는 뜻의 카밋’.

그레이하운드 종으로, 원래 경주견으로 태어나고 길러졌다가 중도에 도태된 친구다.

 

개와 만나기 전 울프 씨의 사정도 이 개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건실하게 잘 살던 이 미국인 변호사는

그동안 앓던 허리 상태가 어느 날 순식간에 크게 악화되면서 일어나 걷는 것조차 버거운 지경이 되고,이 때문에 결국 직장마저 잃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는 어느 날 거리에서 웬 우아하고 당당한 자태의 그레이하운드 한 마리를

목격한 뒤 그와 같은 반려견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경주견 시장에서 도태된 그레이하운드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단체를 통해 카밋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허리 통증으로 인해 운신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한 울프 씨를 위해

카밋은 금세 문고리에 걸린 긴 끈을 물어 당겨서 문을 여는 법을 익히고,

울프 씨의 휠체어를 직접 끌고 공항을 누비기도 하며,

나중에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견 품종이라는 한계를 넘어

본격적인 장애미 도우미견으로 인정도 받는다.

 

울프 씨가 카밋을 키우는 건지 카밋이 울프 씨의 시중을 드는 건지

알쏭달쏭해 보이기까지 한 이 두 동물(어쨌든 인간도 동물이므로)의 동거는

울프 씨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던 모양이다.

우울하고 끔찍한 과거를 지나 왔음에도 기꺼이 사람을 따르고

우아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는 이 의젓한 개를 지켜보면서

울프 씨는 지난날의 자신의 삶과, 더 나아가 인생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을 모아 정리한 글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책 속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울프 씨가 카밋을 보며 쓴 글이다.

 

카밋을 보면서 배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때론 의연하게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버려야 한다는 거다. 그날 그날 새롭게 찾아오는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삶에선 원래 자기가 선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목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실패가 아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이 한 문단으로 요약이 가능할 것 같다.

울프 씨는 이 문단대로 카밋과 함께 자신의 변화된 모습과 새로운 나날들을 온전히 긍정하고 받아들이며 견뎠다.

카밋이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울프 씨는 카밋이 남겨 준 그 가르침을

삶의 위로이자 힘으로 삼으며 또 꿋꿋이 살아가고 있을 터이다.

.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by 해피의서재 2017. 12. 3. 10:45

최근들어 영화에 이끌리기 시작했다언제부터 갑자기 영화에 마음이 동하고, 영화를 찾아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우연히 SNS에서 어느 영화 속 흥미로운 한 장면의 스틸컷을 보게 된 것이 본격적인 시초였던 것 같기는 하다. 어쨌든 그 이후로, 정확히는 2016년도 들어서부터 나름 영화팬 흉내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최신 영화도 보지만 예전에 나온 영화들 중 네티즌들이 추천하는(SNS에서든, 블로그에서든) 영화도 조금씩 뒤적여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보게 된 영화가 톰 포드 감독의 <싱글맨>이었다.

작년에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로 전국을 뒤흔들어 놓았던 영국 배우 콜린 퍼스가 주연한 영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갈 의지마저 놓아 버린 채 겨우 삶을 버티고 있는 한 남자의 무거운 하루를 말없이, 묵묵히, 오직 그 남자의 표정과 시선, 그리고 그 시선 속에 들어오는 색채만으로, 아주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표현해 낸 영화였다. 영상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처연하면서도 아찔한 바이올린 음악까지 얹히고 나니 그야말로 영화 속 그 아득한 슬픔의 정서에 함께 빠져들기 충분했다. 나 역시 하루하루 버티기가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럽다고 여기고 있던 차에 이 영화를 보게 되니 실로 영화가 나를 위로하는 듯한 느낌이 크게 들었다. 이후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곧 도서관에서 동명의 원작 소설을 찾아냈다.

 

영화 속 배경이 1960년대인 이유는 바로 그 원작이 쓰여진 시기, 그리고 그 원작이 배경으로 삼은 시기 역시 1960년대이기 때문이다. 58세의 소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마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동년배인 동성애자 대학 교수 조지를 내세워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냉전이 한창인 시대, 건강한 활기와는 어딘지 거리가 있는 것만 같은 캠퍼스, 별 의욕도 없이 별 볼 일 없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아닌게아니라 정말 별 볼 일 없어진 것만 같은 영문학이라는 학문, 조지의 집 옆에서 요란스럽게 놀며 끊임없이 소음을 유발하는 아이들, 조지를 은근히 경멸하거나 동정하는 이웃들. 그 사이에서 그나마 조지에게 유일한 삶의 활력이자 의지였던 짐은 이제 죽고 없다.

 

여기까지는 소설과 영화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삶을 대하는 조지의 태도와 그 분위기는 두 작품이 서로 좀 많이 달랐다. 둘 다 관조적인 인상이 강한 작품이지만, 소설 쪽이 좀 더 날것스러우면서도 강인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출신 감독이 연출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설보다는 다소 처연하고 여린 느낌이 강하다.

 

소설 속 문장은 하루 동안 조지가 하는 행동과 생각들을 그냥 주욱 기술해 나아간다. 출근길 고속도로를 달리며 동성애자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이들을 향해 조지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테러를 벌이는 자신을 상상하고, 캠퍼스에서 테니스를 치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 그래 나는 미쳤어. 그리고 앞으로 더 미칠 생각이야라고 되뇌는 조지.

 

영화 속 조지보단 소설 속 조지가 좀 더 삶에 대한 의지가 더 강해 보인다. 짐이 없는 세상에서도, 고립된 세상 속에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채 홀로 하루하루 겨우 버텨가는 삶이라도(그래도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한 케니가 그의 앞에 등장하긴 한다), 이제 전신의 세포가 죽고 육신이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누구에게나 예정된 바로 그 순간이 오기 직전까지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래도 어떻게든 삶을 버텨 갈 거라고, 조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영화보다 좀 더 남성적이고 힘있는 인상의 이 소설에서, 나는 내 삶을 다시금 돌아본다. 누구에게나 삶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조지처럼, 혹은 지금의 나처럼 그 버거움이 더욱 남보다 배로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버거움과 고독, 힘겨움을 진정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조지에겐 짐이 있었을지 모르나 이제 그는 짐 없이 살아야 한다.

 

우린 어쨌거나 제각각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정말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일생을 함께 할 수도 있겠지만 늘 그랬듯 언젠가는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다시 홀로 남아야 한다. 언젠가는 홀로 남겨진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오직 홀로 자신의 삶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싱글맨, 싱글우먼.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도 어떻게든 끝까지 견뎌 볼 생각이다. 소설 속의 조지가 그렇듯이. “그래 나는 미쳤어. 그리고 앞으로 더욱 미칠 생각이야라고 그를 따라 되뇌이면서.

 

by 해피의서재 2016. 8. 20. 10:29

강창래의 본격 북 에세이 <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376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한 번 책을 집어들면 무섭게 책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메타북이라는 자평이 의미하듯 이 책은 책에 관한 책이다.

물리적으로 책은 글자가 인쇄된 수백 장의 종이를 엮어 만든 종이뭉치일 뿐이지만

그 속에는 한 시대를 있게 한 수많은 이야기들과 그 시대의 공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의 흡인력은 바로 그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데서 나온다.

 

프랑스 대혁명을 앞둔 시점, 파리 시내에 유행했던 야한 연애소설들이

어떻게 대혁명을 촉발시키는 매개채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너무 어려워서 아무도 읽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유명해진 책들의 이야기,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과연 언제부터 고전이었는가에 관해 다소 발칙한 시선으로 바라본 글들,

20세기 본성론양육론이라는 각각의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기여하며

간접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부른 온갖 학설들의 이야기,

그리고 권력의 흥망성쇠 속에서 속절없이 불타 없어진 책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책의 정신>은 이렇게 다섯 종류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독립성을 띠면서도 그 책들과 학설들이 대세를 타던 시대,

그리고 그 시대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만들어 온 인류의 역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데서

그 공통성을 가진다.

 

서로 다른 다섯 가지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실 의외로 일관적이다.

책을 읽을 때, 어떤 이데올로기가 대세를 타는 것을 볼 때, 무엇에 유의하며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

늘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주장이다.

 

책은 예로부터 세상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 왔다.

새로운 이론과 사상을 담은 책부터 야한 이야기책에 이르기까지,

어떤 종류가 되었건 책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사회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해 왔다.

따라서 때로는 금기시되기도 했고,

아예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권력자들의 프로파간다로 왜곡되어 이용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강력하고 때로는 위험했던 책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든 객관적인 시선과 비판적인 시야를 언제나 견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이름난 책과 명사들의 일화를 인용하는 가운데,

진실과 이름값은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특정인의 명성에 함몰되지 말 것과,

책을 비롯한 어떤 정보든 모든 판단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다른 이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해서야 정말 옳고 맞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이 책의 제목이 책의 정신인 것은 책에 담겨 있는 주장과 이론을 늘 의식해야 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일 게다.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읽는다면 책의 정신에 지배당하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

따라서 책은 나의 정신으로, 책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읽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땐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이 책이 말하고 싶은 바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아마 이런 문장이 나올 것이다.

 

by 해피의서재 2016. 7. 3. 10:57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한, 어떤 것도 한 인간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유대인 정신과 전문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수용소에서 겪은 일들과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한 권의 책으로 펴낸다.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단순한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수기를 넘어 극한의 상황 속에서의 인간의 내면정신의학적 관점에서 고찰했다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수용소에서의 삶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가에 대한 자기 고백과 더불어, 극한의 환경에 처했을 때 사람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문가의 시선으로 서술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 프랭클이 정립한 정신과 치료 기법인 로고테라피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철학, 그리고 기존의 정신의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사상에 대한 비판까지 담고 있어 본격적인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도서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프로이트는 , 아들러는 권력을 들었다.

반면 프랭클은 의미에 방점을 둔다.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와 궤를 같이 하는 이 주장의 핵심적인 내용인즉,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이자 실존이며 삶 자체로부터 끊임없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에 대답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질문은 강제수용소 수감과 같은 극도로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에 어떤 식으로 답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각 개인의 마지막 자유의지에 달려 있으며,

자신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스스로 결심한다면 그 책임의식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의연하게 시련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조차도.

프랭클은 다름아닌 자신의 수용소 수감 경험에서 그 증거를 찾는다.

 

자유를 빼앗긴 순간에 맛보게 되는 경악과 절망,

그 후에 오는 만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함,

자유를 되찾은 직후에 겪게 되는 멍한 감정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한참 후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벅찬 감동 등

자신이 겪은 감정의 변화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고백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도 함께 공명케 하고 기꺼이 공감하게 만든다.

아울러 책 속에서 일관되게 전하는, 담담하면서도 힘있게 전달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는

살아갈 의미를 찾고, 살아야 할 이유를 놓지 않는 한 나는 절대 부서질 수 없다.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살아가는 순간마다 두고두고 힘이 되어 줄 것이다.

by 해피의서재 2016. 7. 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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