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 박웅현 / 북하우스 / 2011


저자는 말한다. ‘책은 마음 속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고. 단단히 굳어 있는 마음의 바다를 깨어 다시 찰랑이게 만드는 데서 창의성이 다시 솟아나 넘실거리고, 그 힘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다시 뜨이게 되며, 다시 뜨인 눈을 통해 인생의 풍요와 행복을 새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책이라고.

 

저자는 흔히 말하는 다독가는 아니라고 스스로 평한다. 대신 한 권을 읽어도 깊이있게 읽는다고 자부한다. (그래도 한 달에 서너 권씩 읽을 정도면 독서량 면에서도 꽤 괜찮은 스코어 같다) 아울러 그는 다독 콤플렉스를 버리라고 충고한다. 독서량에 매몰되면 쉽고 빨리 읽히는 얇은 책만 찾게 된다고. ‘인생에 울림이 있는 책을 얼마나 만났느냐가 더 중요하지 숫자는 중요치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나 역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 권을 읽어도 꼼꼼하고 세심하게 책의 가장 깊은 정수까지 흡수한 덕택인지, 그가 지금까지 읽어온 여러 책을 한 강의에 한데 버무려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그의 언변은 물흐르듯 거침이 없다. 하나의 강연 안에 이철수의 판화(미술), 김훈의 산문과 최인훈의 <광장>(문학), 불가의 선문(종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함께 공존한다. 얼마나 다양하게, 또 깊이있게 책을 읽으면 이런 강연이 나오는 걸까. 8회에 걸친 강독회 원고를 고스란히 글로 옮긴 책의 특성 때문인지 책을 펼치면 마치 강연 실황을 녹음한 것을 귀로 듣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는 정말로 어느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들으며 노트 필기하듯 이 책을 읽었다.

 

프롤로그격인 시작은 울림이다편을 시작으로, 김훈의 지극히 사실적인 글들을 통해 보는 세밀한 관찰의 힘, 알랭 드 보통의 소설 혹은 인생사 연구 보고서’,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들이 그린 지중해 특유의 실존적이자 현세지향적인 내면 의식,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안나 카레니나>를 통한 인간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박웅현은 다방면의 책들을 편안하고도 흥미롭게 독자에게 소개하며 그 속에서 얻은 자기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설파한다.

 

그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면 현재를 살아라, 주위를 늘 관찰하라,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제적인 것에 충실하라정도가 될 듯하다. 방대하다면 방대한 스케일에, 고금의 인정을 받은 책들이 대거 등장하고 다양한 인문학적 이야기가 쏟아지는 향연들로 이루어진 책이지만 이리저리 다 정리해서 추리고 나면 정말 저 정도 말이 남는다. 현학적이거나 주관적인 말을 버리고 오직 사실에 입각해서 탁탁 쳐내듯 글을 쓰는 김훈의 문장이나, ‘상대적 궁핍 혹은 궁핍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불안이 온다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대한 해석이나, 땅에 발을 디딘 현실적 인문학이 아닌 기계적인 이론만 갖고 사회를 파악하려는 헛똑똑이인물을 등장시키며 그를 비판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한 대목, 그리고 여자든 꽃이든 지나가던 짐승이든 순간순간 눈에 띄는 모든 것에 경이로워하고 감탄하던 그리스인 조르바 등, 이들의 공통점을 추려 보면 정말로 현재, 실존, 있는 그대로정도로 요약되지 않는가.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예전같은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이 세상을 보고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한다. 알게 해 주는 매체가 바로 책이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책을 통해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앎으로서 세상을 새로이 바라보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느끼고 누릴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경쟁에 파묻혀 사는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삶을 누리는 법을 터득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도 이 강연집에서, 저자가 내가 이 자리에서 소개하는 책을 여러분도 사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달자면, 이 책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이 강독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북토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토크는 문헌정보학, 특히 그 중에서도 독서지도론 쪽에서 나오는 말인데, ‘어떤 일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몇 권의 도서를 선정하여 보여주면서 그 도서들과 관련된 흥미롭고 인상에 남을 만한 내용이나 에피소드를 소개하여 그들이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도록 유인하는 책 소개 기술의 하나로, 서평과 소개의 중간 정도라고 볼 수 있는 집단 독서 지도의 한 형태라고 정의되어 있다. (<신독서지도방법론>/손정표/태일사/p.296) 그런데 지금 이 <책은 도끼다>를 읽고 보니, 이 책이 그 자체로 위의 정의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북토크가 아닌가. 실제로 이 책을 통해 나 역시 제목만 알고 있을 뿐 읽지 않았던 책들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대략적인 내용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 책을 직접 읽어야겠다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으니, 과연 박웅현 씨는 실로 훌륭한 북토커(book talker)라 할 것이다.

 

by 해피의서재 2012. 5. 9. 13:41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해도 / 량얼핑 / 명진 / 2011




일전에 올린 지도에 관한 책 리스트(http://readinghappy.tistory.com/19) 중에 있던 책 중의 한 권을 최근에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3월에 감명깊게 보았던 KBS 다큐 <지도, 문명의 기억>과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읽기에 더욱 흥미로웠던 책이기도 하다.

책을 모두 읽고 느낀 점이라면, 해도가 세계사의 운명을 바꾸었다기보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사의 운명을 바꾸어 가는 과정을 해도가 증언한다고 보는 게 더 이치에 맞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새로운 지리 정보를 담은 해도가 계속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더 먼 바다로, 그 바다 건너의 새로운 대륙으로 나아갈 발판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주체는 다름아닌 인간이었으며, 해도를 비롯한 모든 지도는 인간이 나아가고 세상을 인식한 딱 그 만큼씩 그려져 왔으므로. 희망봉을 발견하기 이전 제작된 지도에 아프리카 남부가 다른 대륙과 서로 붙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책의 목차는 크게 1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은 전반적으로 '지구'에 대한 인간의 인지가 점차 확대되어가는 과정 순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1장 '고리 모양 물길에 둘러싸인 대륙'에는 바빌로니아 점토판 지도와 TO 지도 등 고대와 중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도들이 모여 있다. 바빌로니아 지도에서는 바빌론이 세상의 중심이고, TO 지도 속 세계에선 동쪽에 아시아, 북서쪽에 유럽, 남서쪽에 아프리카 대륙이 자리한 가운데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아직 관념적인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대인들의 지리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고대에 이미 상당한 지리학 지식과 현대에 가까운 구대륙(유럽+아프리카 및 아시아 일부) 지도를 남긴 프톨레마이오스와 그리스의 지리학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2장 '얽히고설킨 세계와 나침반'부터 본격적인 해도와 항해, 그리고 탐험 이야기가 등장한다. TV에서 본 덕에 눈에 익숙한 폴리네시아의 막대 지도와 프라마우도 세계 지도 등을 다시 지면에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3장부터 7장까지는 각각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항로의 발견과 개척, 신대륙 아메리카의 발견, 세계 일주 항해와 경도의 발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발견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유럽 각국의 해상 진출 배경과 그 성과, 그리고 탐험에 나선 인물들과 국가의 이후 행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중세 시기 동안 묻혀 있던 고대의 자연과학이 주목을 받고,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유럽의 과학 지식이 유입되고, 나침반이 도입되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항해술이 발전하는 등, 세상을 객관적-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보다 멀리 항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배경이 갖추어지면서 유럽은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마냥 재미있게만 읽어나가기엔 왠지 입맛이 썼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그리고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탐험가를 후원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며 열심히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의도가 씁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게다. 물론 그 시대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고, 그 시대에 유럽 각국이 식민지를 설립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이유도 없었으며, 탐험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이 TO 지도 같은 막연한 관념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세계와 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당대 유럽의 '항로 개척'이 더 많은 자원과 부를 얻기 위한 '욕망의 여정'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유럽의 입장에서 이것은 '개척과 정복'이었지만 그들의 함대를 맞이하는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엄연히 '침략과 착취'였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럽인들이 상세하게 그린 아프리카 서부 해안선 지도의 이면에 이 해안선을 따라 오가는 노예무역선에 실려갔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핏빛 역사도 배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세계사에 남은 유명한 해전과 해협들, 그리고 극지방의 발견에 관한 이야기가 관련 지도들과 함께 언급된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의 국제 정세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캐리커처 지도'도 따로 한 챕터에 모여 있다. 마치 신문 만평을 보는 듯했다. 아울러 지도 속에 이렇게 세상의 이야기가 다 들어 있구나. 하고 새삼 와닿았다. 따지고 보면 지도는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에 대한 설명을 나타낸 삽화들이 곁들여져 있던 고지도들이 함께 뇌리에 떠오르면서 든 생각이다.

이제 요즘 사람들은 구글이나 포털사이트의 지도 섹션을 통해 지리 정보를 접한다. 5대양 6대주가 모두 표시된 완성된 지구본이 학교마다 비치되어 있고 비행기와 배는 GPS와 위성 신호의 안내를 받아 가며 전세계를 누빈다. 종이 위에 그려지는 지도이든 컴퓨터를 통해 작성되고 열람되는 전자 지도이든, 현대의 지도와 지리 정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상생을 위해 기능하기를 기원해 본다. 대항해 시대 유럽이 행했던 침략과 착취의 행보를 넘어선, 진정한 상생의 여정을 여는 도구가 되어 주기를.

by 해피의서재 2012. 4. 12. 06:47

책쾌(冊儈)는 조선시대에 책을 팔던 사람을 말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도서 외판원쯤 될 것이다. 생계가 막막해진 몰락양반 중에 책쾌로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책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서사(오늘날의 서점)에서 책을 구해서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윤을 남겨 파는 것이 이들의 업무였다.

고서점의 문화사 / 이중연 지음 / 혜안 / 2007

나는 '책쾌'라는 단어를 『고서점의 문화사』를 통해 알았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책쾌부터 1970년대의 동대문 고서점 거리에 이르기까지, '옛 책들의 유통 과정과 고서점의 역사, 그리고 그 의미'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을 요즘 읽고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책쾌 조생'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여기에 잠시 끄적여 보고자 한다.

"내 비록 책은 없지만, 아무개가 어떠어떠한 책을 몇 년 소장하고 있는데 내가 그 책의 일부를 판 것이오. 그 때문에 그 뜻은 모르지만 어떤 책은 누가 지었으며, 누가 주석을 달았고, 몇 권 몇 책인지 다 알 수 있다오. 그런즉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내 책이요, 세상에 책을 아는 사람도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 책이 없어진다면 나는 달리지 않을 것이요, 세상 사람이 책을 사지 않는다면 내가 날마다 마시고 취할 수도 없을 것이오. 이는 하늘이 세상의 책으로 나에게 명한 바이라, 내 생애를 책으로 마칠까 하오."
                                                                                   -『고서점의 문화사』 p. 39, 49 中

책쾌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책을 파는 일 자체를 즐거워했다는 일화와 온갖 종류의 책에 대해 막히지 않고 얘기하는 모습이 '박아(博雅)한 군자' 같았다는 평(위의 책, p. 49)에서 조생의 전문가, 프로페셔널의 자부심과 치열함이 묻어나는 듯하다. 

사실 책쾌란 직업은 사회에서 그리 환영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조생은 '가난한 집안에서 싸게 책을 떼어다가 비싼 값에 팔아 이윤을 챙기는 장사치'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고, 한때는 책쾌라는 직업군 자체가 일명『명기집략』사건(조선의 왕실을 모독한 내용의 책이 책쾌들을 통해 유통된 사건으로, 이때 몇몇 책쾌들은 효시형을 당하기도 했다)의 여파로 아예 범죄집단처럼 취급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조생은 명기집략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꿋꿋하게 책쾌 활동을 계속했고, 정약용과 유만주 등 당대 지식인들과도 자주 교류하며 책 유통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숨김없이 발휘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고 또 일을 얼마나 즐겼는지는 그가 일했던 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 먼저 나와 있는 국내외의 서적목록을 참고하여 판매할 서적목록과 실제 거래할 수 있는 목록을 미리 작성해서 늘 가지고 다녔고,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목록을 보여주고 납품할 책이 정해지면 바로 구입절차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했던 큰 거래도 능숙하게 성사시켰다. 일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쉽지 않을 일이다. 그와 거래했던 지식인들의 기록 속에 존재하는 이 이야기들은 '조선 시대에 이토록 열정적으로 살았던 전문 직업인이 있었다'는 점에서 내게 묘한 감동을 주었다.

조생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들은 조생의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한 생몰연대가 언제인지까지는 적지 않았다. 『고서점의 문화사』에서는 그의 본명을 이런저런 다른 문헌들을 기초로 하여 나름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건 내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비록 이름없이 살다갔을지언정 그 열정과 전문성으로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기록 속에 남겨진 사람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을 뿐이다. 이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다간 조선시대의 모든 이름없는 직업인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by 해피의서재 2012. 3. 18. 2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