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로부터의 선물

저자
이나미 지음
출판사
안그라픽스 | 2007-12-19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이스탄불 여행기. 이 책은 혼자 떠나는 세계 도시 여행기로 『프...
가격비교

 

나는 작년 초여름에 터키 여행을 다녀왔었다. 생애 첫 해외 여행이었다. 

본격적인 '해외 여행'이란 걸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여러 곳을 한번에 돌아다니느라 이스탄불에 머물렀던 시간은 단 하루 정도였지만 이스탄불이란 도시는 그 짧은 시간에도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터키-그리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언젠가는 꼭 다시 이스탄불을 찾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아직까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제 다시 이루어질지 기약도 하기 어렵다.

가끔 이스탄불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으며 그 허기를 달래던 차에 이 책이 내게로 왔다.

폭설이 내리던 최근의 어느 날, 마치 화사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빛나는 표지가 눈에 띄어 읽기 시작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스탄불로부터의 선물』.

 

딸과 함께 이스탄불 곳곳을 여행하며 느낀 감상을 담은 기행문이다.

 

북디자이너가 쓴 책답게 책의 디자인부터 참 아름다웠다. 군데군데 페이지 전체를 가득 메운 이스탄불의 여러 풍경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성 소피아 성당과 돌마바흐체 궁 등 널리 알려진 문화유적들의 웅장한 자태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들도 함께 담겨 있어서 더 좋았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 재래시장의 노점상들, 클럽 안, 저자가 들렀던 카페와 식당들, 그가 묵었던 호텔 로비 등.

 

그러나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책의 여러 군데에서 저자가 계속 이야기하던 '관용'과 '사랑'의 메시지였다.

 

그리스 정교의 본산이었으나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모스크가 되어 계속 살아남은 성 소피아 성당의 이야기,

(그래서 저자는 성 소피아 성당을 '두 배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 표현했다)

'오직 사랑 그 자체로 말하라'고 강조했던 메블라나 루미의 이야기야말로 저자가 독자들에게 가장 간절히 전달하고 싶어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은, 배려깊지만 호들갑스럽지 않은, 유연하면서도 소신을 잃지 않는, 웃음 가득하면서도 진지함을 소중히 여기는, 서로 다름을 배척하지 않고 아량으로 포용해 버리는, 또한 서로 다름을 존중함으로 내버려둘 수 있는, 막연히 남을 흉내내기보다는 자신의 일부로 삼아 버리는, 전통과 현대가 서로를 아끼며 사이좋게 공존하는, 스스로 무진 갈등을 겪으면서도 여유롭고 의연한, 이들만의 흔들림 없는 삶의 방식은 천 개의 빛깔을 자랑하며 불을 밝힌 등불처럼 아름답다. 그 등불들은 저마다의 자율적인 빛을 발하며 따로 또 함께 이 도시를 밝힌다. - p.330

 

서로 다른 이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로 얼룩진 지금 우리 사회에 충분히 유효한 충고가 아닐까.

오랜 세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에서 그들 모두를 오롯이 품어 온 이스탄불처럼

나도, 내가 속한 이 세상도 그런 관용과 포용의 자세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어 본다.

by 해피의서재 2012. 12. 25. 13:35

 

 

by 해피의서재 2012. 12. 15. 15:37

연휴란 참 좋은 것이다. 일상과 떨어져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연이어 며칠씩 부여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참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내일 일어나면 또 어디로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좋다.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이고 뒹굴거릴 수도 있고 평소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일에 원없이 몰입할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마주쳐야 하는 일상과 현실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추석 연휴에 개천절까지 끼여 있었던 지난 며칠간, 난 두 편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소설 『고요한 집』이었다.

 


고요한 집. 1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12-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고요한 집을 둘러싼 한 집안의 비극, 그리고 터키의 역사!노벨문...
가격비교

 

1980년의 터키, 이스탄불 근교의 소도시에 위치한 숨막히도록 고요한 집. 침묵과 침울로 일생을 살아온 괴팍한 노파와 역시나 말없이 묵묵한 하인, 그리고 간만에 그들을 찾아온 노파의 세 손주.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여러 등장인물의 시선을 따라 먼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펼쳐진다. 고요하지만 그래서 더 숨막히고, 불안하고, 위태로운 느낌이 한가득인 이 소설은 소설 속 분위기만큼이나 숨막히고 불안하고 위태롭던 당대 터키의 공기도 함께 담고 있었다.

특히 내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 역시 당대 터키 젊은이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모습들을 담아낸 대목이었다. 노파의 손주 삼남매 중 막내인 메틴과 하인의 조카 하산이 각자 자기들의 무리와 얽혀 다니며 벌어지는 일들과 그들의 심리, 그들의 행동. 한쪽에서는 상류층의 소년 소녀들이 어울려 술과 자동차 경주 등으로 정신없이 유희를 탐닉하고, 한쪽에서는 사회에 불만을 품은 소년들이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며 거리에 구호를 쓰고 자기들의 집회 초대권을 강매한다. 딴에는 쿨해 보이려고, 딴에는 진지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국 다 치기어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념을 앞세워 강도에 폭력까지 자행하는 하산 패거리의 행동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짓이다. 뭐가 맞는지 그른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폭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두고두고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우울한 내용과 별개로 여기저기 숨어 있는 '오르한 파묵 코드'를 찾아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소설 속 손주 삼남매 중 장남인 파룩이 게브제 군의 기록보관소에서 오래된 기록을 뒤지는 대목에서는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당신은 조만간 《하얀 성》의 서문을 쓰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결혼한 셰브케트와 소설을 쓰는 오르한의 안부를 언급하는 대목도 내 흥미를 끌었다. 메틴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장면에서는 파묵의 자서전 『이스탄불』에 언급되었던 그의 고등학교 재학 시절이 겹쳐 보였다. 소설의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는 것은 파묵의 이후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연상시켰다.

파묵의 초기작을 읽으며 그만의 코드와 이후 작품들의 모티프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상당했다.

 

이번에 읽은 또다른 책은 김정애의 『우리 옛 그림의 마음』이었다.

 


우리 옛 그림의 마음

저자
김정애 지음
출판사
아트북스 | 2010-07-23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옛 그림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우다!소설가 김정애가 옛 그림 속에...
가격비교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부터 정조대왕과 김정희의 문인화, 이름없는 민초들이 남긴 민화, 고려의 불화와 반가사유상, 백자 달항아리, 심지어 무속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남긴 다양한 미술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에 작가 자신의 경험과 다른 분야의 지식 등을 곁들여 인생에 대해 느낀 점들을 편안하게 써내려간 에세이를 엮은 책인데, 마음이 지치고 피곤할 때 곁에 두고 읽으면 마음의 위안을 얻는 데 제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공감했던 문장 몇 줄을 여기 잠시 인용해 본다.

 

세상에 단 한 사람,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이나 넘침에 상관없이 모두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세상의 어떤 질타에 대해서도 무조건 편들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로 인해 세상의 어떤 비난을 함께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 p.50, <추운 시절 나누는 사제의 정> 中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좋아." 이렇게 일탈을 꿈꾸며 무념무상에 빠져 단 며칠이라도 일상을 탈출해 보고 싶은 것이 모든 현대인의 꿈일 것이다. - p. 118, <사색에 잠겨 자연에 스미다> 中

지혜롭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 것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거울을 보기에 더 당당할 수 있도록 얼굴을 만들어 가는 일은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돕는 일이라는 것을 보살을 통해 깨닫는다. - p. 166, <관음도에 담긴 지혜> 中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뒹굴거리며, 혹은 온갖 긴장감을 잔뜩 갖고 책읽기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은밀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알 것이다. 그런 즐거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본능적인 즐거움이기에 아무리 인터넷 문화가 범람한다 해도 인쇄된 책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 p. 188, <조선시대 북아트 능화판> 中

사람을 만나되, 내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편안하고 많이 만나는 것보다는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편안한 사람, 한 사람이면 흡족할 때가 많다. 뭐든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이, 그리고 그 적은 사람을 만나면서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나이 들어가면서 느낀다. - p. 200, <무한한 상상력에 날개를 달다> 中

by 해피의서재 2012. 10. 3.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