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 저,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새삼 접하게 된 책이다. 삶에 대한 철학적 통찰과 위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의 중요성과 하루하루 우직하게 내 길을 걸어가는 삶의 가치 등을 담담히 적어낸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출발을 시도할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의 4가지 키워드>

1. Carpe Diem (p. 172)

하루하루의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순간순간 겪어 왔던 일들이 모두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기에, 산티아고는 죽음의 목전에서 나는 후회없이 살았다고 의연히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 그것이 곧 인생의 보물을 찾는 과정이다. 결국 인생의 가장 큰 보물은 매일매일 주어지는 시간일지도.

2. 이세상에 의미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p. 265)

누구나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살면서 마주치는 어느 것 하나 의미없이 스쳐가는 게 없다.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영향을 미친다. 그걸 바로 표지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3. 마크툽, 그렇게 되리라. (p. 130)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모두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음을 안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곧 사라질 것이다. 미래의 불행을 미리 예상하고 상상하며 두려워할 시간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지금 현실에 몰두해 보자.

4. 자아의 신화 (p. 116)

뭔가 이루고 싶고, 꿈꾸고 싶고, 싶은것을 향해 첫 발을 디딜 실행력과 용기, 그리고 중간에 가혹한 시험을 맞이하였을 때 포기하지 않을 정신력만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뭔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2. 2. 19. 13:44

불안증폭사회 / 김태형 / 위즈덤하우스, 2010


1년 전 읽었던 이 책을 새삼 다시 꺼내 든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병리를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살핀 이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간략히 정리하자면
지금 이 사회,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국사회가 이 책의 제목처럼 '불안증폭사회'가 되어 있다는 것과,
그 불안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유포시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불안을 깨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신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불안증폭사회>는 우리 사회가 심각한 정신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책에 따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이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다.
"이게 다 IMF 때문이다!"라고.
IMF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기조가 쓰나미처럼 한국 사회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사회안전망도 마뜩찮고 학벌주의 등 기저에 상당한 사회병리적 증상이 깔려 있던 우리 사회가
더욱 극심한 상황으로 밀려들어갔다는 것이다.

고용안정 등 그나마 존재하던 사회적 안전장치가 하나 둘 풀려나갔다.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정부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건실한 노동에 따른 소득보다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돈 놓고 돈 먹기'식 금융투자에 따른 소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돈이 있는 부자들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부를 더욱 축적해 갔고, 그럴 여력이 못 되는 중산층은 급속도로 서민층으로 급강하했다.
'돈 놓고 돈 먹는 경제'에 고용이 늘어날 리가 없다.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사업 확장을 제한하고 기업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사회적 부의 분배를 추구하는 정책은
시장경제에 배치된다 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한다.
이와중에 그 권력을 제한받지 않는 대기업들은 동네 상권까지 무차별적으로 접수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대기업의 물량공세에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직장도 쉽게 얻을 수 없고, 어렵게 얻은 직장도 언제 잘릴지 모르고,
실업자가 되었을 때 생계와 재취업에 도움을 줄 공신력 있는 기관의 존재도 기대하기 어려우며,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부와 권력을 쥔 자와 그에 연줄을 댄 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Winner takes it all'의 사회에서,
게다가 이런 아수라장을 극복해 보겠다고 나섰던 정치인이나 사회적 명사들이
좌절하거나 변절하거나 원래 그들과 이(利)를 같이하는 사람들임이 드러나는 것을 수 차례 목격한 시민들은,
이제 세상의 변화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예 기대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힘만으로 이 정글같은 세상을 헤쳐가려 한다.
맞벌이를 뛰고, 미친듯이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입시학원을 2~3군데씩 보내고...
그러나 그 삶이 결코 행복할 리 없다.
이렇게 쫓기듯이 살아도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빚을 동원해 가며 겨우 확보한 작은 아파트 한 채와 고학력 실업자가 된 자녀뿐이다.
평생 아등바등 살았건만 주어지는 소득은 그 사력에 가까운 노력에 비하면 너무나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미 한국인들의 삶 자체가 소박한 행복이나 순수한 욕망의 충족 같은 건 생각할 틈이 없는, 
오직 생존을 위한 사투로 점철된 것이 아닐까.
오직 돈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갑옷'인 시대에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회안전망도,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는 살벌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의식 때문에.
마치 값비싼 노스페이스 점퍼를 걸쳐야 왕따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청소년들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런 한국인들의 심리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보고 있다.
생존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한국인...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언제 나락으로 추락할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
한 번 추락하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는, 패자부활전이 전혀 없는 사회.
좌절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는데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도가 없다.
맨정신으로 살아갈 자신을 잃은 사람들은 술이나 사이비 종교 등에 중독되거나, 혹은 차라리 자살을 택한다.
가정불화와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덩달아 성정이 강퍅해진 아이들 사이에서도 폭력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비틀린 사회가 온갖 사회적 병리 현상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팍팍한 삶과 살벌한 사회에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OECD 중에서 최악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국가가 되어 버렸다.
<불안증폭사회>의 저자는 이것이 한국인 멸종의 전조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있던 사람들은 죽어가고,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 없다면,
한국인의 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종국에는 멸종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인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런 살인적인 사회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멸종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회를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풀죽어서 환경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은 '먹고살기 바빠서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며,
'먹고살기 바쁜'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언제 최하 빈민층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안을 부추기는 것은 다름아닌 '승자독식'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사회 기득권층과 그들에게 장악된 언론들이다.

시민들이 불안과 좌절의 노예로 살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며 산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당에 자포자기성 표를 던지고,
막장드라마를 욕하며 보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하고 초라한 현실을 애써 잊고,
생활고에 서로 눈치 보여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성적 일탈을 감행하고,
아주 어려서부터 집단생활을 시작하며 정작 부모의 따스한 사랑을 독차지할 시간을 얼마 누리지 못한 아이가
어느 날 히키코모리나 학원폭력 가해 학생이 되어 TV뉴스에 등장하는 우울한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개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불안증폭사회>의 저자는 이런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존재는 시민들뿐이라고 말한다.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절대 유리한 이 체제를 스스로 버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경험이 있는 만큼
현재의 시민들에게도 충분히 그만한 저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안증폭사회'의 해결책으로 저자는 서로의 마음 속에 들어앉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기 위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활동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한동안 사회적 화두였던 '연대'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책의 내용과 표현 등이 상당 부분 과격한 면이 있다. 사족같은 부분들도 종종 보인다. 
민족 얘기나 한국인의 멸종 같은 표현은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불안에 잠식당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내면 역시 만만치 않게 불안이 깊었던 모양이다. 

책이 처음 출판된 시기가 2010년 11월이다. 나는 이 책을 발행 3개월만인 작년 1월에 처음 읽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 같은 책을 다시 읽으며 우리 사회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의 저자가 울분에 가까운 문장을 토해내던 그 때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by 해피의서재 2012. 2. 13. 20:48

하얀 성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2011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무력하고 슬퍼 보이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에 수치스럽고 화가 나고 죄책감이 들고 슬퍼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슬퍼하며 죽어가는 동물을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나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데에 익숙해진 것처럼,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생각을 깨닫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과 못생긴 입과 연필을 쥐고 있는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p.195)


터키 함대에 사로잡혀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스탄불로 끌려와 한 학자의 노예로 살게 된 한 베네치아 인이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되뇌는 독백 중의 일부이다
. 여기서의 는 세간인들에게 호자(Hoca)’라고 불리던, 베네치아 인의 옛 주인을 말한다.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세상을 객관적인 과학에 입각해 바라보고 싶어했으며, 어린 파디샤의 마음을 사로잡아 권력을 쥐고 자신의 과학관과 신념을 당대의 오스만 제국에 이식하고 싶어했으나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절망하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베네치아 인 노예가 가진 서양 과학 지식에 더욱 집착했고, 그래서 더욱 자신이 처한 당대의 이스탄불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래서 당대 사람들에 대한 조소와 연민 사이에서 갈등했던 사람.
 

졸지에 낯선 땅의 노예로 끌려온 베네치아 인은 자신의 주인이 된 이 호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관찰한다.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그 외모가 마치 거울처럼 서로 똑 닮았다고 한다. 마치 또다른 자신과 함께 사는 듯한 기분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 파디샤의 명을 수행하며, 때로 서로를 질시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다가 서서히 서로에게 녹아들어간다. 책상에 마주앉아 각자의 옛 과오에 대한 고백을 서로 채근하며 써내려가던 시절부터 이미 두 사람은 서로의 운명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탄불에서 함께 잔치용 폭죽을 만들고
, 어린 파디샤를 알현하고, 흑사병을 퇴치할 방도를 찾고, 능력을 인정받은 호자가 황실 점성술사에 오르는 동안에, 호자와 베네치아 인은 점차 서로를 닮아가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가고 있었다. 짧은 소설임에도 근 수십 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긴 세월 속에서 호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든다는 명분 하에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점점 서양 과학 속으로(혹은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고, 베네치아 인은 갈수록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호자를 대신해 파디샤의 궁을 드나들며 오스만의 고관대작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린다. 호자가 그토록 무시하고 비웃고 조소하던 사람들이지만 베네치아 인에게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수준의 인사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호자가 만든 무기가 실제 전장에서 아무 효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 베네치아 인이 그 책임을 둘러쓰고 살해당할 처지에 이르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완전하게 서로의 운명을 바꾼다. 호자는 베네치아 인의 차림으로 유럽으로 떠나고, 베네치아 인은 호자가 되어 오스만 제국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든 베네치아 인은 자신과 호자의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긴다
. 어린 시절 살던 베네치아의 옛 집 정원을 그대로 재현한 정원이 딸린 오스만 제국의 자기 집에서.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과 호자의 삶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오르한 파묵은 어린 시절
,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그와 삶을 서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외모가 똑같으니 누가 누구인지, 서로 바뀌었는지 어땠는지 주위 사람들은 전혀 인식할 수 없을 테니까.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을 그런 상상을 그는 기어이 소설의 힘을 빌려 구현해 냈다.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책 속에서나마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들만의 특권일까. 그래서 <검은 책>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글쓰기라는 말이 나오나 보다. (정확한 문장은 인생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가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 지금 내가 사는 삶보다 더 나은 모습일까. 그런데 그 삶은 어차피 내가 사는 삶이 아닌데, 더 낫든 더 낫지 않든 더 이상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일까. 반대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면 나는 그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삶은 내 것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인 건 맞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 왔던 내가, 사실은 원래의 내가 아닌지도 모른다. 남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 이미지가 사실은 내 본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괜히 오싹해진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니, 어느 시공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든 나는 끝내 본연의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검은 책>의 이야기 속 왕자처럼 모든 것을 배척하며 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답은 내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운명까지도 모두 내 것으로 묵묵히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파묵도 어쩌면 그런 뜻으로 이 글을 쓴 것일 게다.

분량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주는 책이다.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즈가 작가를 극찬할 만하다.


by 해피의서재 2012. 1. 30. 1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