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2005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시기의 나는 내 마음의 갈피를 도통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한마디로 삶과 열정을 쏟을 무언가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항상 어딘가 공허했고 알 수 없는 갈증이 났다. 대체 내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뭔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사실 문제는 나 자신의 삶의 태도에도 상당 부분 있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무한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무력하게 지워갔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나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종일 도서관에 앉아 되는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들어 되는대로 뒤지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돌아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용기도, 자신감도, 도전정신도, 진득한 끈기도, 열정도 갖고 있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도서관 서가 한켠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노트에 감명깊은 구절들을 베껴적었다. 그 후 생각날 때면 책을, 또는 노트에 적어둔 구절들을 다시 펴서 보곤 했다. 

누군가 네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 이 책을 꼽겠다. 내가 갖고 있던, 그리고 지금도 해소하지 못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요동치게 해 준, 그리고 지금도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가.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내.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불화하고,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을 견뎌야 했던 인생. 800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 유화 한 장 정도. 불행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축복이라면 유일하게 그를 알아 주었던 동생 테오의 존재와 만년에 그의 그림을 인정해 준 평론가 몇 명이 전부일 것이다.


참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도리어 그의 삶이 참 행복해 보였다. 이게 웬 미친 소리냐고?


자신을 오롯이 던질 곳이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잊고 오직 한 곳에 자신의 열정을 바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을 곳이 있었으니까.


그는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다.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사색과 고민을, 그리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그가 남긴 편지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특히 테오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흐의 자부심과 열정이 녹아 있다.


그는 화가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다. 정신병 발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지키는 데 충실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신념을 절대 꺾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건 어떻게 여기건, 자신이 스스로 접하고 느껴서 가치있다 판단하면 거침없이 그 판단에 따랐다. 그는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경외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동네 일가족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비록 그 그림들이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꿋꿋이 자신만의 화법으로 자신이 사랑한 자연과 사람들을 치열하게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의 치열함이 새겨진 그림들은 불멸이 되었다.


그는 적어도 밍숭맹숭하게 살지 않았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고 있던 그 시기의 내게 고흐가 남긴 영혼의 편지들은 내 태만한 영혼을 깨우는 죽비소리가 되었다. 그 책을 처음 손에 든 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책은 내게 그런 존재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아직도,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고흐가 남긴 편지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내가 남기는 글 속에서 훗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나를 보게 될까. 열정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지켜냈던 사람의 초상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살다간 허망한 그림자의 흔적일까.


by 해피의서재 2012. 1. 9. 21:24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2010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노교수가 있다. 춤추기를 좋아했으나 루게릭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가 이제 춤은 고사하고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가기조차 불가능해져 간다. 무력한 육신에 갇힌 채 죽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노교수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죽음을 가치있는 일로 승화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죽음을 생의 마지막 연구 프로젝트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가 있다. 피아노 연주가가 꿈이었으나 결국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스포츠 언론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무엇을 위해 왜 뛰는지도 모르는 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간다. 일과 소비가 전부인 삶을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날 TV방송에서 옛 은사의 인터뷰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린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이 교수와 제자가 14번의 화요일마다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교수의 이름은 모리 슈워츠, 제자의 이름은 미치 앨봄이다. 책은 죽음을 앞둔 모리와 그를 화요일마다 찾아오는 미치의 대화 사이에 미치의 대학 시절 기억들을 교차시키는데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교차편집을 보는 듯한 효과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사제의 이야기가 오랜 시간을 넘나들며 한데 연결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모리와 미치가 나누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 자기 연민, 후회, 죽음, 가족, 감정, 나이듦, 돈, 사랑, 결혼, 문화, 용서, 의미있는 삶 등.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제들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 모피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모리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의 땀으로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결국 교수의 길을 택한다.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모리의 가르침은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미치에게 들려주는 말들 하나하나가 삶에 대한 위로이자 새겨야 할 교훈인데,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네.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걸 굳이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해."

"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 그래서 마음을 상하면서도 상처받지 않아야 하는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이기는 건 언제나 사랑이며,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다."


"살아가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를 발견해야 해.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의미있는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둘러싼 지역 사회에, 그리고 자기에게 목적과 의미를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데 있다. 거기엔 돈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연민을 가지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낀다면 세상은 훨씬 좋을 곳이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일정한 공식이 없다. 양쪽 모두가 공간을 넉넉히 가지면서 넘치는 사랑으로 협상을 벌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다. 자기 상황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황에도 마음을 쓸 때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더 마음을 열고, 광고로 인해 만들어진 헛된 가치에 유혹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생애 마지막 이야기인 양 관심을 기울여라. 그리고... 인생에서 '너무 늦은 일' 따윈 없다.."



미치는 화요일마다 모리를 찾을 즈음, 일하던 신문사가 파업을 하면서 일손을 놓은 상태였다. 일중독자처럼 살아왔던 미치에게 ‘일이 없고’ ‘자기를 찾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닥친 셈인데 이때 미치는 심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워한다. ‘나 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는 사실에 경악해 버렸다’는 문장이 이를 대변한다. 그런 미치에게 모리의 말들은 마음의 위안이자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미치가 속한 스포츠 언론계는 자극적인 상업문화가 넘실거리는 곳이다. 치열한 경쟁이 상존하고, 조금이라도 밀리면 나가떨어지는 살벌한 곳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이 공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도 주택, 차, 생필품 등만 생각하며 끊임없이 소비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삶을 관조하며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건지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방송국에서 모리를 찾아와 3번에 걸쳐 인터뷰를 한 것(첫번째 인터뷰 덕에 미치는 모리를 찾게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후에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 것은 바로 삶을 담담히 관조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결국은 죽는다. 살아서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어떤 화려한 삶을 누렸어도 죽고 나면 한 줌의 재와 제 이름이 새겨진 묘비 하나만이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오늘도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그래서 의미없는 크고작은 싸움을 벌이는가.


누군가가 말했다. ‘이 짧은 세상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헛된 가치에 유혹되지 말고 나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충실하며 사는 것,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 내가 보고 또 누리고 있는 이 자연에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죽음 앞에 내 삶이 당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by 해피의서재 2011. 12. 26. 13:15
* 참고자료 : 2011년 베스트셀러 순위 관련 기사 다수 (미디어다음 검색)


by 해피의서재 2011. 12. 24. 01:00

한 번 읽었던 책을 뭐하러 다시 읽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처음 읽는 책은 한눈에 그 내용이 다 들어오지 않는 면이 없지 않다. 
어떤 책을 처음 읽을 때 그 책에 대해 파악하게 되는 것은.. 
이 책의 대략적인 요지와, 이 책이 두고두고 곁에 둘 가치가 있는 책인지 탐색하는 정도로 제한되는 것 같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어떤 책의 진면목이 정말로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은 그 책을 두 번째, 세 번째로 읽는 시점부터다.
처음 읽었을 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할 때의 그 기쁨은 이제 막 손에 넣은 새 책을 처음으로 읽는 기쁨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by 해피의서재 2011. 10. 23. 14:12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굳이 정제된 독후감을 쓰고 싶단 생각이 전혀 없어졌다.
그러니 읽고 느낀 것을 그저 내키는대로 마구 써내려가 보련다.

책 속에 길이 없고 종교에 길이 없고 국가에 길이 없고 이념에 길이 없다.
중요한 건 단지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에 얼마나 몰입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인생의 해답도, 진리도 오직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삶에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그런다고 그들이 나를 구원해 줄 수도, 그럴 리도 없지 않은가.
경건한 신앙으로 치장하고 그 속내는 곪아터져 가고 있을 뿐인 산중의 정교 수도원에도 구원은 없었다.
터키와 그리스가 박터지게 싸운 끝에 크레타는 터키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이 전장에서 죽인 터키인과 조르바가 찾아가 산투르를 배운 터키인은 서로 차이가 없는 다같은 인간이었다.
불교에 몰두하는 그리스의 지식인 청년이 그토록 죽어라고 읽고 쓰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삶의 진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인간을 종교와 국가, 이념, 그 외 모든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거침없이 노래하고 춤추고 산투르를 연주하고 일하고 놀고 여자와 자고 하며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지식인 청년은 '대지로부터 이어진 탯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이 야성적인 사내에게서 비로소 삶의 자유와 행복을 발견한다.
따지고 보면 역사는 골치아프게 머리 굴리고 이상한 지식을 만들어 내고 거기서 새어나온 이념이란 것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속박한 시간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조르바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사람을 위시하여 이세상의 모든 존재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거침없이 살아가는 조르바.
우린 그 사람처럼 살 수 없을까?
어려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엄청 쉬운 것 같은데.
자유라는 것도 사실 그렇게 누리기 어려운 것이 아닐 텐데.
그래 그냥 다 놔 버리는 거다. 모든 속박과 집착을 놔 버리고 이세상 모든 것을 난생 처음 본 것처럼 신기하게 바라보고 어울리고 같이 놀자. 세상 모든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사물이 내 친구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노닌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참 간단한 일 같은데 현실에서 이러다간 미친X 취급 받겠지?
아니 조르바는 저런 걱정 따위 일절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마음 가는대로 산다.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를 세우고서.
그가 참 부럽다.
그래 인생 뭐 있어??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이 공허한 세상. 철저하게 오늘을 살자. 오늘만 생각하자. 나를 사랑하고 세상 모두를 사랑하자.
그리고, 자유를 누리자. 그게 전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생에 걸쳐 인간 영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화두로 삼았다 한다.
소설의 주인공 조르바가 그런 그에게 강렬한 가르침을 준 실존인물이고.
그의 묘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한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저 묘지명이 참으로 강렬하게 오버랩된다.


by 해피의서재 2011. 10. 23. 13:58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 오르한 파묵 저,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

최근 터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덩달아 이끌리게 된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오르한 파묵이었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터키 최초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가 《내 이름은 빨강》의 작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터키 여행 중에 가이드가 해 주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그가 터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시간 날 때마다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고
인터넷서점에 올라와 있는 네티즌들의 독후감을 열심히 찾아보면서 이 작가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저작 한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여러 작품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눈에 띈 책이 바로 이 《이스탄불》이다. 
파묵은 '이스탄불 작가'라고도 불린다 한다. 이스탄불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고향이자, 평생에 걸친 그의 화두이다.
8편의 장편소설 중 이스탄불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도시 카르스를 배경으로 한 《눈》뿐이다.
최신작인 《순수 박물관》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탄불이 배경이다.
(심지어 이 소설의 소재인 '순수 박물관'은 아예 이스탄불에 그 실물이 들어섰다.)


파묵의 소설을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먼저 이스탄불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가 왜 그토록 이스탄불에 천착하는지, 이스탄불은 대체 어떤 도시인지,
그 도시에서 파묵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왔는지
미리 알고서 다른 저작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게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이스탄불》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아주 어린 아기 때부터 23세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까지,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이 보고 겪은 개인사와 단상,
그리고 언제나 그 배경이자 무대였던 '영원한 고향'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쉼표를 사용한 단어의 열거가 많고, 만연체이다 보니 쉽고 편하게 읽힌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게다가 교정 과정이 꼼꼼하지 못했는지 중간중간에 한두 글자를 빼먹은 듯한 오타가 눈에 띈다.
물론 많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한 개씩 나오는 정도이긴 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사람이나 꼼꼼한 사람이라면
좀 거슬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용도 다소 어렵다. 난해하다기보다는 평소에 접해 보지 않아 생소한 얘기가 좀 많다.
레샤트 에크렘 코추라든지 탄프나르라든지 하는 터키의 작가들 이름이 나오는데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들이라서.
그 외에도 여러 생소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나오는데(플로베르 같은 익숙한 서유럽 작가의 이름도 나오지만),
그들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아무래도 19세기 말~1970년대 초까지의 터키와 서유럽의 문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많아 
읽기에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 두꺼운 책에서 참 감명을 많이 받았고 동질감도 많이 느꼈다.
어린 날의, 그리고 젊은 날의 오르한 파묵. 그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명멸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그 시절의 나와 참 많이 비슷하단 동질감이 느껴져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람도 나처럼 마음 속에 공상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 또다른 판타지를 안고 살았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위 사람들과 완전히 섞이거나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처럼 주위를 빙빙 맴돌며 자괴감도 느끼고,
되레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낯선 거리를 홀로 정처없이 헤매는 것을 좋아하는 면에서 묘한 동지애를 느낀 때문일까.


요리사와 가정부가 있고, 고모댁, 삼촌댁 등 친척들과 함께 한 아파트를 다 차지하고 사는 부유한 집안.
(집안 어른들이 재산으로 아파트를 직접 짓고 그 현관에 자랑스럽게 '파묵 아파트'라고 명패를 써붙였다 한다)
그러나 집안은 그리 화목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계속 재산을 날렸고 집안은 점차 가난해져 갔다.
부모간의 불화도 잦아졌고, 급기야 부모가 어린 아들들을 친척집과 외가에 맡기고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사태도 벌어진다.
파묵 아파트와 지한기르의 외가,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보스포러스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아이의 머릿속에는
'이스탄불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를 자신의 도플갱어와, 집밖 보스포러스 해안에서 잊을 만하면 터지는 화재 사고와 폭발 사고, 그리고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기묘한 살인사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상상' 등으로 구성된 '두번째 세계'가 끊임없이 명멸한다. 음울한 상상과 책읽기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 소년의 눈에 비친 '시티 오브 이스탄불'은...


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잃고 흐르는 시간 속에 서서히 빛 바래고 무너지고 사라져 가는
쓸쓸하고 서글프기 짝이 없는 애잔한 풍경이었다.


풍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완전한 이슬람 영역권도 아닌
이 '어중띤' 도시에 대해 쓰여진 여러 작가들의 글들 역시 이 이스탄불의 어린 소년에게 심란함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서양의 작가들은 그야말로 여행자의 시각에서 이스탄불의 신비스런 느낌을 강조한 글을 써내려갔고,
터키 현지 작가들은 서유럽에 대한 동경과, 그런 동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스탄불의 현실과,
뒷골목 사람들의 전통적인 터키식 라이프에 대한 찬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묵이 훗날 이스탄불에 대해 썼던 4명의 작가를 일컬어 '나의 슬픈 작가들'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정처없이 방황하는 도시와, 그 도시를 닮아 덩달아 갈팡질팡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고요하다 못해 침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 일상이 빚어내는 퇴락한 길거리와 바닷가의 풍경들까지.

회색빛의 이스탄불은 그렇게 어둡고 서글픈 도시였다.

그러고보니, 한 달 전 딱 하루밖에 머무르지 못하긴 했으나 이스탄불에서 활기찬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그러나 왠지 밝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도시.
그땐 단순히 날이 흐려서려니 했는데, 파묵이 말한 '비애에 침잠한 도시'가 바로 그것이었을까.


젊은 오르한 파묵 역시 이 우울한 도시의 공기 속에서 더불어 우울하게 성장해 간다.
그 시절의 청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학교생활에 영 재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선생들에게서도 전혀 존경심을 느낄 수 없어 결석이나 일삼고 부르주아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나 하는 고등학생 파묵. 언제부턴가 정해진 길인 '이스탄불 공대 건축학과'로 순순히 걸어들어가긴 하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한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길이었던 그림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그의 첫사랑이 떠나가 버린 후로는 그림마저도 그를 달래 주지 못한다.
('딸이 술주정뱅이 화가의 누드모델 아내가 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스위스로 보내 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쓰라린 가슴을 안고 이스탄불의 퇴락한 뒷골목을 헤매고, 배를 탄 채 할리치 만을 떠돌며 마음을 달래는 동안에 
그는 자기 안에 맺힌 슬픔을, 그리고 그에게 슬픔과 영감을 동시에 준 이 도시의 영혼을 글로 토해내야겠다는 생각을
서서히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가난과 퇴락과 침울 속에 잠겨 예술 따위 크게 쳐주지도 않는 이스탄불에서
어찌 화가가 되어 가난한 삶을 자초하려 드냐는 어머니의 충고(...)에,

"다시는 건축대학에 가지 않겠어요.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
라고 외치는 파묵의 말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스탄불의 과거와, 그 정체성과, 그 도시를 그려온 화가와 작가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 성장한 한 청년의 내면풍경이 모두 담긴, 
이 두서없는 듯 기묘하고 몽환적인 고백록은 책 속에 실린 흑백 사진들과 함께 묘한 중독성마저 선사한다.
이 책을 읽은 한 네티즌은 '이스탄불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같다'고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안 읽어봐서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 말에 수긍하고 싶어진다. 그냥 왠지 서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 것 같아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후에 보이는 것은 예전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언젠가 다시 이스탄불을 찾을 것이다. 그땐 이번처럼 허겁지겁 겉만 핥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홀로 여유로이 걸으며 다시 본 이스탄불은 처음 찾았을 때 아무 생각없이 보았던 그 풍경과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비애의 안개가 보스포러스의 물결 위를 유령처럼 유영하는 이스탄불에서,
오르한 파묵이 말했던 슬픈 도시의 영혼이 그땐 내 눈앞에 선연히 보일 것만 같다.

by 해피의서재 2011. 7. 31. 22:20

지난 6월 중순, 나는 터키와 그리스 일대를 떠돌고 있었다.
일상이 숨막혀서, 일상을 잊기 위해(사실은 도망치기 위해) 엉겁결에 떠난 터키와 그리스.
그곳에서 만난 것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바다,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와 거친 돌산,
그리고 그들보다 더 푸르고 광활한 자유였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세 가지 생각을 했다.
앞으로의 일상도 여행하듯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내자는 것과
할 수 있는 한 여행을 많이 하자는 것,
그리고 여행의 여운을 어떤 방식으로든 아주 오래까지 가져가자는 것.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터키와 그리스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터키에 관한 책들은 한국-터키 수교 50년(2007년)을 기점으로 책이나름 꽤 출간이 되었는데
그리스에 관한 책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신화나 고대 역사에 관한 책은 많았지만, 정작 그리스의 오늘을 담은 책은 영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내 검색 능력이 모자라서 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터키와 그리스에 관한, 읽어볼 만한 책들의 리스트를 여기에 정리해 본다.
이게 내 나름대로 여행의 추억을 정리하고 간직하는 방법이다.



1. 터키를 찾아서 : 터키 알아보기

 터키의 유혹 : 역사 · 문화 · 여행 · 성지순례... 터키에 관한 모든 것
 강용수 / 유토피아 / 2007
 * 터키에 관한 개괄적인 정보를 망라한 여행안내서. 터키 입문 및 여행 준비에 좋음.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 1-2
 유지원 / 책문 / 2010
 * 터키의 각 지역과 그곳의 유적, 역사를 함께 조명한 책. 
위《터키의 유혹》에서 더 자세하고 심화된 내용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적합함. 
인문학적 감성이 묻어나는 책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잘 맞을 듯.


2. 터키 여행기 : 여행자의 눈에 비친 현재의 터키, 그리고 터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터키홀릭 : 수상한 마녀 미노의 터키여행기
  미노 / 즐거운상상 / 2010
 * 터키 파묵칼레에서 7개월간 생활한 한국 여성의 이야기. 이웃처럼 지냈던 터키 사람들과의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터키의 주요 여행지와 터키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정보가 함께 들어 있다. 정보 획득보다는 주로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거나 이국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읽고 싶을 때 좋은 책. 

 두번째 터키
 
이혜승 / 에디터 / 2011
 * 가장 최근에 발행된 터키 관련 도서. 평범한 터키인의 일상적인 생활 문화를 들여다보고 싶을 때 읽기 좋음.


 이스탄불로부터의 선물
 이나미 / 안그라픽스 / 2007
 * 모녀가 함께 떠난 이스탄불 여행기. 터키의 천년고도 이스탄불의 곳곳을 둘러본 감상을 적었다. 감성적이면서 따뜻한 느낌의 여행기에 끌리는 사람들이라면 만족할 만함. 
 

3. 그리스 이야기 : 그리스 여행기, 혹은 그리스 알기

 야사스! 그리스
 박은경 / 북하우스 / 2008

 * 미코노스, 산토리니, 크레타 등 그리스의 섬들을 여행하면서 느낀 감상을 풀어낸 여행에세이. 느림과 자유가 허락되는 곳, 그리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그리스어, 교통, 음식, 쇼핑에 관한 정보도 싣고 있다. (2008년 기준이라 현재 시점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음)

 아테네로 가는 길
 한태규 / 민음사 / 2004
 * 전직 주그리스 한국대사가 쓴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이해하기 좋다. 2004년 당시 그리스의 정치에 대한 서술도 있어 당시 그리스의 시국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개정판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의 지중해식 인사
 이강훈 / 열린책들 / 2007
 * 사람들의 생활, 거리의 개와 고양이 등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 여행 에세이.

by 해피의서재 2011. 7. 17.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