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저자
이난아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4-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국내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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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광의 중심에 있었으나 점차 그 옛 명성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락해 간 침잠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세상의 변방에서 살아가는 분노와 우울을 딛고 마침내 문학의 힘으로 그의 도시를 세상의 중심으로 옮겨놓은

터키 문학의 거장 오르한 파묵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한 책'.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전담 번역해 온 터키 문학 전문가 이난아의 시선으로,

그의 팬이자 전담 번역가이자 연구가이자 사적인 친구로서 지켜본 오르한 파묵의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 그의 각 작품들에 대한 탐구, 창작에 임하는 자세와 철학, 번역가 이난아와의 인터뷰와 또다른 사적인 면모 등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한 번에 답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이 어느 정도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명의 작가에 대해 그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모두 정리한 책 자체도 사실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그 점에서 이 책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은 오르한 파묵의 생애에 대한 개관부터 시작하여

그의 데뷔작(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부터 최신작(순수 박물관)까지 7편의 소설과 1편의 에세이(이스탄불)를 각 챕터별로 상세히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최신작 <순수 박물관>의 집필 과정과 실제로 이스탄불에 세워진 박물관의 개관 준비 과정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파묵과 그의 고향 이스탄불의 관계에 대하여 정리하는 글과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인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늘로 우물 파듯', 매일 아침부터 매일 저녁까지 한 자리에 앉아 마치 부지런한 직장인처럼 늘 부지런히 글을 쓰는 그는,

'글을 쓰는 그 자체가 행복이자 위안이어서, 그리고 글쓰기가 곧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쓴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생 수도승처럼 하루종일 방 한 구석에서 글만 쓰면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

문학에 대한 파묵의 철학을 알고 싶다면 책의 중반부 '검은 책'에 대한 인터뷰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좋을 것 같다.

 

"문학이 화염 속 세계를 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는 문학 속에서 심오한 어떤 것과 휴머니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휴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문학이지요. 하지만 나는 문학이 세계를 구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실효성에서 보았을때, 사실 다소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중략) 문학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략)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이 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깊이에 빠지고 싶고, 그 세계에 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그저 문학을 통해, 또 내가 쓰는 소설을 통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싶을 뿐이지요."(p.97-98)

 

<안나 카레니나> 등 19세기 소설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 가족소설에서 출발한 파묵의 작품 세계는,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성향을 받아들여 다양한 장르(세밀화, 신문칼럼, 시, 연극 등)와의 콜라보레이션과

기존 소설 구성의 해체(챕터마다 제각각의 화자가 제각각 말을 하는 <고요한 집>, <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등),

이슬람 고전문학과의 퓨전(<검은 책>에서 현대 문학의 포맷 안에 이슬람 고전문학을 각색하여 접목한 것) 등

파격적인 형식적 실험들을 도입한 작품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실험의 틀 속에 담겨 있는 파묵의 이야기는 그가 살아온 이스탄불의 역사와 현대 사회상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고요한 집>과 <새로운 인생>, <눈> 등의 작품에서 격동과 혼란의 터키 역사와 사회상의 변화를 캐치해 녹여넣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 시대에 대한 담담한 관찰 외에 그 시대에 대한 연민과 비판의식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파묵의 소설 대부분은 '환상적이고 유희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고 역사적이다'(p.114).

 

"소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낙관적인 형태로 열려 있고, 세상을 질책하기보다는 인정하며,

의심하기보다는 삶의 경이로움에 동참하라고 호소합니다." (p.132)'

 

책의 뒷표지에는 이 책의 본문 일부가 프린트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변방에 살면서 느끼는 고독과 과거에 대한 굴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주변에 대한 분노가 가끔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때 주변의 폐허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존재하고 있을 한 권의 책을 가능케 한 것은, 책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책 속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야기를 지은 존재는 행복했으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영광 속에서 기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스스로를 변방보다 더한 집필실의 고독과 영감으로 유폐시킨 작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고향의 역사와 오늘을 문학의 힘을 빌어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이세상에 남기고 싶어한 작가 파묵의 내면을 잘 표현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by 해피의서재 2013. 7. 15. 17:09

연휴란 참 좋은 것이다. 일상과 떨어져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연이어 며칠씩 부여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참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내일 일어나면 또 어디로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좋다.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이고 뒹굴거릴 수도 있고 평소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일에 원없이 몰입할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마주쳐야 하는 일상과 현실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추석 연휴에 개천절까지 끼여 있었던 지난 며칠간, 난 두 편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소설 『고요한 집』이었다.

 


고요한 집. 1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12-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고요한 집을 둘러싼 한 집안의 비극, 그리고 터키의 역사!노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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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터키, 이스탄불 근교의 소도시에 위치한 숨막히도록 고요한 집. 침묵과 침울로 일생을 살아온 괴팍한 노파와 역시나 말없이 묵묵한 하인, 그리고 간만에 그들을 찾아온 노파의 세 손주.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여러 등장인물의 시선을 따라 먼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펼쳐진다. 고요하지만 그래서 더 숨막히고, 불안하고, 위태로운 느낌이 한가득인 이 소설은 소설 속 분위기만큼이나 숨막히고 불안하고 위태롭던 당대 터키의 공기도 함께 담고 있었다.

특히 내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 역시 당대 터키 젊은이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모습들을 담아낸 대목이었다. 노파의 손주 삼남매 중 막내인 메틴과 하인의 조카 하산이 각자 자기들의 무리와 얽혀 다니며 벌어지는 일들과 그들의 심리, 그들의 행동. 한쪽에서는 상류층의 소년 소녀들이 어울려 술과 자동차 경주 등으로 정신없이 유희를 탐닉하고, 한쪽에서는 사회에 불만을 품은 소년들이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며 거리에 구호를 쓰고 자기들의 집회 초대권을 강매한다. 딴에는 쿨해 보이려고, 딴에는 진지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국 다 치기어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념을 앞세워 강도에 폭력까지 자행하는 하산 패거리의 행동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짓이다. 뭐가 맞는지 그른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폭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두고두고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우울한 내용과 별개로 여기저기 숨어 있는 '오르한 파묵 코드'를 찾아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소설 속 손주 삼남매 중 장남인 파룩이 게브제 군의 기록보관소에서 오래된 기록을 뒤지는 대목에서는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당신은 조만간 《하얀 성》의 서문을 쓰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결혼한 셰브케트와 소설을 쓰는 오르한의 안부를 언급하는 대목도 내 흥미를 끌었다. 메틴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장면에서는 파묵의 자서전 『이스탄불』에 언급되었던 그의 고등학교 재학 시절이 겹쳐 보였다. 소설의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는 것은 파묵의 이후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연상시켰다.

파묵의 초기작을 읽으며 그만의 코드와 이후 작품들의 모티프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상당했다.

 

이번에 읽은 또다른 책은 김정애의 『우리 옛 그림의 마음』이었다.

 


우리 옛 그림의 마음

저자
김정애 지음
출판사
아트북스 | 2010-07-23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옛 그림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우다!소설가 김정애가 옛 그림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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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부터 정조대왕과 김정희의 문인화, 이름없는 민초들이 남긴 민화, 고려의 불화와 반가사유상, 백자 달항아리, 심지어 무속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남긴 다양한 미술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에 작가 자신의 경험과 다른 분야의 지식 등을 곁들여 인생에 대해 느낀 점들을 편안하게 써내려간 에세이를 엮은 책인데, 마음이 지치고 피곤할 때 곁에 두고 읽으면 마음의 위안을 얻는 데 제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공감했던 문장 몇 줄을 여기 잠시 인용해 본다.

 

세상에 단 한 사람,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이나 넘침에 상관없이 모두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세상의 어떤 질타에 대해서도 무조건 편들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로 인해 세상의 어떤 비난을 함께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 p.50, <추운 시절 나누는 사제의 정> 中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좋아." 이렇게 일탈을 꿈꾸며 무념무상에 빠져 단 며칠이라도 일상을 탈출해 보고 싶은 것이 모든 현대인의 꿈일 것이다. - p. 118, <사색에 잠겨 자연에 스미다> 中

지혜롭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 것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거울을 보기에 더 당당할 수 있도록 얼굴을 만들어 가는 일은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돕는 일이라는 것을 보살을 통해 깨닫는다. - p. 166, <관음도에 담긴 지혜> 中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뒹굴거리며, 혹은 온갖 긴장감을 잔뜩 갖고 책읽기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은밀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알 것이다. 그런 즐거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본능적인 즐거움이기에 아무리 인터넷 문화가 범람한다 해도 인쇄된 책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 p. 188, <조선시대 북아트 능화판> 中

사람을 만나되, 내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편안하고 많이 만나는 것보다는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편안한 사람, 한 사람이면 흡족할 때가 많다. 뭐든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이, 그리고 그 적은 사람을 만나면서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나이 들어가면서 느낀다. - p. 200, <무한한 상상력에 날개를 달다> 中

by 해피의서재 2012. 10. 3. 19:37

 

달과 6펜스 / 서머셋 몸 / 민음사 / 2000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전기(傳記) 같았다. 왠지 한자로 쓸 때 傳記 말고 傳奇라고 써야 할 것만 같다.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천재 혹은 소시오패스(!) 화가의 일대기. 남의 감정 하나 전혀 살필 줄 모르고,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안정된 직장과 안락한 가정을 버리고 험한 밑바닥 인생 속을 뒹굴면서도 그게 힘든지 어떤지 아무 느낌도 없는 듯한, 차라리 사람이 아닌 목석에 가까워 보이는 이 사내. 그의 행적은 기묘함의 연속이다.

 

 처음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왠지 참 낭만적으로 들렸다.

'타히티의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했다는 점도 그렇고 꿈(달)과 현실(6펜스)을 나란히 병치시킨 제목도 그렇고

처음 내가 이 책에 대해 떠올렸던 이미지는 '닿을 수 없는 꿈과 비루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슬픈 화가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막상 책을 직접 읽어 보니 내가 떠올렸던 낭만적인 느낌은 없었다.

책의 막판에 나오는, 주인공이 눈이 멀어버린 상태에서 마지막 힘을 쏟아내 자기 집의 내벽에 그린 천재적인 걸작 이야기와

그 걸작을 자신의 죽음과 함께 불살라 버리라고 했다는 유언에서 강렬한 전율을 느끼기는 했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찰스 스트릭랜드'는 이 사람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배려 혹은 고통에 무관심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멀쩡한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 과정에서 그는 남겨진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다.

작중 나레이터인 '나'가 '가족은 어떻게 살라고 그러느냐'고 묻자 '자기 능력으로 살라고 해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봐 주고 열심히 생활을 돌봐 주는 동료 화가의 결혼생활을 완전히 망쳐 버리고 그 아내까지 자살로 몰아가는 이 자는

차라리 남의 이해와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남의 사정에 무심한 것 못지 않게 자기 자신에게도 한없이 무심하다.

외모 가꾸기는 고사하고 옷도 제대로 빨아입지 않고 한없이 누추하고 더러운 집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굶는 일이 예사요 심지어 열병으로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상태에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인다. 보다못한 동료 화가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무조건 욕부터 하고 본다.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 부두의 일용노동자로 구르고 급식소에서 나눠 주는 한 덩이 빵으로 연명하면서도 아무런 괴로움이나 서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아예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한다. 아니 그냥 영혼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이 사람의 허깨비만 부둣가에서 좀비처럼 휘적휘적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이 비루한 것까진 맞는데 그 현실에 굳이 크게 무게를 두는 것 같지를 않다. 그냥 무표정하게, 무감각하게 그 현실 속을 살아갈 뿐.

책은 반 고흐의 일생 같은 아프고도 처연한 예술혼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를 지극히 당황하게 만드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가까운 지인도 아니고 사실 그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 젊은 시절 우연히 스트릭랜드 부인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찰스 스트릭랜드와 인연이 이어졌고 잠시 파리로 그를 찾아가 몇 번 대화를 나누고 그가 동료 화가 부부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것까지 지켜봤을 뿐 그 후로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숫제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파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를 쓴 듯한 스타일 덕에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마치 실제 있었던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전기처럼 느껴진다. (실존하는 전기처럼 보이려고 한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독자에게 불친절한 소설이기도 하다. 또는 그만큼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독자 스스로 판단할 여지를 많이 남겨 놓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왜 그토록 주위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잔인할 정도로 무심했는가? 그는 무엇 때문에 느닷없이 나이 40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가 머나먼 태평양의 타히티까지 가야 했는가? 타히티에서 그는 그가 찾아 헤매던 것을 결국 보았는가? 나병과 실명의 고통 속에서 고독하게 죽어가면서도 집안에 마지막으로 그림을 남길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흥미로운 건 등장인물 중 비단 찰스 스트릭랜드만 난해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인물들도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참 많다. 파리에서 그를 돕다가 그 때문에 인생이 엉망이 되어 버린 스트로브도 이해불가이긴 마찬가지다. 기껏 도와 줘도 좋은 말 한 마디 못 듣고 종국에는 그에게 아내까지 빼앗기고 집까지 내주고 만다. 집을 내주는 이유도 웃기는데 '아내가 그 누추하기 짝이 없는 스트릭랜드의 집으로 들어가는 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단다. 후에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가 스트릭랜드의 변심(?)에 절망하여 자살했을 때도 그는 스트릭랜드가 그려 놓은 블란치의 누드화를 보고는 모든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떠나기로 결심해 버린다. 그림에서 천재의 걸작을 보았다나. 이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들은 대체 다 뭐란 말인가. 그 역시 예술가였기 때문이어서일까. 사람이 예술이란 유령에 사로잡히면 다들 그렇게 되는지?

 

 그렇다고 예술가들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인 건 아닌 것 같다. 소설 속에 잠시 스쳐가는 인물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영국의 저명한 병원에서 창창하게 잘나갈 수 있었던 의사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매력에 반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곳에 안착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한 의사가 버린 자리를 대신 차지한 다른 의사는 그에 대한 연민 혹은 조롱을 작중 화자인 '나'에게 털어놓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의아함을 느낀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p. 259)라고.

 

 다같은 사람들인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환경에서 비슷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사는데, 세상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참 너무도 많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세계가 있고, 저마다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전혀 다른 제각각의 무언가를 다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개중에는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보이지 않는 어느 한 가지에, 오직 그 한 가지에 몰입한 나머지 주변의 모든 것을 허깨비로 만들어 버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상태도 돌아보지 않는 무아지경으로 가 버린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세상은 넓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역시 너무도 많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 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p. 211) 

 

 스트릭랜드는 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그랬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도, 자신도, 자신의 세계에서 배제시켜 버리고 자신이 찾았고 보았던 그 한 가지에만 자신의 시선을 고정하고 살았던 것일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새삼 그의 삶이 갑자기 처절한 비극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낭만은 없지만 건조해서 더 아린 핏빛 비극.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자 하고 남이 찾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는 데 일생을 던지고 자신의 영혼을 자기만의 심해 속으로 수장시킨, 그래서 결국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던, 아니 처음부터 누군가와 소통할 생각조차도 아예 하지 않았던 비극적인 천재의 이야기.

 

 아니, 이마저도 그의 내면을 이해 못한 제3자의 시선으로 본 결과물에 불과하다.

몸은 썩고 눈은 멀었어도 세상과 격리된 자신의 오두막 벽에 태초의 풍경을 완성하고, 그 풍경을 자신의 죽음과 함께 불살라 버리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 그는 도리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래, 난 차라리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련다.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사람은 끝내 누구도 오롯이 이해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오롯이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깊은 밤 전전반측하며 스트릭랜드가 최후에 보고 그린 것이 무엇일지를 속절없이 상상하는 것뿐이다.

by 해피의서재 2012. 6.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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