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민음사에서 발간된 문화평론가 김병익의 평론집 <지성과 반지성>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오늘의 우리 지식 사회에 있어 가장 우울한 현상은 압도적인 ‘지식기능인‘의 수와 힘에 비해 ’지성인‘은 너무나 적고 미력하다는 점이다. 물론 지식계층의 인구는 많다. 대학교수, 학자, 언론인, 작가, 예술인 등 마땅히 지성의 위력에 의하여 존경받아야 할 지식인은 도처에 있다. 그러나 계층이, 입장이 지식인의 면모를 지녔다 해서 결코 지성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현대 한국의 문학계와 지성계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도서들의 출판 내력을 소개한 서지학 도서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2022)에서 이 문장을 접했다. 저자 김기태 교수는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와) 같은 (김병익) 선생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21세기 지식인들 또한 얼마나 될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by 해피의서재 2024. 2. 11. 23:17

아래의 글은 1961년 2월 5일 정향사에서 발행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초판본에 수록된 ‘저자의 말’에 이은 추기(推記) 일부를 옮겨 적은 것으로,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 (김기태 지음, 새라의숲, 2022) 92~93쪽에서 발췌한 글임을 알립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시공을 달리 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 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 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 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2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 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 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 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by 해피의서재 2024. 2. 5. 21:43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 김현철 / 김영사 / 2023


경제학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확장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어느 순간 돈 불리기 그 자체만이 목적인 학문처럼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지만.

한때 의사였던 저자는 재산도 환경도 받쳐 주지 못해서 제 몸 건강 하나 챙길 상황이 못 돼 유기되고 방치되어 있는 시골 저소득층 사람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과감히 삶의 진로를 경제학자로 틀었다. 책의 서두에 언급된 대로, 전적으로 각자 능력에 따라 개인의 삶의 질이 좌우된다는 능력주의는 사실 허상이며 각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큰 조건은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가정적-사회적 환경이라고 저자는 자각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그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제도가 국민의 실제 삶에 피부로 와닿는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세수 부담에 발목 잡히지 않고 그 제도가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설계하여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게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주된 생각이다.

저자는 그동안 경제학자로서 세계 여러 국가를 대상으로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사회 지표 조사 분석과 자체 사회실험을 진행하며 얻어낸 데이터들을 토대로 저출생, 여성 경력단절, 노인부양, 실직과 소득보장 등 현재 한국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풀어놓는다. 선의만으로는 현실적으로 제 기능을 해내는 복지사회를 만들 수 없고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나는 사례도 많기에 성급한 정책 추진보다는 신중한 접근과 철저한 사전 연구를 선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일견 타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데이터 만능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적 시선도 갖게 되지만, ’데이터로 사회를 분석하고 경제학적 접근으로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체제를 정립하여 개개인의 삶의 질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에만큼은 전적으로 찬성하는 바다.


by 해피의서재 2023. 12. 1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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