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불태우다 / 리처드 오벤든 / 책과함께 / 2022



“지식은 아직도 공격을 받고 있다. 체계화된 지식의 집적체는 과거 역사 속에서 공격을 받아 왔던 것처럼 지금도 공격을 받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는 지식 보존을 도서관과 기록관에 맡겼다. 그러나 오늘날 이 기관들은 여러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들은 진실을 부정하고 과거를 말살하고자 하는 개인과 집단, 심지어는 국가들의 목표가 되고 있다.” - 본문 10쪽


영국 보들리 도서관의 제25대 관장인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와 같은 우려를 토로했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들과 그들이 깨우친 것들을 그 다음 대 사람들이 이어받아 배우고 발전시키고 확장시키면서 인간 문명의 역사가 발전해 왔음을 우리 모두가 안다. 그 흔적과 깨우침들이 사라지지 않고 후대에 계속 전해질 수 있도록 인간은 문자를 만들고 점토판과 파피루스와 종이에 이들을 정리하고 작성했다. 우리는 그것을 기록이라 부르고, 그 기록들을 엮은 집합체를 책이라 부르며, 그 책들이 집적된 곳을 도서관 또는 기록관이라 부른다. 도서관과 기록관이 문명, 즉 지식과 문화의 저장소이자 보루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이치로, 한 지역의 도서관에는 당연히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여기서 그 지역 사람들의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이 형성되기 마련이며 그 정체성은 그 지역민, 혹은 민족이 자신들의 역사를 지키고 미래를 향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긴 세월 동안 세계 도처에서는 책과 도서관을 파괴함으로써 특정 민족, 특정 지역민의 지성과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해 왔다. 엄연한 정신적 학살 행위다. 물론 당연히 그에 맞서 싸우는 고귀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서와 기록관리사들은 지식인이라기보다 차라리 전사(戰士)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은 아주 최근까지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책은 흔히 누군가의 방화로 한순간에 불탄 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전부터 이미 당대 사람들의 안일한 관리와 대처 속에서 방치된 채 서서히 녹슬어 사그라져 갔던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이야기와, 영국 왕실을 둘러싼 종교 내전 속에서 벌어졌던 고문서들의 수난과 실종 그리고 그 혼란 한가운데에서 큰 위기의식을 느낀 한 지식인(토머스 보들리)의 분투에 의해 설립된 보들리 도서관의 건립사를 언급하며 운을 뗀다. 먼 고대와 중세를 거쳐 19세기 영국의 미국 의회도서관 파괴 사건, 1,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홀로코스트, 보스니아 내전, 21세기 초입에 벌어진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 중에 작정하고 벌어지는 침략자들의 ‘정신 학살’, 그리고 여기에 맞서 목숨을 걸고 고서와 공문서들을 피신시킨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의 상당 부분을 채우고 있다.

“이 책은 과거에 이 기관들(도서관과 기록관들)이 파괴됐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서와 기록 관리자들이 저항한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상찬하기 위해 쓰였다. 지식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되고, 사람들과 사회가 그 지식으로부터 영감을 개발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보존된 것은 그들의 노력을 통해서였다.” - 본문 27쪽
“수백 년에 걸쳐 약화한 감독, 지도, 투자의 부족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파괴의 궁극적 원인이었던 듯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야만적 무지가 문명화한 진실에 승리했다는 파멸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식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기관을 금전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후순위로 돌리며 전반적으로 경시하는 데 따른 점진적인 몰락의 위험성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 본문 62쪽
“1814년 영국에 의한 (미국 의회)도서관 파괴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한 행위였다. 그것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설계된 계획적인 정치 행위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고대 세계의 몇몇 지식에 대한 공격과 닮았다.” - 본문 145쪽
“도서관과 기록물을 파괴하는 동기는 사례마다 각기 다르지만, 특정 문화를 말소한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 본문 246쪽
“한 사회에서 지식을 빼돌리는 것은 (그 지식이 파괴되지 않을지라도)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 사회가 자기네 스스로의 역사에 접근하지 못하면 과거에 대한 서술이 통제되고 조작되며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 - 본문 284쪽
“기록관원과 도서관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지식을 보호하는 전략과 기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기록물 파괴를 막기 위해 때로 놀라운 수준의 헌신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1940년대 빌나(현재의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종이부대’ 남녀들이 그랬고. 1992년 사라예보에서 죽은 아이다 부투로비치가 그랬고, 2000년대 바그다드의 이라크기억재단의 카난 마이캬와 그 동료들이 그랬다.” - 본문 341쪽


종이책과 기록의 파괴와 보존을 둘러싼 오랜 전쟁을 상세히 서술하던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대두 속에 거대 IT 업체로 대표되는 ‘민간 열강’의 사유재가 되어 가는 디지털 기록자료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아울러 거세지는 온라인 상업주의와 스낵컬처의 물결 속에서 물리적, 금전적 지원 문제에 맞닥뜨린 ‘공공 지식 보급의 보루’ 공공도서관의 위기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주의 환기를 호소한다.

“오늘날 미래는 언제나 과거에 대한 지식에 접하는 데 의존하고 있고, 디지털 기술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변화시킴에 따라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디지털 생활에 의해 만들어진 지식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여러 조직들에 의해 정치적, 상업적 이득을 얻는 데 어떻게 이용되느냐에도 달렸을 것이다.” - 본문 328쪽
“사회의 지식이 개인 영역에서 상업 영역으로 옮겨진 것은 사회가 응답해야 할 커다란 문제를 동반했다.” - 본문 336쪽
“현대의 삶은 갈수록 단기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즉각적인 수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고, 거래는 증권거래소에서 매 시간 수십억 회의 매매가 체결될 정도로 자동화됐다. 이렇게 단기적인 것에 고착됐음은 삶의 여러 측면에서 분명하다. 장기적인 사고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됐다. (...) 지식을 평가하고 정리하고 보존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보다 파괴하는 것이 더 값싸고 더 편리하고 더 쉽고 더 빠르겠지만, 단기적인 편의 때문에 지식을 버리는 것은 사회의 진실 파악 능력을 약화시키는 확실한 길이다. 지식과 진실이 줄곧 공격의 목표가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계속 우리의 기록관과 도서관을 신뢰해야 한다. 보존은 사회에 대한 서비스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온전성(장소에 대한 인식)을 뒷받침하며 사상, 의견, 기억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도서관과 기록관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금 지원은 줄고 있다. 이런 일이 디지털 형태를 띤 지식 보존이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중요한 요구인 시대에 일어나고 있다.” - 본문 348쪽


가짜뉴스와 근거 없는 선동성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SNS를 휩쓸고 사람들이 그때그때 순간적이고 말초적인 이슈에 부초(浮草)처럼 몰려다니며 오락처럼 소비되는 맥락 없는 혐오가 대세가 되어 버린 시대에, 정제된 책과 문서를 조금이라도 깊게 살피며 좀 더 길게 생각하고 사유하는 일이야말로 여러 모로 위기에 처한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깨어서 생각하고 현명하게 처신하는 시민들만이 무너지는 공동체를 일으켜세울 수 있다고, 그리고 공공도서관이야말로 시민들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무기고이자 보루라고 믿고 있다. 책의 저자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듯하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프나의 공공도서관이, 그곳 공동체의 교육 기회를 손상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공격에서 의도적인 목표물이 됐다는 것을 읽을 때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주변 모든 곳에서 공공도서관은 문을 닫고, 그 자금 지원은 삭감되고 있다.” - 본문 353쪽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우리의 민주적 과정에 비판 정신을 새로이 불어넣기 위한 사상의 자유로운 유포에 의존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출판의 자유를 의미하지만, 시민들은 온갖 색깔의 의견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도서관은 온갖 종류의 콘텐츠를 취득하며, 이런 자원이 우리의 견해가 도전받을 수 있게 하고 시민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한다.” - 본문 354쪽
“우리는 모두 책에 대한 공격을, 인간에 대한 공격이 곧 다가오리라는 ‘조기 경보’ 신호로 보아야 한다.” - 본문 362쪽
by 해피의서재 2024. 3. 24. 11:33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대니얼 지블랫 외 지음 / 어크로스 / 2018


오늘날 형식적 민주주의는 전세계에 걸쳐 많이 보편화되었지만, 정작 민주주의 본연의 취지와 정신을 잃고 사실상 전제주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 세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 책은 2016년 미국 대선 전후의 정계와 여론 동향을 중심으로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1930년대의 독일과 스페인, 1960~70년대의 칠레와 1990년대의 베네수엘라, 2010년대의 터키 등의 사례도 주요 반면교사로서 비중있게 언급된다.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소득과 지위, 심지어 태생에 따라 사회가 양극화되고 이로 인한 대중의 불만이 가중되는 가운데 권력을 잡기 위해 정당과 정치인들조차 상호 관용과 존중보다 혐오와 폭력을 더 선호하게 되고 이를 양분삼아 독재적 성향의 포퓰리스트가 독버섯처럼 자라 사회를 장악하는 일련의 프로세스가 이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에서 꾸준히 강조하고 있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우리 정치 지형과 여론 행방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부터 돌아보는 일이 먼저 시급할 것 같다. 비난과 복수와 일명 '사이다'라 불리는 날선 워딩에 열광하는 와중에 우리 사회는 이미 저 규범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버린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스럽다. 민주주의 본연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서 부식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정계를 비롯하여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

극단적 정치 분열은 민주주의 규범에 위협이 된다. 정치판이 세계관의 차이를 넘어 사회적, 인종적, 종교적 갈등으로 배타적인 진영으로 분열될 때 그 사회는 관용의 규범을 유지하기 힘들다. (...) 정치 집단이 서로 간 공존이 불가능한 이념으로 분열될 때, 특히 구성원끼리 교류가 부족하고 고립이 심해질 때 정상적인 정당 경쟁이 사라지고 적대적인 투쟁이 시작된다. 상호 관용이 사라지면서 정치인들은 자제의 규범까지 저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반체제 집단이 등장한다. 상황이 이러한 국면으로 접어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 148쪽
by 해피의서재 2024. 3. 23. 21:52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 / 김기태 / 새라의숲 / 2022


시, 소설, 수필, 서간…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글이 있고 지금도 도처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글이 탄생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직접 겪으며 통과해 온 시대를 자기 각자의 지식과 감성으로 해석한 글을 남겨 왔다.
이렇게 태어난 글들은 출판사의 편집자와 장정가를 만나 정갈하게 교정된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서점을 거쳐 세상에 나오고, 독자 대중을 만나 서로 교감하는 가운데 점점 더 강한 생명력을 얻어 마침내 수십 수백 년을 살며 다음 세대에 계속해서 지난 세대를 증언하게 된다.

이 책은 한국의 20세기, 즉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사이에 쓰여지고 출판된 문학책 15권을 가려 뽑아 이들의 초판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작품의 집필과 초간 출판 과정,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풍경을 고풍스런 어투로 전하고 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한국 고유의 정서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했던 시인 소월과 영랑의 마음을,
도시화와 산업화가 정신없이 몰아치던 격동의 시대를 혼란하고도 고독하게, 또 처절하게 살았던 개인들의 내면을 감각적인 소설로 기록한 젊은 작가들의 마음을,
숨막히는 독재정권 치하의 모순 가득한 사회를 바라보며 ‘사람은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한 당시 시대의 어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품은 열다섯 책들의 초판본 이야기가 여기 있다.

표지, 목차, 간기면까지 사진으로 훑어보며 이들의 출판과정과 시대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는 이 책을 어느 분야로 분류할지 묻는다면 대중이 읽기 쉽게 쓴 서지학 또는 출판학 도서로 분류하면 될 듯하다.

by 해피의서재 2024. 2. 13.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