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 이수정, 이다혜 / 민음사 / 2020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공개되어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은 동명의 팟캐스트 방송 내용을 글로 옮긴 책.

한국을 대표하는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와 함께 동서고금의 주요 범죄 스릴러 영화 속 범죄와 범죄자들을 전문가의 시선으로 분석하고,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방송 스크립트를 그대로 옮긴 대화체로 쓰여 있어 매우 쉽고 편하게 읽히나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다.

가정폭력과 성범죄, 디지털 범죄 및 각종 혐오범죄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부터 대형 강력범죄의 상당수가 촉발되는 것을 이 책 속에서 영화 이야기와 함께 제시되는 다양한 실제 사례에서 선명히 볼 수 있다.
슬럼화된 지역과 하위 계층에서 일어나는 여성 및 아동 청소년 대상 범죄에 법과 공권력과 정계가 무심한 사이, 여전히 수많은 사회적/물리적 약자들이 범죄의 위험과 신변의 위협에 노출되고 있음을 이 책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책이 촉구하는 것은 무분별한 엄벌주의의 주장이나 자극적인 여론 형성이 아닌, 사회 구성원들 간의 연대와 사회 전반의 인권 감수성 확립 그리고 입법-사법-수사 기관의 합리적인 기능 수행이다.
개인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계의식을 늘 가지고 피해자와 연대하며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하며, 국가와 기관은 빠르게 변해 가는 시대에 자신들의 속도를 맞춰 가며 무엇보다 약자와 피해자의 인권에 우선하여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제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흉흉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요즘, 어느 때보다 지금 정말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수정 교수가 이 방송에 나선 이유가 이 책의 주제를 충분히 함축한다.
“우리는 연대하기 위해 이 방송을 하고 있다.”

<책 속의 주요 문장>
한국에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집을 나가야 해요. 그런데 상식적으로 봐도 때린 사람이 집을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42쪽)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등한 관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너의 인격과 나의 인격을 서로 인정해 주고, 용인하고, 약점은 약점대로 수용하는 것이 정말 성숙한 사랑이죠.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제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혜택 안에서 안주하는 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51쪽)

형사 사법 기관 종사자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80쪽)

태어날 때부터 잔혹한 가해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어린 시절에 지속적인 폭력 피해를 당하다가 이런 폭력적인 경험이 나의 일상이구나, 내가 이렇게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강자가 될 수밖에 없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본인이 가해자가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101쪽)

사실 피해자 입장을 생각해 보면 양심의 갈등 이전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분명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용기가 없던 사람도 용기를 낼 수도 있습니다. (126쪽)

힘없는 여성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힘없는 남자들입니다. 하층 계급은 상층 계급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폭행은커녕 접근조차 쉽지 않기 때문에 대신 만만한 하층 계급을 향해 화풀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40쪽)

경찰력과 자본을 어떻게 잘 분리할 것인가는 사실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242쪽)

규범의 바탕이 되는 도덕성은 슬픔이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슬픔도 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이타적인 슬픔도 있지요. 슬픔은 고도화된 정서고, 이를 느낄 수 있어야 동정심이나, 공감, 또는 죄의식 등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270쪽)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사람이 지배 계층이라도 그들을 공격할 수 없으니 만만한 쪽으로 눈을 돌려 자기방어력이 낮은 여성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들은 여성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는지를 찾아보면 별로 없어요. 일종의 피해 의식이자 망상인 것입니다. (...) 인셀이란 백인 남성에 한정되기보다 사회로부터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피해 의식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72쪽)

인권은 중요하지만 누구의 인권도 절대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코 한쪽만 옳고 한쪽만 틀리는 일은 없습니다. 결국 정부는 공동체가 안전하게 함께할 수 있도록 상호간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갈등을 조정해야 합니다. (279쪽)

남성 조사관이라도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고 공감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런 태도를 취하며 피해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별보다 고통에 대한 이해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더 중요합니다. (354쪽)

강간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를 주목하는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절제를 못하는 가해자의 욕망이 문제지, 피해자가 어떻게 생겼느냐, 피해자가 어떤 특성을 가졌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355쪽)

특히나 지금은 인터넷 등 기술 관련 범죄가 많은데요. 범죄 수사는 사실 체력보다 기술이 관건이다 보니 당연히 다양한 범죄에 대응할 수 있는 수사 인력 확충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수사 방식이 과학화될수록 성별은 더욱 중요하지 않을 테고요. (356쪽)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만연한 사회에 미래는 없습니다. (381쪽)

어느 나라나 성범죄는 발생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을 중히 여기고 아이를 찾아 나서는 국가는 그 점에서 선진국입니다. 그저 일부 아이들의 불행이고,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너희의 불행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사회가 과연 선진국일 수 있을까요. (382쪽)

이런 피해를 입는 아이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해야 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런 피해를 입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요. (389쪽)

부당한 일에 대한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안다. (399쪽)

by 해피의서재 2020. 6. 2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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