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1961년 2월 5일 정향사에서 발행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초판본에 수록된 ‘저자의 말’에 이은 추기(推記) 일부를 옮겨 적은 것으로,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 (김기태 지음, 새라의숲, 2022) 92~93쪽에서 발췌한 글임을 알립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시공을 달리 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 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 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 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2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 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 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 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by 해피의서재 2024. 2. 5. 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