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각기 다른 개인들의 개별성과 자유를 존중하고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합리적으로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 하는 사회.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 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 이것이 헌법이 지향하는 사회이고, 이런 사회를 지탱하는 사고 방식이 법치주의이다.


최소한의 선의 / 문유석 / 문학동네 / 2021


전직 판사 출신인 문유석 작가가 헌법과 법치주의를 소재로 우리 시대 사회의 선의와 정의, 공정과 평등, 자유 등의 담론을 돌아보며 쓴 책이다. 헌법에 담긴 민주주의와 인권수호의 정신을, 쉽고 친근한 문법을 구사하여 풀어쓴 에세이로, 혐오와 폭력이 만연한 지금 이 시기에 특히 꼭 새겨 기억해야 할 문장들이 책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법은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서로의 자유가 충돌하여 침해당하는 것을 방지하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전하며 행복하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저자가 법을 일컬어 ‘최소한의 선의’라 정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사회는 제도 만으로 건설 할 수 없다. 밥은 굶지 않게 최소한의 먹을 것은 국가가 지급하고 있지 않느냐, 뭘 더 바라느냐 감사할 줄 알아야지. 이런 마음이 지배하는 사회는 아무리 사회 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급자들을 동냥하는 걸인으로 취급하는 사회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헌법상 기본권이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 하는 기본권의 주체로 보느냐, 남들의 동정을 받는 대상으로 취급하느냐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 74쪽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변덕과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 뿐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도 법치주의에 기반한 사고 방식이 뿌리내려 있어야 한다. 이제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여서는 안 된다. 사고 방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법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누구든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말고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가 진정한 법치주의 사회다. - 82쪽

답답하고 지루한 법치주의가 사망한 곳에는 속 시원하고 화끈한 파시즘이 독버섯처럼 피어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파시즘이 득세한 곳에 개인의 자유가 설 자리는 없다. 법치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지켜 주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 89쪽

타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 - 109쪽

왜 법이 범죄자들에게 관대하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법은 범죄자들에게 관대한 것이 아니다. 법이 인간에게 관대하게 만들어지다 보니 범죄자들이 반사적 이익을 누리게 된 것이다. (…) 법치주의 시스템은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이념으로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결국 쉽게 말하면 인간을 특별히 귀한 존재로 취급하겠다, 특별 대우를 하겠다는 이야기다. (…)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보는 인본주의 헌법 질서하에서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게 된다. - 144쪽

법이 인간 사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의’라면 형벌은 사회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악의’인 것이다. - 150쪽

우리의 법치주의 시스템은 인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중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법조 엘리트들이 먼저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 159쪽

목적이 정당하고, 방법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필요 최소한이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과잉금지 원칙은 개인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 174쪽

결국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는 법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치도 필요하고, 윤리도덕도 필요하다. 각자가 자기 역할을 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그중에서 법은 융통성 있고 발빠른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다. 법은 엑셀러레이터가 아니라 브레이크 쪽이다. 개별 사건에서 정의로운 결론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결론은 철저히 국민의 대표가 제정한 법 안에서, 해석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도출해야지, 이를 넘어서면 국회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 177쪽

현실에서 정의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헌법이, 그리고 롤스의 <정의론>이 제시하는 방향은 분명히 있다. 더 많은 자유와 창의, 혁신을 보장하고 장려하는 것이 우리 헌법 질서의 근본이다. - 204쪽

자유가 사회를 견인하되, 그 속도가 누군가를 낙오시켜 쓰러지게 만들지 않도록 평등이 제어하는 것. 무조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도 아는 것. 어쩌면 그 망설임의 순간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 205쪽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 249쪽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 - 253쪽
by 해피의서재 2022. 4. 4. 21:40


​골든아워. 1-2 / 이국종 / 흐름출판 / 2018

이국종 아주대 외상외과 과장의 에세이 <골든 아워>가 최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이 포스팅에 올린 사진은 바로 이 책의 뒷표지를 찍은 것이다.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된 이 책은 이 교수와 그가 이끄는 중증외상 팀이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처절하게 버텨 온 사투의 기록이다. 긴 말 필요없이 이 뒷표지에 새겨진 글귀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기 충분하다.

16년이라는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이 밀려오고 밀려갔으며 살아남는 이도, 끝내 숨을 거두는 이도 있었다. 아덴만 여명 작전과 세월호 참사, 귀순 북한병사 사건 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도 있었다. 그 속에서 중증외상외과라는 분야가 새삼 세상의 주목을 받고 관련 정책이 쏟아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증외상을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된 게 없었고 아주대 중증외상 팀의 스태프들과 소방 구조대원들은 과로와 사고 등으로 하나 둘 무참히 쓰러져 갔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간결한 어조로(저자 자신이 밝혔듯 김훈의 <칼의 노래>와 흡사한) 적어 내려간 이 교수의 글 속엔 차마 미처 숨기지 못한 분노와 슬픔이 오롯이 어려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게 한다.

​“한국 중증외상센터의 직원 고용 수준은 영미권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적은 인력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하느라 과로로 쓰러져 나갔다. 수술방의 모든 의료진이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의 피를 뒤집어썼다. 전담간호사들이 다치거나 유산해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이 현실은 무관심 속에 외면받고 있었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무슨 이유로 희생을 기본 값으로 감수해야만 하는가. 거대 담론만이 존재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증외상센터의 지속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 국민들이 아는 사실은 실제 상황의 100만 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고, 그 안에서 각자도생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 사회는 영화 <매트릭스>와 흡사하고,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의 근간은 모르는 채 사는 것이 좋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정부나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 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낫다. 일부 ‘선수’들만이 그런 시스템을 이용해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할 뿐이다. 나는 이 사회 안에서 평범하게 자영업자로서의 의사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제넘게 시스템에 접근한 탓에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 281~282쪽


이 말에 더 이상 무슨 얘기를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스스로 이제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는 게 지치고 지겹다고 토로하는 지경이 되어 있다. 떠나라면 언제든 떠날 마음을 늘상 품고 살아 왔다는 저자. 그럼에도 지금껏 떠나지 못하고 지옥같은 사선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곳곳에서 생계를 위해 분투하다 육체가 으깨지고 부서진 채 실려오는 수많은 환자들과, 그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료와 후배들을 위한 마지막 불씨라도 지키고 남기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모두가 번지르르한 겉치레에 집착하고 모든 것이 기계적인 경제논리로 재단되는 세상에서 말도 안되는 수준의 박한 지원과 그보다 더 야박한 사회상(닥터헬기에서 나오는 소음조차 견디지 못하고 민원을 퍼붓는 등)을 견뎌내며 자신의 건강과 생명마저 제물로 바친 이들의 일대기를 읽어 나가고 있자면 대체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소수의 희생에 기반하고 안주하며 버티고 있는 조직과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을 것인가를 되뇌면서도, 이 땅에 제대로 된 중증외상 치료 시스템을 이끌어갈 마지막 희망을 남겨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이국종 교수와 그의 스태프들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 속에서 피울 수 없는 꽃을 키우는’ 심정으로 생사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줄 의무를 이 사회가 이제 자각할 때도 되었다. 실은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래야 한다.

by 해피의서재 2018. 11. 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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