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희망의 또다른 이름
삶을 견디는 기쁨 / 헤르만 헤세 / 문예춘추사 / 2024
김훈의 <칼의 노래>는 ‘절망으로 절망을 돌파하는’ 한 인간의 고뇌에 찬 내면을 그려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은 여러 모로 그 책을 닮았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것이 피폐해진 20세기 한복판을 살아낸 헤세는 삶과 죽음, 행복과 우울, 희망과 절망, 그리고 인간문명의 존재가치에 대한 온갖 복잡한 상념들을 가감없이 이 책에 적어 내려갔다. 산문과 시, 기행문과 투병일기, 우화같은 짧은 이야기(한 도시의 흥망성쇠, 불꽃놀이 이야기 등), 형식과 소재를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펜 가는 대로 써내려간 글들의 모음.
자신의 우울을 토로하고, 죽음을 태연하게 입에 올리고, 자살이 왜 무조건 나쁘단 거냐는 발칙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돈과 쇠와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현대 문명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투의 냉소적인 일갈도 있다. 그러나 결국 헤세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 실존에 대한 긍정이다. 개인의 요동치는 내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 그것이 어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일지언정 무작정 피하지 말고 직시하자는 것, 돈도 안되고 아무 실질적 가치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예술과 자연은 존재 그 자체로 가치가 넘치며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귀한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닫자는 것. ‘절망은 진정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고 추구한 결과’라는 헤세의 정의에 설득력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손 안에 들어오는 사이즈에 미니멀한 북디자인, 책 곳곳에 들어 있는 헤세의 그림들 등 얼핏 ‘힙스터픽’스런 느낌을 주는 책이지만, 글의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다. 삶과 죽음, 세상의 모순과 그에서 오는 절망에 대해 깊은 고뇌를 느껴본 이들에게 더 와닿을 책으로 보인다. 절망의 언어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에게 더 울림이 클 책.